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 지하의 도시, 맥켄지 광산. (4)
* * *
별다른 수확 없이 골든 팰러스를 나서게 된 네로멜티아 일행.
멜키스는 고개를 떨군 채, 네로멜티아의 뒤를 따르며 마르티노의 입장을 두둔하고 있었다.
마왕의 앞을 완강하게 막아서던 그와 으르렁거리며 맞서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면모였고, 실은 그 역시 마르티노의 입장을 어느 정도 헤아리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마르티노 녀석은 드로겐하임 전하에 대한 충정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선왕께서는 이미 승하(??)하셨는데도 말입니다…….”
“드로겐하임 말인가…….”
드로겐하임 스토니 하이젠버그(Drogenheim stony Heisenbug).
드베르그릭의 선대 왕이자, 현왕(?王)의 아버지.
사실 네로멜티아는 골든 팰러스로 향할 때, 드로겐하임 왕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어질고 자애로운 성군이었던 그는 네로멜티아와도 각별한 사이였었다.
서로의 직책을 내려놓은 채 맥주를 들이키며 밤을 새운 적도 많았다.
그처럼 마음이 통하는 벗은 흔치 않았다.
군주로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서로 공감할 수 있었던 사이.
그리고 멜키스에게서 그의 죽음에 대해 들었을 때, 네로멜티아는 먹먹해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써야만 했다.
울적한 기분을 끝내 삼키고서 그의 아들이었던 현왕을 만나러 가고 나서는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왕명을 무조건 따르는 것만이 충정이 아닐진대, 평소에는 현명하면서도 국왕과 얽힌 일에 대해서는 고지식하게 변하곤 합니다. 선왕께서 베푸신 은혜를 떠올려 보면 그리 의아할 일도 아니긴 합니다만…….”
마르티노 시종장은 드워프치고 무척이나 빈약한 수염을 달고 있었고, 그것에 더해 빈약한 체격까지 가지고 있던 탓에 곧잘 놀림을 받는 처지였다.
놀림에서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으나, 어딜 가도 무시당하는 처지니 그의 능력과 관계 없이 그가 설 곳 자체가 없던 상황이었다.
누군가의 아래에서 일을 하려 해도 받아주는 이가 없었고, 스스로 사업을 하려 해도 찾아주는 이가 없으니 말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드로겐하임 왕은 그의 철저한 업무 능력을 높이 샀고 그를 시종장의 위치에까지 등용하고 가까이 두었으니, 드로겐하임 왕에 대한 그의 충정은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시뻘건 용광로에서 목욕을 하라면 할 것이고 쇳물조차 기꺼이 마실 것이었다.
그런 맹목적인 충성이 왕의 승하로 인해 왕위가 계승되어 그릇된 심성을 지닌 차기 왕을 만나게 되자 현재의 문제가 벌어진 것이었다.
드로겐하임 왕은 생전 아들에 대한 걱정이 유독 심했었다.
아들이라면 껌뻑 죽는 팔불출도 아니었고, 아들이 병약한 것도 아니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욕심이 많고 제멋대로인 아들이 차기 왕으로서 제 몫을 못 할까 걱정이 되었었던 것이다.
과거 드로겐하임 왕이 짊어지고 있었던 걱정을 떠올린 네로멜티아는 현재 드베르그릭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어느 정도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멜키스. 나는 마르티노에게 별다른 감정 없어. 그 녀석은 시종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끄응… 마왕님의 은혜에 마르티노 그 멍청한 녀석 대신 제가 감사를 올리겠습니다.”
“그보다 나는 일행하고 둘이서 도시를 조금 구경하고 싶은데… 우리 저녁 때 만날까?”
멜키스는 백 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마르티노에게 적잖이 정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 성격이 맞질 않아 티격태격 옥신각신 싸울지언정 수천 년의 긴 세월을 알고 지낸 이들끼리의 정은 좀처럼 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멜키스는 그 사이 나쁜 친구가 혹여 마왕의 진노를 사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스러워 노심초사 하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마왕이 직접 마르티노에 대해 언급하며 괜찮다고 딱 잘라 말해주니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다.
이후 네로멜티아는 나중에 만나자는 이야기를 좋게 에둘러 말했고, 멜키스 또한 눈치가 없는 이는 아니었기에 네로멜티아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멜키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재회의 축하 역시 네로멜티아의 말대로 저녁으로 미뤄야겠다 생각중이었는데, 멜키스는 문득 네로멜티아의 동행에 대해 자신이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았음을 인지해 손바닥을 이마에 짚었다.
