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지하의 도시, 맥켄지 광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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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의 볼록 렌즈 두 알이 박힌 보안경을 착용한 드워프 노인.
아무렇게나 삐죽삐죽 자란 수염은 기름때가 듬성듬성 묻어 있었고, 얼마나 오랫동안 기른 것인지 덥수룩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 길이가 무릎에 닿을 정도였다.
수염을 묶거나 땋지 않으면 일상 생활이 힘들 지경인 드워프의 특성상 그 역시 수염을 정리한 모습을 하곤 있었으나, 그저 공장의 바닥에 대충 굴러다닐 것 같은 금속 조임쇠 하나로 중간을 묶은 뒤 시커먼 고무 앞치마의 주머니에 수염을 대충 쑤셔넣은 엉망진창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고무 앞치마와 가죽 장갑, 거기다 고무 부츠까지 모두 시커먼 색이어서 자세히 눈여겨 보질 않으면 눈치채기 힘들 수도 있으나 이 모든 장비에 시커먼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조금 전까지 기계를 만지다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외모라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노인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는 드워프의 왕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없었다.
이는 그가 마도 공학 기술의 이름 높은 장인이기 때문이었고, 수천 년을 살아온 나이 지긋한 연장자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멜키스 드루모어(Melkis Drumore).
드워프 왕국 ‘드베르그릭(Dvergrik)’의 마도 공학 기술 최고의 권위자였다.
“감히 이분이 누구이신 줄 알고!! 당장 무기를 거두지 못하겠느냐!!!”
“하, 하지만…!”
“시끄럽다!! 이노오오옴!!!”
눈시울을 붉힐 정도로 감격하여 네로멜티아의 손을 잡았던 멜키스는 고개를 냅다 돌리고서 드워프 병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장인 멜키스는 드워프 일족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드높은 권위를 지닌 존재였기에 드워프 병사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무기를 내려놓아야만 했다.
자신들의 입장을 호소해 보려고 시도는 해 봤지만 멜키스가 재차 일갈하자 입을 다물어야만 했고, 포위진을 구축했던 드워프 병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뜨거운 의자에 앉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마왕님께서는 언제 부활하신 겁니까!”
“아아. 몇 개월 정도 됐지.”
“섭섭합니다! 부활하시고 바로 찾아와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멜키스는 진심으로 섭섭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마왕성이 폐허가 되어 버린 상황이기에 네로멜티아가 곤란을 겪고 있을 거라 생각했고, 자신이라면 전력을 다해 네로멜티아를 도울 준비가 되어있었기에 더욱 섭섭했다.
마왕이 부활하는 날이 오면 가장 먼저 달려가 그녀를 도울 준비를 하고 있었던 멜키스.
그는 무려 천 년의 세월을 기다리기만 했었고, 아무리 수천 년을 살아가는 드워프라 할지라도 천 년의 세월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네로멜티아가 부활하고서도 수개월이나 지나서야 뒤늦게 찾아왔다고 생각하니 자신이라는 존재가 뒷전으로 밀린 것같은 기분이 들어 실망스러웠던 것이었다.
“미안해. 헤모니겐트의 생존자들과 다른 종족들을 모아서 보호하느라 조금 시간이 필요했어.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어? 우리 헤모니겐트의 대단한 마도 공학 설비들은 모두 장인 멜키스에게서 나왔었잖아.”
멜키스의 감정을 읽은 네로멜티아는 즉시 사과하며 멜키스를 가볍게 달래주었다.
네로멜티아의 따뜻한 말 몇 마디에 멜키스는 금방 기분이 풀어졌다.
멜키스에게 좋은 말을 건네어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다른 종족들이 생존하고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들려주었기 때문에 더욱 환희를 느끼는 것이었다.
“새, 생존자!? 다른 종족!! 오오오오!! 이 테라리스에 아직도 희망은 존재했었군요!! 정말이지 이 노인네를 기어코 울게 만드시는군요…!! 끄흐흑…!!”
