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진심을 전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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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던 여성 모임.
하룻밤이라는 한정된 시간은 어느덧 새벽에 접어들었고, 모든 것이 그렇듯 그 화기애애한 시간도 끝이 났다.
케르디하크와의 전투에서 마왕성과 백성 모두를 지키기 위해 마력을 쏟았던 러스테리아는 아무래도 피곤했던 모양인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잠에 취해 몽롱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네로멜티아와 함께 잘 거라며 몇 번 칭얼거리더니 이내 수마를 못 이겨 헤스티니아가 이끄는 대로 자신의 거처에 돌아갔다.
마력의 양만큼은 방대했던 러스테리아였으나 전투시에 받았던 심리적 압박도 무시하지 못 할 것이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눈동자에 새겨진 육망성의 권능은 뇌전의 움직임을 보고 반응할 수 있을 정도의 초월적인 능력을 부여하지만 그만큼 부작용이 큰 것이어서 러스테리아의 신체가 많은 부담을 받은 탓이기도 했다.
헤스티니아는 러스테리아를 잘 달래며 식당을 나서면서도 끝까지 카디스텔라를 놀려먹었다.
그 짓궂은 언행에 카디스텔라가 끝까지 발끈하기는 했으나 헤스티니아는 그저 장난을 칠 셈이었을 뿐 전혀 진심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밤의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라 빈번하게 놀려댄 것 치고는 순순히 자리를 뜬 편이었고, 러스테리아를 데리고 나서는 헤스티니아의 미소가 사뭇 애정이 묻어나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말로만 난입을 얘기했을 뿐 진심으로는 러스테리아를 끝까지 챙기려 했던 듯했다.
넬라넬라는 전쟁 후의 후속 처리를 아침 일찍부터 진행하려면 지금 자둬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스토니 포트리스에 돌아갔다.
조금 아쉽다는 분위기였던 카디스텔라가 네로멜티아의 거처에서 자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했으나, 은근히 입술을 핥으며 끈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카디스텔라의 모습에 넬라넬라는 어떻게든 완곡한 거절 의사를 밝히며 식당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카디스텔라의 권유를 승낙했다간 한숨도 잠들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간부들같이 인지를 벗어난 초월적인 존재라면 모를까, 넬라넬라는 그저 오크치고는 상당히 강하다는 정도로 평가될 수 있는 평범한 존재였기에 수면이라는 것은 필수였다.
그렇게 식당에 남겨진 인물은 세 명.
네로멜티아와 베아트리스 그리고 카디스텔라.
“주인님, 이런 일은 하찮은 이가 하게 두시고 편히 계셔야 합니다.”
“여기 하찮은 이가 어디 있는데?”
여성 모임에서 내어진 디저트들의 접시와 차와 와인을 담았던 잔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베아트리스.
이는 메이드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으나, 네로멜티아는 손수 나서서 베아트리스를 돕기 시작했다.
주인이 직접 나서서 자신을 돕기 시작하자 베아트리스는 주인을 극구 말리며 오롯이 자신의 업무로 남겨두려 했으나, 네로멜티아는 그저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달콤한 말을 건넬 뿐 끝까지 베아트리스를 도와주었다.
네로멜티아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러 여성들의 눈치를 보며 다소 조심스러웠던 모습을 보였었으나, 이는 그녀들이 여러모로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었기에 온화한 분위기를 만들려 했을 뿐이었으니 현재의 모습이야말로 평소의 네로멜티아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 메이드님 옷이 찢어졌잖아? 안타까운 걸…….”
“체내에서 급히 무기를 꺼내려다 보니 리본을 풀 시간이 없었습니다. 주인님께서 주신 소중한 의상인데 이 미흡한 메이드가 망가뜨려 버렸으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베아트리스의 하녀복이 찢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네로멜티아는 무척 아깝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베아트리스의 하녀복은 오른쪽 손목 부분이 찢어져 있었고, 어깨의 뒤편과 팔꿈치에 해당하는 부분은 아예 뜯겨져 나간 것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이는 베아트리스가 수선을 마친 덕에 얼핏 봐서는 티가 잘 나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원단 자체가 일정 면적 사라진 것이기에 흔적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네로멜티아는 하녀복의 이상을 눈치챘고, 베아트리스는 조용히 사정을 설명하며 용서를 구할뿐이었다.
주인이 하사한 소중한 물건을 상하게 했으니 면목이 없는 불충이라고 여긴 까닭에 베아트리스는 고개를 깊이 숙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고개를 깊게 숙인 베아트리스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 말 하지마. 옷은 아무 것도 아닌 걸? 그저 베아트리스에게 잘 어울리는 의상이었는데 망가져 버렸으니 조금 아까웠을 뿐이야. 옷을 지키려다가 베아트리스가 다쳤다면 나는 무척 슬펐을 거야. 잘 싸워줬어. 고마워.”
