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노움의 눈물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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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겐하르트 아르비미르.
그는 허리의 아래까지 수북하게 자란 수염을 끝만 땋아 정리해 두었다.
끝부분만 다섯 번 정도 땋은 것이 최소한의 정리만 해둔 듯 보일 수도 있었으나. 아무렇게나 자라고 모질이 억세기까지 한 수염을 정성껏 빗어 놓은 덕분에 수염의 형태는 그 풍성함을 멋스럽게 유지하면서도 상당히 정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머리와 수염은 모두 하얗게 세었기에 누가 봐도 지긋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버팔로와 같이 큰 눈에 서린 예기(??)와 절정기의 드워프보다도 더 우람한 근육질의 체격이 보는 이로 하여금 그의 나이를 잊게 할 정도로 기세가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착용한 하얀 드레스 셔츠와 검은 베스트는 그의 터질 듯한 근육에 팽팽히 부풀어 올라 있었으나, 그의 체격에 맞춰 제작된 의복이기에 위화감이 전혀 없었고 신사의 품격마저 느껴질 정도로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보면 볼수록 의외로 잘 어울린단 말이야…….”
“뭐가.”
“네가 입은 거. 전에는 대장간 작업복만 입고 다녔잖아.”
사실 네로멜티아는 이런 정갈한 의상을 입은 리겐하르트가 익숙하지 않았다.
천 년 전의 리겐하르트는 드베르그릭의 최고 명장으로서 해머를 놓을 수가 없었기에, 주점을 운영하더라도 의상까지 갈아입지는 않았었다.
손님이 몰리는 저녁에 주점 문을 열더라도 그 이전까지는 대장간에서 쇠를 만져야만 하는 것이었으니, 의상에까지 신경을 쓰지는 못 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꿈이 이루어진 거지. 우스운 이야기야.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 무기가 그다지 필요 없게 되고 나니까 비로소 여유가 생기더란 말이지. 대장간에 나갈 이유도 없고 시간이 남아돌게 되었으니까.”
“리겐하르트님은 대장간이 싫으신 겁니까?”
드워프 명장이 꺼내는 얘기치고는 무척이나 파격적이었다.
결국 리겐하르트는 자신의 의지로 대장간을 등진 채 주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말과 같았으니 최고의 장인으로서 그의 삶에 의문이 드는 것이었다.
넬라넬라의 질문에는 네로멜티아가 대신 답했다.
“싫다기보다는 주점이 더 좋았던 거지. 이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주점을 갖는 것이 꿈이었으니까.”
이글거리는 숯 몇 조각을 넣은 놋쇠 그릇이 테이블 위에 오르자 만찬의 준비는 비로소 끝이 났다.
놋쇠 그릇의 위로는 철망이 덮여졌는데 구멍이 큼지막한 탓에 철망의 위로 숯의 아른거리는 열기가 여과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만찬의 준비를 전부 마친 리겐하르트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으며 네로멜티아의 설명을 보충했다.
“엄밀히 따지면 내 주점은 이천 년 전부터 있었소. 왕가의 수호상 제작 이후에 국왕 전하의 허가를 받았었으니까 이천하고도 백오십 년 정도 지났겠구만.”
“그때도 난리였지. 드로겐하임 녀석이 절절매면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성화였었어. 리겐하르트가 파업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좀 해 달라면서.”
“아무래도 국왕 전하께 나라는 존재는 중요했으니까. 어흠.”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일을 때려치우고 파업에 들어가며 시위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최고의 장인을 아예 잃느니 차라리 그의 자유를 보장해 주며 의존을 줄이는 것이 드로겐하임 왕의 시점에서도 더 나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허가받은 주점이 이 ‘노움의 눈물정’이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온전히 내 가게다 싶은 생각이 들지 않더란 말이오. 온전히 노력을 쏟지 못했기 때문이었겠지. 시간 되면 반드시 대장간을 가야 하고, 급한 작업이 있으면 가게 문 닫아 놓는 날도 많고.”
넬라넬라는 리겐하르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드는 느낌이 가게에 처음 들어서며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잘 손질된 문짝과 그렇지 못한 경첩.
그 순간에 보았던 모순(??)과 상반(?反)의 사이 어딘가.
평화를 이루던 시기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자유를 멸망의 암운이 세계를 집어삼키자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었다.
“나는 사실 대장장이 명장으로 불리기보다 맥주 양조 명장이 되고 싶었소! 그리고 내가 내온 고기와 맥주에 행복해하는 손님들!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춤을 추고! 그리고 간혹 조용한 날이면 손님들의 고민 상담도 해 주고!”
흥겹게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한 리겐하르트는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강한 열망이 흠뻑 배어있었고 허공을 힘껏 휘젓는 그의 주먹은 열정이 가득한 것이었다.
잠시 뒤 흥분을 가라앉히고서 작은 오크통을 든 리겐하르트는 그 뚜껑을 열며 말했다.
“아무래도 식량 사정이 그렇게 썩 좋은 세상은 아니니 손님은 간혹가다 있을 뿐이지만, 하여튼 여유는 많아서 맥주를 연구할 시간은 넉넉한 편이지. 아가씨도 한번 맛보시겠소?”
“감사합니다. 리겐하르트님.”
리겐하르트가 따라준 맥주를 시작으로 만찬은 시작되었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진 마왕성에 존재감이 도드라지고 있는 장소가 하나 있었다.
