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블러디 프라이멀 (3)
* * *
허벅지에 깊숙이 박힌 볼트.
주변을 원형으로 포위한 타워 실드의 오크들.
그리고 육중한 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채 아군의 진형을 헤집고 다니는 넬라넬라.
이 모든 조각들이 끼워 맞춰지자 보병대장은 넬라넬라가 취하고 있는 전술을 비로소 이해했다.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어라!! 벗어나야 한다!!”
핑! 핑! 핑!
“크학…!!”
“욱…!!”
오크군은 현재 적들의 도주를 방패 진형으로 막으며 원거리 사격을 이용해 전멸시킬 계획이었다.
원거리 사격에 대처할 수 있는 장비가 전무한 이상 경장보병대는 엄폐물이라도 찾아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타워 실드로 원형의 장벽을 둘러버린 오크군에 의해 장소를 벗어나지 못해 엄폐물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일부의 희생이 있더라도 이 포위진을 뚫고 빠져나가 지리적 이점을 취해야만 반격이 가능한 것이었고, 그나마 전투를 포기하더라도 포위진을 뚫어야 도주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보병대장이 명령하는 와중에도 포위진 너머에서 날아든 볼트 세례에 휴미안 병사 둘이 목을 꿰뚫린 채 절명했다.
휴미안에게는 기회의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었다.
“이, 이이익…!!”
푸욱!!
“꺼… 어어어어…!!”
보병대장의 다급한 명령에 휴미안 병사들은 포위진을 돌파하기 위해 타워 실드를 마구 두드렸다.
그러나 애초에 완력으로 승부를 볼 수 없는 오크라는 종족을 앞에 두고 힘겨루기는 무리였으며, 그나마도 그들이 지닌 롱 소드 정도로는 타워 실드라는 철벽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롱 소드라는 것은 예리한 검날로 빠르게 베거나 찌르는 용도의 무기인 만큼 대방패인 타워 실드에 타격을 줄 수는 없는 상성의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방패를 아무리 두들겨도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자 초조해진 휴미안 병사 하나가 타워 실드로 달려들어 방패를 양손으로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는 자포자기처럼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롱 소드로 타워 실드를 무력화 하기에는 종일의 시간을 보내더라도 방패보다 자신의 손아귀가 먼저 망가질 거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박하고 급박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의 행동이 몹시 무모하고 미련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롱 소드로 두들길 때와는 다르게 타워 실드가 조금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당연하게도 애초에 타고난 근력 면에서 상대가 안 되는 오크와 휴미안의 힘겨루기였으니 타워 실드는 결코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방패를 잡아당기기 위해 휴미안 병사가 바짝 달라붙자 방패의 너머에서 스피어가 나타나 그의 옆구리를 단숨에 찔러 버리는 참상까지 펼쳐진 것이었다.
애석한 일은 절망적인 상황의 몇 안 되는 선택지가 이들을 이런 무모한 판단을 내리게끔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검을 버리고 타워 실드에 달려들어 그것을 양손으로 잡아당기다가 숨진 병사 하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숨이 끊어진 형편없는 죽음이었으나 다른 동료들에게 그것은 상당한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니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통하지 않는 검으로 무작정 두들기기보다는 맨손의 육탄돌격이 훨씬 잘 먹힌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 몇이 타워 실드에 맞설 수 있도록 힘을 합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투우웅! 투웅!
“좋아!! 방패가 흔들린다! 동시에 밀어붙여!!”
셋의 휴미안이 모여 타워 실드 하나를 붙들고 밀어붙이나 싶더니, 타워 실드 너머에서 날아든 스피어를 뒤늦게 참여한 병사 하나가 양손으로 붙잡아 무력화시켰다.
그 이후 타워 실드에 달라붙은 병사 셋이 몇 번 힘차게 움직이자 타워 실드가 위태롭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희망을 보았던 주변 병사들이 더 몰려들었고, 경장보병들은 집단의 힘을 믿기로 마음먹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한 근력을 지닌 오크라 할지라도 휴미안이 여럿 달려든다면 밀어붙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저항을 해보기도 전에 그들의 궁여지책은 산산이 파훼되었다.