“주인님…….”
어느새 서로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하고 있는 주인과 하녀.
선홍빛과 푸른빛이라는 상반된 색상이 마주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아름답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두 여성의 눈은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고, 두 여성의 눈빛은 서로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흠뻑 빠져들어 몽환적인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내버려 둘 거야? 둘이서만 좋은 분위기 만들고 기분 상하네.”
순간 네로멜티아와 베아트리스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식기들이 공중에 떠올라 주방으로 사라졌다.
홀로 자리에 앉아 마냥 기다리고만 있던 카디스텔라가 인내심이 바닥난 까닭에 레비테이션을 사용하여 일순간에 정리를 마쳐 버린 것이었다.
한창 좋았던 분위기를 깨고 들어온 카디스텔라의 퉁명스러운 말에 네로멜티아와 베아트리스는 서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네로멜티아는 미안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카디스텔라를 바라보았고, 베아트리스는 혀를 차는 노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으며 좋지 않은 기분을 여실히 드러냈다.
“네로멜티아. 나는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너를 기다리고도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어.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밤의 일족이라고 해서 그 시간이 짧았는줄 알아? 그런 나를 계속 내버려 둘 거야?”
언제나 절대자의 여유라는 휘장을 두르고서 타인을 대했던 카디스텔라.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착 가라앉은 음성을 들려주고 있었다.
테라리스의 모든 망자들 위에 군림하는 블러드 엠프레스.
죽음을 딛고 일어선 신화의 존재 퍼스트 블러드.
피의 계보를 세우고 밤을 지배한 오리진 뱀파이어.
그녀를 장식하는 찬란한 이명들을 모두 벗어 던지고, 카디스텔라 문 나이트라는 여성을 진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까지 기다렸는데도 저 깡통 메이드나 붙잡고! 내 앞에서! 천 년이나 기다린 나를! 더 기다리라고 말할 셈이야!?”
카디스텔라의 음성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수천 년을 선혈의 여제로 군림한 절대자로서는 결코 보이고 싶지 않았을 여린 마음을 힘껏 드러내고 있었다.
깡통이라 불린 베아트리스조차 불편한 기색을 보이긴커녕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토록 카디스텔라의 외침은 애절한 것이었고, 절실한 마음을 담고 있었다.
애타는 감정을 담아 전력으로 부딪쳐 오는 카디스텔라에게 애잔한 미소를 지은 네로멜티아가 조용히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미안해. 네가 솔직해진 순간을 보고 싶어서 그랬어.”
“너 가끔 보면 정말 악취미야. 알아?”
“후후. 이런 네 모습이 귀여우니까.”
카디스텔라가 지금껏 살아온 사천오백 년이라는 세월은 지나간 공허의 천 년을 제외하면 오롯이 네로멜티아와 함께 누려온 시간이었다.
그만큼 네로멜티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 카디스텔라였기에 네로멜티아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장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 알고 있었음에도 섭섭한 감정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밀려왔고, 결국 참지 못한 카디스텔라가 네로멜티아의 의도대로 자신의 드높은 자존심을 내쳐버린 것이었다.
“키스해 줘.”
“지금?”
“아까 넬라넬라한테도 해 줬잖아! 나한테도 해 줘!!”
테라리스의 모든 망자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경의를 다하며 머리를 조아렸던 선혈의 여제.
지금은 루이나의 여신 앞에서 어린아이같이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모든 장막을 들추고 진실한 자신을 드러내는 카디스텔라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굴었었으나 네로멜티아의 입술을 차지한 넬라넬라에게 사실은 질투를 느꼈었다는 사실마저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촉촉하게 젖어가는 카디스텔라의 진홍빛 눈동자.
아른거리는 눈망울을 하고서 애정의 증표를 요구하고 있었다.
네로멜티아는 잔뜩 투정을 부리며 울먹이는 그녀에게 조용히 입을 맞춰 주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포개어지며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감촉이 둘의 마음에 불을 당겼다.
혀가 서로 얽히며 타액이 뒤섞일 때, 서로의 애틋한 감정 역시 함께 뒤섞었다.
서로의 날카로운 송곳니조차 사랑스러워 그것을 혀로 어루만지며 혀를 긁는 예리한 감각을 만끽했다.
카디스텔라는 자신의 낮은 체온에 온기를 전하는 네로멜티아의 따스한 체온이 좋았다.
네로멜티아는 서늘함이 느껴지는 카디스텔라의 익숙한 체온이 무척이나 그리웠기에 좋았다.
조용하면서도 격정적이었던 키스가 끝난 뒤, 두 입술은 애정의 더 큰 증명을 위해 잠시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떨어졌다.
“카디스. 너는 천 년이 지났어도 변함이 없네. 영원불멸의 흡혈귀라서 그런 걸까.”