“후후. 데모니안, 고블린, 오크, 오우거, 언데드. 지금까지는 이렇게 모여 있어. 천 년 전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나름대로 떠들썩하다구.”
“오오오!! 드디어…!! 드디어!! 크흐으윽…!! 뭣들 하느냐!! 당장 이분을 국왕에게 안내해 드리지 않고 뭘 하는 게야!!!”
네로멜티아와 넬라넬라를 체포하러 왔다가 도리어 그녀들을 안내하게 된 드워프 병사들은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머리를 비우기로 했다.
멜키스라는 권위적인 존재가 불같은 역정을 낼 정도로 떠받드는 존재라면 필시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한참 넘은 존재이기에, 모든 것은 왕성에 떠맡기고 자신들은 불똥이 튀지 않게 침묵을 지킬 셈이었던 것이다.
멜키스가 마왕이라 부르고 있긴 했으나, 드워프 병사들은 마왕이라면 좀 더 무시무시하고 권위적인 존재일 거라 생각했기에 멜키스와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고 있을 뿐인 네로멜티아가 마왕일 리 없다고 의심 중이었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여성이었기에 분명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건 예상할 수 있었으나 그뿐이었고, 강대한 군세를 앞세운 웅장한 행진도 없이 여성 한 명만 달랑 끼고서 조용히 행차한 마왕이라는 건 어떻게 머리를 굴려도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기에 멜키스의 주장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이나 생각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오로지 멜키스의 진노를 사지 않기 위해서 그의 명령에 따를 뿐인 상황이었을 뿐이었다.
드베르그릭의 웅장한 왕궁, 골든 팰러스(Golden Palace).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로를 타고 한참을 직진하자, 그 웅장한 황금빛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휘황찬란한 황금의 궁전은 하나의 거대한 보물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 궁전이 발하는 눈부신 금빛의 광채는 테라리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드베르그릭만의 장관이었다.
궁전의 모든 것이 순수한 황금으로 도금되어 있는 것도 경이로울 지경이건만, 궁전의 중심에 존재하는 드높은 첨탑 지붕에는 멀리서도 그 찬란한 빛을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다이아몬드 하나가 장식되어 있었다.
본래 그 첨탑은 거대한 종을 울리기 위해 세워진 탓에 첨탑의 최상층에는 커다란 황금종이 매달려 있었으나, 그보다도 위에 자리한 다이아몬드가 무척이나 크고 찬란한 탓에 황금종의 존재가 가려질 지경이었다.
“사치가 도를 넘었네…….”
네로멜티아의 감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본래 천 년 전의 골든 팰러스는 이렇지 않았었다.
황금을 좋아하는 드워프들이기에 궁전의 이름을 최대한 위엄있게 지으려고 황금 궁전이라는 이름을 택했으나, 이름에만 황금이 들어갈 뿐 궁전 자체는 대리석으로 지었던 것이었다.
그나마 궁전의 외벽에 녹인 황금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정도는 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고, 이름에 들어가는 황금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상징일 뿐이었다.
본래 골든 팰러스는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들을 이용하여 만든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으로, 그 가치에 드워프 장인들의 혼이 녹아 있었던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황금만이 보이는 황금의 덩어리일 뿐이었다.
“넬라는 즐겁게 구경해도 돼! 황금으로 뒤덮인 궁전이라니 대단한 건 대단한 거니까!”
혼잣말을 하듯이 흘린 네로멜티아의 한마디에 넬라넬라는 신기해하던 자신의 표정을 급히 숨겼고, 아차 싶었던 네로멜티아는 뒤늦게 넬라넬라를 안심시켜 주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은 이 황금으로 뒤덮인 궁전에 대해 좋지 않은 감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의 개인적인 감상으로 인해 넬라넬라가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로멜티아가 이 궁전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넬라넬라는 거짓으로라도 감상하는 기색을 보일 수 없게 되었다.