“아차차… 귀한 손님께서 한 분 더 계셨는데… 마왕님과의 재회에 너무 들떠서 제대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습니다! 넬… 라넬라… 라고 하셨던가요?”
“아, 네! 오크군 공병대장, 넬라넬라입니다.”
“끌끌끌! 드워프 못지 않게 발달한 이두근하며 날카롭게 깎은 복근까지! 힘깨나 쓰는 군인이실 줄은 진작 알았습니다! 그런데 잘 단련된 군인치고는 무척이나 아름다우십니다? 마치 수호와 전쟁의 여신 니이테(Niithe)님을 뵙는 것 같아서 이 늙은이의 눈이 분에 겨운 호강을 합니다!”
“… 과찬이십니다…….”
매끄럽게 잘 굴러가는 혀를 놀리며 넬라넬라와 인사를 나누는 멜키스.
그가 건네는 칭찬이 부끄러웠던 넬라넬라는 점차 상기되는 안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외모에 대한 칭찬은 평소 네로멜티아에게 자주 듣던 터라 조금은 익숙해졌다 할 수 있었지만, 전혀 모르는 타인이 여신의 이름까지 언급해가며 건네는 칭찬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매끄럽게 받아넘기기에 무리인 것이었다.
“아! 혹시… 마왕님의 이거?”
“아으…!!”
순간 멜키스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치더니 가늘어진 눈매를 하고서 은근한 눈빛을 보이며 접혀진 약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결혼반지를 끼기도 하는 약지는 애정의 상징이었고, 다른 손가락은 펼친 채로 약지만을 접어 손바닥 안에 붙이는 제스처는 소유하고 있는 애정을 의미했다.
혼약자에 대한 상징이기도 했으나 대체적으로는 애인을 뜻하는 제스처로 쓰이는 것이었다.
드워프 노인이 능글맞게 웃으며 취한 그 제스처는 무척이나 적나라했기에 넬라넬라는 발갛게 상기된 채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야! 그거 좀 상스럽지 않냐!?”
“끌끌끌끌! 맞구만! 맞어!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이십니다! 껄껄껄껄!!”
어떤 문화권이든 손가락으로 취하는 제스처는 대체적으로 저속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고, 멜키스가 보인 제스처 역시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었기에 웬만해서는 여유를 잃지 않는 네로멜티아마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멜키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호탕하게 웃기 바빴고, 마왕의 눈치를 볼 것 같았으면 애초에 꺼내지도 않았을 이야기였기에 멜키스는 이야기를 더욱 진행시키는 것이었다.
“부활한 지 몇 개월밖에 안 되신 분이 벌써부터 저렇게나 예쁜 처자를 끼고 다니시고,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끌끌끌!”
“으우우…”
“어디서 이런 참한 처자를 데려오셨나 그래?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잘 빠지고 튼실하고! 피부는 아주 보들보들하시구만!”
늪지의 미끄덩한 블랙 일(Black Eel)이 바위틈을 파고들듯, 네로멜티아가 눈치를 주어도 멜키스는 마왕의 눈빛을 매끄럽게 흘려내고서 자기 할 말을 계속 떠드는 것이었다.
넬라넬라는 낯이 뜨거워 견디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돌려버리는 모습마저 보였다.
“농은 이쯤 하기로 하고. 저는 이만 물러가 볼 터이니, 저녁에 노움의 눈물정에서 뵙도록 하지요.”
“안 그래도 리겐하르트를 만나 볼 예정이었는데 잘 됐네.”
“그 영감쟁이한테도 잘 말해 놓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지요!”
멜키스는 농을 마친다고 하긴 했지만, 끝까지 능글맞은 미소를 유지한 채 실실 웃으며 사라졌다.
늙은 드워프의 짓궂은 소란이 지나간 뒤, 넬라넬라는 비로소 안정을 맞이할 수 있었다.
부끄러움에 몸을 돌리고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던 넬라넬라.
네로멜티아는 넬라넬라의 갸름한 턱에 손가락을 갖다대고 그녀의 고개를 들어올려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했다.
“이제 알겠지? 넬라는 누가 봐도 예뻐. 자랑스러워 해도 된다구?”
