〈 162화 〉 노움의 눈물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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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갈색의 시원한 맥주가 혀끝을 타고 흘러든다.
맥주의 양조에 주로 쓰이는 보리말고도 밀이 함께 쓰였기에 그 부드러움은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였고, 쌉싸름한 맛과 함께 퍼지는 향기로운 곡식의 풍미가 주류 특유의 비릿한 알코올의 향을 흔적도 없이 지워내고 있어 일말의 거부감조차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우람하고 투박하게 생긴 드워프들은 시원하고 톡쏘는 라거 맥주를 선호할 거라고 생각하기 쉬웠으나, 그들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미식에 진심이었고 섬세한 미각까지 가지고 있어 깊은 풍미를 내는 부드러운 에일 맥주를 선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맛보는 이 갈색의 에일 맥주는 리겐하르트의 모든 양조 기술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최고 자신작이었기에, 맥주가 이끌어 낼 수 있는 향기의 절정을 보여주는 듯 경이로운 맛을 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숯이 담긴 놋쇠 그릇은 그 위에 얹어진 철망 위에 고기가 얹어져 익어가기 시작하자 비로소 그 용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주방에서 완성된 육류 요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온기를 잃고 육즙도 빠져나가기 마련인데 이는 즉석에서 먹을 만큼의 고기를 구워 먹는 것으로 갓 구운 고기를 맛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었다.
직접 굽는 일에 수고가 조금 들더라도 지방이 녹아내리자마자 꺼내어 먹는 고기는 무척이나 부드럽고 고소한 풍미가 가득했다.
두께가 육 멘톨 정도는 될 법한 두꺼운 고기는 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에 구워져 장작 구이 특유의 매캐한 향이 가득 배어 있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식욕을 마구 자극할 정도로 향긋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직화 구이로 조리된 것이었기에 겉은 살짝 바삭할 정도로 익혀졌으나 속은 부드러웠고, 한 입 베어 물면 그 내부에 꽉 들어찬 육즙이 터질 듯 흘러나오며 충만한 식사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에 곁들여 먹는 밀빵은 야성적인 고기 요리와 달리 섬세한 손길로 조리된 듯 그 감촉이 부드러웠고 일정한 수분을 유지해 촉촉하기까지 했다.
그 위에 버터를 발라서 먹는 방식이었는데, 싱싱함이 살아있는 버터의 맛은 고기의 육즙과는 또 다른 고소함을 자랑하며 그 식욕을 자극하는 향기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약간 짭쪼름하면서도 지극히 고소한 버터를 발라 먹는 부드러운 밀빵의 맛이란 다른 재료를 얹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훌륭한 하나의 요리였다.
그 밖에도 식물에서 추출한 기름을 뿌린 신선한 샐러드나 꿀에 재워 두었다가 건져낸 달콤한 살구, 두꺼운 밀면을 각종 채소와 함께 올리브 기름에 볶은 파파 베어드(Papa Beard) 등 무엇 하나 제쳐 놓을 것이 없는 훌륭한 요리들이 식탁을 풍성하게 구성하고 있었다.
“많이 드시오! 어찌 입에는 맞는지?”
“정말… 맛있습니다. 달콤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육즙이 가득한 바비큐하며 채소의 신선함이 살아있는 면 요리… 심지어는 버터 한 스푼까지도 놀랍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식사를 대접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껄껄껄! 그렇지! 드워프나 오크나 땀 흘려 일하는 대지의 자녀들 아닌가!! 뭘 모르는 엘프 놈들이야 야만스럽다느니 느끼하다느니 하면서 드워프의 식탁을 기피하고는 하지만! 평생 풀떼기나 뜯어 먹고 사는 것들이 요리가 무엇인지 알 턱이 없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소!!”
음식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진지해지는 넬라넬라.
네로멜티아는 평소의 모습과 다소 격차가 존재하는 그녀의 모습이 퍽 재미있어 슬쩍 웃음을 흘렸다.
이 모습을 넬라넬라가 목격했다면 자신도 모르게 열정을 불태우는 스스로의 모습을 자각하여 무척 부끄러워 했겠지만, 리겐하르트와의 이야기에 몰두해 있었던 터라 자신을 바라보며 키득거리는 네로멜티아의 모습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맥주라는 것을 마셔본 경험이 적어서 잘은 모르지만… 이 맥주 또한 너무나 훌륭합니다. 탄산이 올라와 청량감이 가득하면서도 목넘김은 부드럽고, 곡주의 형태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 향기는 과실주에 못지 않으니…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별로 마셔본 적이 없다면서 이토록 명확하게 분석할 수 있다니, 아가씨도 꽤 식견이 깊은 것 같소! 내 맥주가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느낌은 참 좋구만! 으허허허허!! 아주 만족스러워!! 한 잔 더 받으시오!!”
자신의 요리들을 칭찬 받았을 때도 흡족한 미소를 만면에 이루고 있었던 리겐하르트.