네로멜티아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넬라넬라가 자신을 신경쓰지 않도록 가벼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한 번 식어버린 넬라넬라의 분위기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아니, 글쎄! 전하께서는 바쁘다고 하지 않나!!”
“바쁘기는 개뿔이 바빠! 지금 그놈이 세금 세고 있을 시간이라는 거 내 모를 줄 알아!?”
“자네 말이 심하구만! 세금을 세는 일도 엄연히 국정인데 왕명을 어기면서까지 방해를 하면 쓰겠나!!”
“마왕님께서 행차하셨다고!! 이 염소수염아!!! 마왕님을 만나 회담을 갖는 일보다 금화나 세고 앉아 있는 게 중할 리가 있겠냐!! 그 세금 세는 일도 보나 마나 자기 책상 위에 금화로 탑을 쌓으면서 히죽대는 멍청한 놀이일 게 뻔한데!! 어디서 국정을 들먹여!!! 세무관이 계산 다 끝내서 올려보낸 세금 가지고 탑 쌓으면서 노는 게 국정이냐!!!”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걸세!! 국왕 전하께서 단단히 명하셨단 말이네!!”
왕의 집무실까지 쳐들어갈 셈이었던 멜키스는 시종장의 완강한 만류에 발이 묶여 버렸다.
드워프 치고 무척이나 빈약한 체격과 짧고 가느다란 수염을 지닌 시종장.
그 모습에 염소수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던 시종장은 그의 빈약한 모습과 다르게 무척이나 완고하였다.
사실 수염이 긍지이자 자존심이었던 드워프들에게는 ‘해머 자루보다 수염이 짧으면 어른이 아니다.’ 라는 격언마저 존재했다.
그런 드워프들에게 있어서 염소 수염이라는 별명은 그저 특징을 나타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은근히 비하하는 의도가 섞인 멸칭이었던 것이다.
풍성하고 덥수룩한 수염이 곧 미덕이자 품격이었던 드워프들에게 짧고 가느다란 수염은 말 그대로 웃음거리였다.
그러나 시종장은 자신이 그런 멸칭으로 불리는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오로지 멜키스를 막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는 시종장이 국왕을 보필하는 데 있어 얼마나 필사적인지를 알게 했기에, 네로멜티아는 그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한번 지고 넘어가 줄 수밖에 없었다.
“그만하지. 멜키스. 도시 구경이나 시켜주지 않을래?”
“하, 하지만… 무려 마왕님께서 행차하셨는데 일개 드워프의 왕이 고개도 내밀지 않아서야… 마왕님께 크나큰 결례가 됩니다!!”
“마르티노가 저렇게 필사적이잖아. 나는 충성스러운 신하를 좋아해. 여기서는 마르티노의 뜻을 따라주고 싶어.”
시종장의 이름은 마르티노 몬소(Martino Monso).
사천오백 세의 멜키스와 맞먹는 나이인 사천사백 세의 지긋한 노인 시종장.
네로멜티아는 당연히 마르티노와도 구면인 사이였다.
그렇기에 마르티노의 심정을 잘 헤아릴 수 있었던 네로멜티아는 그를 보아서라도 한발 물러나 주는 배려를 보였고, 멜키스는 당연한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는 현실에 답답하여 애가 타는 것이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네로멜티아가 마르티노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마르티노 역시 네로멜티아와는 과거에 자주 마주쳤었던 사이였기에 그녀가 마왕이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왕의 앞을 감히 막아서야만 했던 마르티노의 심정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필사의 의지였던 셈이었다.
마르티노는 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네로멜티아가 힘으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다면 그의 목숨은 말 그대로 길가의 개미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무례를 저지르고 있는 자신을 배려하여 자존심을 기꺼이 굽히고 물러나겠다 선언한 것이었다.
마르티노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지극한 모습을 하고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마왕 폐하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깊이 조아리고 있었기에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적어도 그의 목소리가 조금 젖어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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