“폐… 폐하…….”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넬라넬라의 입술은 몇 번 소리없이 달싹였으나 이내 다물어졌다.
복잡한 심경과 뜨겁게 고양된 감정을 애써 다스리며 말을 몇 번이고 삼켜낸 넬라넬라는 그저 네로멜티아가 이끄는 대로 시선을 맞춰올 뿐이었다.
자신조차 뚜렷하게 알지 못할 정도로 뒤죽박죽인 심정을 감히 마왕에게 고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넬라넬라는 자신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없는 셈 치는 것이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있고 네로멜티아 역시 넬라넬라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이 당장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기에 그대로 행동했다.
츕!
예고도 없이 넬라넬라의 입술과 맞닿은 네로멜티아의 입술.
연인의 보드라운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하자, 넬라넬라는 심장이 터질 듯 고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침대 위에서 보이던 농밀한 키스와는 다르게 혀를 얽어오지 않는 가벼운 입맞춤.
그저 겉으로만 애정을 표하는 미약한 키스였으나, 그것만으로도 넬라넬라에게는 상당히 큰 자극이었다.
네로멜티아의 입술은 넬라넬라의 입술 표면을 살포시 덮어 빨아대고, 가끔은 그 보드라운 입술만으로 넬라넬라의 입술을 살짝 물어 당겨댔다.
잠시의 시간이 흘러 뜨거운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서로의 입술이 작별을 고했다.
“하아… 하아…”
단지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을 뿐임에도, 넬라넬라의 호흡은 다소 거칠어져 있었다.
부끄러움을 감추고 싶어 고개를 떨구기까지 했던 넬라넬라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는 깊은 정욕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끝나버린 입맞춤이 무척 아쉬웠던지, 넬라넬라는 아련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견디기 힘들 정도였던 네로멜티아는 가벼운 웃음을 보였다.
“자신을 가져도 돼. 넬라는 정말 예쁘니까. 괜한 걱정은 하지 말고.”
“… 네…….”
“그럼 거리를 좀 구경해 볼까? 언뜻 봤는데 달라진 게 많은 모양이야. 나도 조금 설레는 걸?”
싱긋 웃은 네로멜티아는 넬라넬라의 손을 잡고서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넬라넬라를 품에 안은 네로멜티아의 모습은 넬라넬라가 이십 멘톨가량 더 장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녀린 여성을 에스코트하는 기사처럼 그 자태가 늠름했고, 아이를 보듬어주는 어머니처럼 그 모습이 자애로웠다.
네로멜티아가 선사하는 따스한 포용은 넬라넬라의 마음을 더욱 거칠게 고동하도록 부추기면서도 동시에 그녀의 혼란한 마음을 살살 녹여 안정을 찾게 해주는 것이었다.
츕!
“하읏…!!”
순간 넬라넬라의 목에 짜릿한 느낌의 자극이 전해졌다.
무척이나 익숙한 느낌의 보드라운 감촉.
네로멜티아는 자신의 품에 안긴 넬라넬라를 조금 떼어놓는가 싶더니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춘 것이었다.
여성의 은근한 성감대를 불시에 자극당한 넬라넬라는 짧고도 강렬한 신음을 흘려냈다.
“후후. 내 거라는 증거는 새기고 가야지. 그래야 다른 놈들이 딴 맘을 품지 못하지 않겠어?”
넬라넬라의 목에는 선명한 키스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자신의 목을 내려다 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눈에 담을 수는 없었으나, 넬라넬라는 자신이 느낀 자극의 정도를 통해 네로멜티아가 얼마나 선명한 흔적을 남긴 것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이어서 네로멜티아는 넬라넬라의 허리에 팔을 둘러왔다.
누가 봐도 자신의 연인이라 과시하는 듯한 행동이었고, 평범한 이들도 웬만해서는 낯이 뜨거워 거리에서는 보이지 못할 스킨십이었다.
그러나 넬라넬라는 의외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저 다른 의미로 뺨을 상기시키고 있을 뿐, 적어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넬라넬라가 보이고 있는 심경의 변화는 그녀의 평소 모습과 확연히 다른 것이었고, 과감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급진적이었다.
이는 맥켄지 광산에 들어서면서부터 보인 넬라넬라의 소망과도 관련이 깊은 것이었다.
조금 전의 입맞춤으로부터 넬라넬라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 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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