더 나아가 자신의 맥주가 극찬을 받자 그는 바보같이 보일 정도로 지극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심지어 넬라넬라의 극찬 속에 구성된 맥주의 평가는 실로 자세하고 정확한 것이어서 더욱 기쁜 것이었다.
이토록 술에 대해 잘 아는 이가 나의 맥주를 극찬해 주다니!
최고의 맥주 양조 장인이 꿈인 리겐하르트에게 있어서 넬라넬라의 칭찬은 자신이 만든 무기를 칭송하는 세상의 평가보다도 더욱 만족스럽고 값진 것이었다.
“그나저나… 맥주를 마셔본 경험이 적다는 건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오? 보아하니 맥주를 싫어하는 취향도 아닌 듯 하오만.”
“… 저는 카보니 숲 출신입니다. 카보니 숲은 한 마녀분의 도움으로 오염되지 않은 자연 환경을 유지하고 있기에 굶어 죽는 이는 없고 정기적인 연회도 가질 정도는 되지만, 그렇다고 풍족한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수확한 곡식은 전부 빵을 만드는 데 쓰여야 했기에 카보니 숲의 술은 대부분 블랙베리나 플럼 따위로 빚은 과실주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턱!
“읏…!”
넬라넬라의 이야기를 듣던 리겐하르트는 갑작스럽게 넬라넬라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라운드 실드를 보는 것 같이 두껍고 큼직한 손바닥이 넬라넬라의 손을 붙잡자 둔중하고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넬라넬라 역시 이백 멘톨에 육박하는 신장을 가진 오크족이었기에 손의 크기도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신장에 반 밖에 되지 않는 리겐하르트의 손은 넬라넬라의 손을 모두 뒤덮을 정도로 큼직했다.
리겐하르트의 손바닥에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된 넬라넬라의 손.
갑작스럽게 자신의 손을 잡아온 리겐하르트에게 놀란 넬라넬라는 무척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네로멜티아는 자신의 여자인 넬라넬라의 손을 덥썩 잡아온 리겐하르트에게 순간 발끈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으나, 이내 그의 의도가 흑심 하나 없이 순수하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토록 슬픈 이야기가 또 있을까! 이렇게 맥주를 좋아하는 아가씨가 식량 사정 때문에 맥주를 마시지 못했다니!! 역시 이 세상은 잘못 돌아가고 있소!!! 망할 세상 같으니!!!”
거의 울 것 같이 눈시울을 붉히며 넬라넬라의 손을 붙잡은 자신의 손을 바들바들 떨기까지 하고 있는 리겐하르트는 분명 드워프의 시점에서 상황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실 넬라넬라의 시점에서는 맥주라는 건 마실 수 있다면 좋지만 마시지 못해도 그다지 안타까울 게 없는 술이었다.
애초에 그런 것이 안타까울 정도라면 세상에 안타까울 일이 지천에 널린 것이다.
그러나 맥주가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맥주에 진심인 드워프의 시점에서는 기아에 굶주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불쌍한 아이를 보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왕국에서 보급하는 식량 자원만을 소비하는 시점에서 드워프들 역시 그다지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나, 적어도 일주일에 두세번 정도는 맥주를 마실 수 있을 정도의 여건은 되는 것이었다.
맥주를 한 번 마시고 며칠을 살아갈 기력을 얻는다는 느낌.
맥주를 마셔본 경험이 평생에 얼마 되지 않는다는 넬라넬라의 입장은 드워프의 입장에서는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의 절망이나 다름이 없었다.
감히 생명수의 기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니… 맥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다른 술도 있으니 굳이 맥주를 고집할 이유가 없을 뿐이어서…”
“아가씨!! 이 리겐하르트에게는 솔직해져도 아무 상관 없소!!! 여인의 눈물조차 받아내지 못할 정도로 좁은 가슴을 가진 사내가 아니니!!!”
“아니 정말로…”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버린 리겐하르트는 넬라넬라의 진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며 난처해하는 넬라넬라의 모습은 눈물로 그렁그렁해진 리겐하르트의 눈엔 슬픔을 깊이 묻어두고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한 아가씨의 가여움으로만 비쳐지는 것이었다.
언제 발끈했었냐는 듯 네로멜티아는 고개를 돌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기 바빴고, 당혹감에 젖은 넬라넬라는 도움을 구하기 위해 네로멜티아를 바라봤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폐하…!”
“하아… 그래. 알겠어.”
다급히 도움을 요청하는 넬라넬라의 작은 외침에 네로멜티아는 웃느라 살짝 맺힌 눈물을 닦으며 가벼운 한숨으로 웃음기를 날려 보냈다.
그리고 담담한 모습을 꾸며낸 뒤, 조용히 리겐하르트에게 말을 건넸다.
“정말 오크들이 불쌍해. 그렇지? 그토록 좋아하는 맥주도 식량 사정 때문에 구경도 하질 못하니 말이야.”
오해를 풀어 달라는 넬라넬라의 요청에 네로멜티아는 더 큰 오해를 만들고 있었다.
지극히 의도적으로 빚어지는 오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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