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불편한 마왕님 (2)
* * *
길었던 연회가 끝에 다다를 무렵.
밤은 깊어져 가고 있었고, 달콤한 잠에 빠져들기 위해 백성들이 하나둘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로 나눌 이야기가 많았던 마왕과 여성 간부들은 마왕성의 식당에 모여 새로운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베아트리스가 관리하는 식당인 만큼 그녀가 십분 실력을 발휘한 아름다운 디저트가 곁들여졌고, 모두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즐기는 와중 러스테리아가 가장 행복해했다는 것은 딱히 강조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마주하자마자 음담패설을 늘어놓아서 기분이 나빴습니다.”
끝까지 일어서서 시중을 들 셈이었던 베아트리스를 네로멜티아가 극구 요구하여 자리에 앉히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한창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하던 베아트리스가 혐오의 감정을 내비치며 휴미안을 언급했다.
연회장에서 서로 밀착한 채 애정을 과시하고 있었던 네로멜티아와 러스테리아 그리고 카디스텔라.
그 셋을 지켜보던 아티스의 눈빛이 무척이나 음흉하고 끈적했다는 이야기가 진행되던 중, ‘그래도 휴미안에 비하면 신사나 다름없다.’라는 이야기까지 흘러갔었다.
그 휴미안에 얽힌 이야기에서 베아트리스의 생생한 경험담이 펼쳐진 것이었다.
이에 질세라 네로멜티아도 동의하며 자신의 겪은 일을 언급했다.
“아, 걔네들 꼭 그러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더라. 나도 이번에 드워프들 구하는 과정에서 두 번 마주쳤는데, 두 번 다 마주치자마자 음담패설을 늘어놓고 성희롱을 하고 난리더라고.”
“으아… 끔찍해요!”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 채,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한 네로멜티아.
그럼에도 러스테리아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지, 몸을 바르르 떨며 진저리치는 모습을 보였다.
“감히… 더러운 버러지들 주제에 주인님께…!!”
그나마 러스테리아의 반응은 나은 편이었고, 베아트리스는 평소 보이지 않는 격분의 감정마저 보이며 살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서는 별 것 아니지만 더러웠다는 정도의 반응에서 그쳤었는데, 똑같은 일을 주인이 겪었다고 하니 당장에라도 날뛸 듯 기세가 험악해지는 것이었다.
베아트리스는 휴미안을 향해 공격을 감행할 듯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했다.
“나는 괜찮아. 원래 그런 것들인걸. 진정해, 베아트리스.”
“어머… 베아트리스님도 화를 내시면 무서우시네요.”
연회의 연장선이었던 여성 모임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모습을 보이자 네로멜티아는 곧바로 일어나서 베아트리스를 살살 달래며 자리에 다시 앉혔다.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베아트리스는 네로멜티아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리에 앉았으나, 여전히 분노가 끓어오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네로멜티아가 언뜻 스쳐 가는 시선으로 본 것은 베아트리스의 아름다운 벽안 위로 마구 출력되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마도 문자들.
타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에 따라 체내의 많은 변화들이 수치로 계산되어 출력되고 있었고, 어지럽기 짝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점멸하는 온갖 마도 문자들이 그녀의 격한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스티니아는 자신의 고상한 품위를 지키면서도 놀랐다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마음의 창이라 불리는 눈에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을 보면 그녀가 진심으로 놀란 것은 아니었으나, 두 손을 살포시 모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둔 채 짐짓 무섭다는 듯 너스레를 떠는 것을 보면 베아트리스의 기세가 살벌했던 것만큼은 명백한 사실인 셈이었다.
“너희도 베아트리스처럼 이상한 말 들었니?”
네로멜티아는 베아트리스가 진정할 수 있도록 화제를 다른 이들에게로 돌리려 했고, 분위기의 환기를 위해 더욱 편안한 미소를 연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러스테리아는 평소보다 더욱 활기찬 모습으로 주인의 질문에 선뜻 답했다.
“저랑 카디스텔라님, 헤스티니아님은 드래곤만 만나서 괜찮았어요!”