닫힌 문과 창가에 드리워진 커튼의 틈으로 환하게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장소.
마왕성의 몇 안 되는 행복이 자리한 주민들의 성역, 식당이었다.
“하아… 또 나를 두고 가다니……. 마왕성에 합류하면 계속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성의 이전도 서두른 건데……. 정말이지 내 취급이 이렇게 형편없어도 되는 거야?”
“주인님께서 바쁘신 건 헤모니겐트의 모든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인님께서 여유로운 일상을 되찾으실 수 있도록 저희가 더 열심히 일해야겠지요.”
텅 빈 식탁에 앉아 턱을 괸 채 힘없이 엎드려 늘어져 있던 카디스텔라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녀가 가진 불만에 주방의 정리를 마치고 나온 베아트리스는 칼같이 바른 소리를 하며 카디스텔라를 은근히 나무라는 것이었다.
단 한 마디도 공감해 주지 않고 밉살스럽게 옳은 말만 골라서 하는 베아트리스에게 자존심 강한 카디스텔라가 신경에 날이 서버리는 건 피치 못할 예정된 수순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고! 너는 어떻게 한 마디를 그냥 넘기는 법이 없어!”
“모든 귀찮은 일들을 등지고 마음대로 지내셔도 전혀 문제가 없을 주인님께서 백성들을 위해 친히 방비를 철저히 하시고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시는 겁니다. 언더 바르커스에 머무르며 권속들의 시중을 받고 편히 지내셔도 될 분께서 숭고한 뜻을 펼치려 하시는 때에 은총을 받지 못한다고 하여 불만을 표하다니. 주인님의 도움이 되기 위해 잠을 줄이지는 못할망정 무척 불경한 일이 아닌지요?”
“누가 보면 놀고 있는 줄 알겠다? 나도 오늘 마도 공학 연구소에 합류해서 기술 교육 일정을 계획하고 기술 개발부에 업무를 분담 받아서 녹초란 말이야!!”
발끈해서 식탁을 내리치려다 이내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가까스로 인내에 성공한 카디스텔라.
오리진 뱀파이어가 휘두른 주먹에 평범한 목재 식탁이 견뎌낼 턱이 없으니, 귀중한 물자를 괜히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노기를 어떻게든 억누른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테라리스 망자들의 지배자이자 크림슨 캐슬의 위대한 군주인 자신이 고작 목재 식탁이 아까워서 화를 참아야 하는 현실이 퍽 우습게 느껴졌고, 카디스텔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뒤로 확 젖혀버렸다.
달각
“수고 많으셨습니다. 카디스텔라님께서 계시기에 주인님의 계획은 더욱 견고해질 겁니다.”
이전의 냉랭한 모습과 달리 다소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내어온 베아트리스.
카디스텔라의 앞에 증기가 은은히 피어오르는 따뜻한 밀크티 한 잔이 놓여졌다.
아른거리는 증기를 타고 밀크티의 포근한 향기가 조용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피로한 심신을 어루만지며 달래주는 안락한 손길이 코끝부터 기분 좋은 온기를 전한다.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던 카디스텔라는 피식 웃으며 베아트리스에게 한마디 했다.
“너는 주변 신경쓰지 않고 언행에 거침없는 거 같으면서도 은근히 속내는 감춘단 말이야. 조금은 솔직해져도 좋을 텐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밀크티는 무척이나 따뜻했다.
티포트에서 끓이자마자 내어온 것이 아니었고, 적당히 마시기 좋으며 풍미 또한 가장 잘 살아날 수 있는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베아트리스의 섬세한 손길과 정성이 느껴져 카디스텔라는 마음까지 포근하게 녹아드는 느낌을 받았다.
자주 부딪치고 티격태격하는 사이이지만, 결국 진심으로는 서로를 무척 아끼는 사이.
마왕군의 간부라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이었다.
마왕 네로멜티아와 함께 하기 위하여 그녀의 권속으로 모여들었으나, 서로에게도 각별한 애정이 있는 소중한 관계.
카디스텔라는 크림슨 캐슬에서 갇힌 채 보냈었던 천 년의 시간 동안, 이 따스한 관계가 사무치게 그리웠었다.
끼이익
“흐에에에에… 안녕하세요오오…….”
“어머. 러스테리아님?”
“너 지금까지 일 한 거야?”
투박한 솜씨로 제작된 경첩이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야심한 시각에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이끌고 나타난 손님.
기진맥진한 녹초가 되어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나타난 이는 하루 종일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러스테리아였다.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러스테리아는 그 누구도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토록 늦은 밤이 되고 나서야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식당 업무가 마감된 건 알지만… 뭔가 남은 거라도 먹을 게 있을까요오…”
“러스테리아님께서 드실 식사가 없다는 건 말도 안 될 일입니다. 금방 준비해 드릴 테니, 편히 쉬고 계시지요.”
그렇게 베아트리스는 다급히 주방으로 들어갔고, 머지 않아 새 장작에 불이 지펴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마 위에서 식재료가 썰리는 식칼 소리는 간격이 무척이나 짧고 명확했으니, 베아트리스가 얼마나 급히 요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러스테리아는 터덜터덜 걸어와 카디스텔라의 맞은편에 앉았고, 의자의 등받이에 고개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자신의 몸을 격렬히 기대는 것이었다.
거의 눕다시피 기댄 러스테리아의 신체에 의자가 뒤로 넘어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일 정도였다.
카디스텔라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러스테리아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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