네로멜티아는 카디스텔라가 사랑스럽다는 듯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소한 일상적 감상을 이야기하는 듯 어조는 잔잔했으나, 그 안에 뒤섞인 온갖 감정들의 결정은 말 그대로 격정이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모습. 그러면서도 쉽게 상처받기도 하는 여린 모습. 짓궂게 남을 놀리면서도 쉽게 질투하는 모습. 어느 것 하나 변한 게 없어.”
카디스텔라의 적발이 섞인 은발을 네로멜티아가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어두운 밤의 장막에 찬란한 별빛들이 반짝이듯 은빛의 찰랑대며 물결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서 간간이 빛나는 진홍빛의 반짝임조차 보석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었다.
네로멜티아는 자신이 보았던 카디스텔라의 모습들을 속삭였다.
처음 만난 순간에도 이별을 고했던 천 년 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쇠퇴하지 않는 아름다움.
퇴색하지 않는 사랑스러움.
“너를 사랑하는 마음도 변하지 않았어. 모르겠어?”
언제 울먹였냐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이며 네로멜티아에게 도발적인 눈빛을 보내던 카디스텔라.
그녀의 음성은 여전히 촉촉한 느낌이 있었으나, 그녀가 보이는 기세만큼은 언데드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리웠어, 카디스.”
네로멜티아는 선혈의 여제가 보이는 연약한 허세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포근한 품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가슴에 고개를 묻었던 카디스텔라는 조금 더 젖어든 음성으로 가련하게 진심을 말했다.
“응… 나도 그랬어…….”
귀엽게 꾸며진 한 여성의 침대.
붉은빛의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이루어진 솜이불의 포근함을 느끼며 거처의 주인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침대와 탁자 그리고 옷장이 가구의 전부였음에도 그것들이 배치되며 꽤 협소해졌을만큼 거처는 작고 아담했다.
그러나 탁자 위에는 선홍빛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인형이 앉아 있었고, 옷장 위에는 보기만 해도 푹신할 것 같은 아기 그리폰 인형이 침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거기다 침대 위에서 주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은 무려 악마의 피막 날개가 달린 곰인형이었다.
무려 테디 매디의 메르헨 베어 시리즈 오리지널. ‘No.45 미크 데빌 베어(Meek Devil Bear)’.
이제는 더 이상 생산될 수 없을 역사적인 보물이었고, 이것을 선물한 이는 마왕이었다.
단잠에 빠져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거처의 주인은 더듬더듬 메르헨 베어를 찾았고, 이내 그것을 끌어안고서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더욱 깊은 꿈의 세계로 빠져 들고 있었다.
소중한 메르헨 베어에 보드라운 뺨을 문지르며 달콤한 꿈의 세계를 여행하는 이는 헤스티니아에게 이끌려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러스테리아였다.
러스테리아가 더듬더듬 자신의 인형을 찾느라 움직이면서 그에 따라 조금 흘러내린 이불을 부드럽게 다시 올려준 헤스티니아.
러스테리아의 어깨까지 온전하게 덮을 수 있도록 이불을 정리해준 헤스티니아는 조용히 침대의 한편에 앉았다.
소중한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온화하고 인자한 미소를 띤 헤스티니아.
그녀는 새근새근 자고 있는 러스테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는 당신같이 순진한 존재를 좋아한답니다.”
적막이 흐르는 거처 내에서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으나, 그러면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헤스티니아의 이야기.
그녀의 한마디는 러스테리아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저 공허한 혼잣말이 되어 허공으로 덧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저는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순한 여자이지만… 당신같은 분들은 왠지 마음이 놓이거든요…….”
헤스티니아는 조용히 손을 뻗어 러스테리아의 풀어헤쳐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하루동안 둥글게 말려 있었던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던 것을 가지런히 해 주었고, 둥글게 말린 모양의 뿔에 얽혀 있던 머리카락도 풀어내어 주었다.
단잠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손길이었고, 러스테리아는 잠에 빠져 있으면서도 헤스티니아의 손길이 오히려 기분이 좋은 듯 방긋 웃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영악할 줄 모르고, 거짓도 모르고, 숨길 줄도 모르고, 어리숙하고, 허술하고, 단순하고…….”
머리의 정리가 끝났음에도 러스테리아에게서 손을 떼지 않은 헤스티니아는 그대로 러스테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한 아이…….”
잠시 러스테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헤스티니아는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더욱 깊이 잠들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러스테리아를 뒤로 한 채, 헤스티니아는 그녀의 거처를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한마디를 남겼다.
“언제나 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답니다. 아무리 아파도…아무리 슬퍼도…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시길 바라요. 진심으로…….”
대상은 있으되 듣는 이가 없는 한마디를 남겨두고서 헤스티니아는 나갔다.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않은 염원의 한마디는 그저 공허만을 남겨둔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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