“그러게, 그건 다행이었어.”
카디스텔라는 분노한 케르디하크에게서 시체 창녀로 만들겠다는 둥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저주를 들었었지만, 분위기를 애써 환기시키고자 하는 와중에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마음먹어 러스테리아의 말에 가볍게 동의해 주었다.
“넬라는?”
“아… 저는…….”
유독 조용했던 넬라넬라가 궁금했던 네로멜티아는 넬라넬라를 콕 집어 물어보았다.
마왕의 질문에 의해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로 모여지자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던 넬라넬라는 이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녹색 괴물이라는 말만 듣고 다른 건 없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별것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으나, 그녀의 미소는 씁쓸한 감정이 배어 있어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휴미안의 더러운 음담패설을 듣지 않아도 좋았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으나, 그 이유가 외모적 특징에 있다면 오히려 기분이 더 안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주변의 모두가 그녀의 감정을 읽었고, 차갑게 내려앉은 분위기가 강한 압박감을 주기 시작했다.
싸늘한 정적이 체감 온도마저 낮추는 것을 자각하자 넬라넬라는 애써 활기를 보이며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외모에 신경 쓰는 성격이었다면 군인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군인은 임무에만 충실하면 되는 겁니다.”
넬라넬라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대로 떠든 입을 자책하고 있었다.
언급하지 않아도 될 자신의 문제를 생각 없이 얘기해서 주변에 피해를 주었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넬라넬라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면, 그건 휴미안에게서 녹색 괴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군인으로서 중요한 건 능력뿐이라고 자신을 달랠 뿐이었기에 그녀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였다.
“읏…!!”
넬라넬라는 애써 다른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전환 시킬 셈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다른 것에 가로막혀 버렸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
애정이 느껴지는 따스한 감각이 넬라넬라의 당혹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켰고, 한편으로 황홀한 감정에 사로잡히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네로멜티아는 예고도 없이 넬라넬라에게 입을 맞췄다.
“넬라는 예뻐.”
“아읏…….”
“좋아해.”
애정을 드러내며 보이는 모습으로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완강함.
네로멜티아는 넬라넬라를 향해 자신의 감상을 강경히 못 박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넬라넬라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면을 붉히며 소리 없이 입만 달싹였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마구 요동치고,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넬라는 나를 좋아해?”
“아… 으…”
네로멜티아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넬라넬라의 뺨에 손을 짚었다.
그다지 힘은 들어가지 않았고, 말 그대로 살포시 짚는 정도의 느낌이었으나 그 행동에 담긴 의미는 전혀 부드럽지 않은 것이었다.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마왕의 선홍빛 눈동자가 무언의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대답해.”
나직이 건네오는 그 한마디는 무척이나 강경한 명령이었다.
넬라넬라는 혼란스러운 자신의 감정을 애써 가다듬고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네……. 좋아… 합니다…….”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자 네로멜티아는 그제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화한 모습을 보였다.
넬라넬라의 뺨에서 손을 뗀 네로멜티아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서 떨어졌고, 아이를 타이르는 듯 애정이 가득한 음성으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내가 너를 예뻐하고 좋아한다는데. 그까짓 벌레들의 의견이 중요해?”
“아… 아닙니다.”
넬라넬라는 네로멜티아가 원하던 답을 내어놓았지만, 그것은 결코 분위기에 억압되어 억지로 나온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의 대답은 진실로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에 나온 진심이었다.
언제부터 휴미안의 의견이 자신을 흔들 정도로 중요했을까.
지나간 자신의 고민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넬라넬라의 기분은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네로멜티아라는 존재에 대해 더욱 명확한 존재감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고민 따위는 그녀의 말 한마디가 바꾸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인 것이었다.
마왕이라는 존재와 마주한 시간은 채 일 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마왕은 이미 자신의 안에서 무엇보다도 큰 존재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넬라넬라는 네로멜티아의 친근한 미소를 바라보며 확신에 찬 답 하나를 내어놓았다.
자신의 충성과 애정과 신념, 차마 헤아릴 수 없을 모든 것들이 네로멜티아라는 존재만을 바라보고 있노라고.
네로멜티아는 이미 넬라넬라의 모든 것이었다.
“아주 뜨겁네. 뜨거워. 우리 다 나가줄까?”
따스한 정적을 깨고 들어온 카디스텔라의 한마디에 넬라넬라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고, 네로멜티아 역시 넬라넬라의 앞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리에 돌아가야만 했다.
네로멜티아는 카디스텔라가 혹시 언짢아하고 있는지 그녀의 기색을 살폈으나, 그녀의 안면에는 짓궂은 웃음만이 보이고 있어 내심 안도하는 마음을 가졌다.
웬만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는 카디스텔라이니 그다지 신경을 쏟을 일은 아닌 셈이었다.
“넬라넬라라고 했나?”
“아, 네!”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었던 카디스텔라는 여유로운 모습을 하고서 케이크 위에 체리를 하나 들었다.
새하얀 크림이 묻어 있던 새빨간 체리는 설탕에 절여졌었던 모양인지 무척이나 끈적하면서도 반들반들한 광택이 나고 있었다.
그 매끄러운 광택의 새빨간 체리가 카디스텔라의 선홍빛 부드러운 입술에 닿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색상의 조화로 인해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모습이 연출되었다.
“오늘 나랑 같이 잘래?”
“읏…!! 네!?”
순간 너무도 놀라 소리를 높여버린 넬라넬라는 자신의 격한 반응을 뒤늦게 자각하여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카디스텔라는 퍽 귀엽다는 듯 슬며시 웃으며 남겨진 체리 꼭지로 네로멜티아를 가리킨 채 말했다.
“원래 네로멜티아하고 둘이서만 밤을 보낼 계획이었는데, 네가 예쁘고 마음에 들어서 끼워주는 거야. 나는 눈이 꽤 높으니까 영광으로 알라구?”
“그럼 저도 같이 잘래요!”
“어머! 그럼 저도 같이 자야겠는걸요?”
“이익!! 너희는 왜 끼어들어!!!”
눈치 없이 이때다 싶어 활기차게 끼어드는 러스테리아와 카디스텔라를 놀리듯이 너스레를 떨며 끼어드는 헤스티니아.
다소 오만한 기색을 하고서 넬라넬라에게 잠자리를 권했던 카디스텔라는 시끌벅적하게 끼어드는 두 여성 때문에 품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러 버렸다.
“셋까지는 괜찮아도 다섯은 아니잖아!!”
“어머, 카디스텔라님은 혹시 순정파이신가요? 그렇게 안 봤는데 꽤 보수적이시네요.”
“아니! 너무 많으면 네로멜티아한테 집중을 못 한다고! 나는 네로멜티아 보려고 온 거란 말이야!”
“핑계는… 어휴, 귀여우셔라.”
“야아아아아!!!!”
헤스티니아의 장난에 휘말려버린 카디스텔라는 냅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잔뜩 약이 올라 씩씩대면서 헤스티니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큰 반응을 보이는 카디스텔라가 무척 재미있었던 것인지, 헤스티니아는 정중하고 품위 있으면서도 은근히 성질을 긁는 고차원적인 도발 기술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아트리스가 대화에 참여하며 카디스텔라의 흥분은 절정을 찍었다.
“후후. 저도 주인님께서 주신 새 의상을 준비해야겠군요.”
“야아아아아아아아아!!!!!”
넬라넬라는 어느새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도 카디스텔라가 진정 자신을 원해서 동침을 권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넬라넬라를 격려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카디스텔라가 보였던 기색은 그녀의 권유가 완벽한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기에, 그저 겉치레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완벽한 격려가 되는 것이었다.
넬라넬라는 언제 울적했었냐는 듯, 무척이나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떠들썩한 분위기의 가운데에서 홀로 침묵을 지키며 지쳐 있던 네로멜티아.
네로멜티아는 이 모든 상황을 힘없이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내 의견은 없는 거야…?”
마왕님은 오늘 하루가 정말이지 불편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