콰아아아앙!!!
하나의 오크를 무리지어 제압해 포위진에 구멍을 내려던 이들이 일순간 본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피범벅 시체가 되어 날아가는 것이었다.
줄이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아무렇게나 꺾인 관절들이 나풀거렸고, 측면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던 시체들은 지면에 아무렇게나 처박히며 지면에 깊고 길게 파인 흔적을 남겼다.
포위진을 무너뜨리려는 병사들을 넬라넬라가 저지한 것이었다.
육중한 장비를 가지고도 순식간에 쇄도한 넬라넬라가 전진하던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거대한 카이트 실드를 휘둘렀고, 그 거대한 철벽에 부딪힌 휴미안 병사들이 모조리 절명한 것이었다.
까아앙!! 까앙!! 까아아앙!!!
일순간 휴미안 병사들은 넬라넬라를 제압하지 않는 이상 포위진의 돌파가 번번이 저지당할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넬라넬라를 제압하기 위해 그녀의 등 뒤에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오크군의 타워 실드 하나도 어쩌지 못하는 그들의 롱 소드로는 타워 실드보다 두껍고 육중했던 넬라넬라의 풀 플레이트 아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롱 소드는 처참히 날이 상하고 있는데 넬라넬라의 풀 플레이트 아머에는 흠집조차 나질 않으니 장비의 성능도 명확하게 차이가 난다는 정황마저 보이고 있었다.
콰직!! 콰지지직!! 콰지직!!
넬라넬라는 자신의 등에 검을 들이댄 이들에게 즉각적으로 대처하였다.
투 핸디드 소드나 다름이 없을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 그녀의 바스타드 소드.
넬라넬라는 후방을 향해 힘껏 신체를 틀면서 원심력을 이용해 바스타드 소드를 휘둘렀다.
경장보병대는 훈련을 느슨하게 하는 이들이 아니었고, 상대의 반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기민한 회피를 보일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훈련은 늘 자신들이 사용하는 롱 소드나 쇼트 소드(Short sword), 기껏해야 브로드 소드(Broad sword) 정도의 무기만을 이용해 진행해 왔기에 이처럼 길고 거대한 무기에 관해서는 익숙지 않았던 것이었다.
넬라넬라의 반격을 피한다고 후방으로 힘껏 물러난 것은 좋았으나, 그들의 회피 거리보다 넬라넬라의 바스타드 소드가 더 길었다.
결국 경장보병 셋이 그 자리에서 허리가 갈라지며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는 참상이 벌어진 것이었다.
검이 적의 신체를 베며 난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이질적인 소리.
경장보병 셋의 시체는 말 그대로 허리가 통째로 뜯겨져 나간 것 같은 절단면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예리하게 벼려봐야 평범한 검은 허리를 베는 과정에서 검날이 막혀 버린다.
옆구리를 통해 허리로 파고든 검날은 복부의 중앙 즈음에서 살과 뼈의 마찰력에 힘을 잃고 멈추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물며 단 한 번의 참격으로 셋을 양단하는 일이 평범할 리는 결코 없는 것이었다.
이 비현실적인 광경은 넬라넬라의 강대한 근력과 바스타드 소드의 육중한 무게가 합쳐진 결과였고, 달리 쉽게 말하자면 오로지 압도적인 힘으로 터뜨리듯 끊어내는 것이었다.
빠드드득!!!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채 죽음을 맞이한 시체.
넬라넬라는 다른 휴미안 병사들을 향해 걸어가다가 한 시체의 상반신을 밟았다.
그 순간 넬라넬라의 발에 착용된 철갑 신발인 사바톤(Sabaton)이 시체의 흉곽 전체를 으스러뜨리며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넬라넬라가 착용한 모든 장비가 휴미안의 연약한 신체로는 단지 밟히는 것만으로도 사망에 이를 수 있을 정도의 무게를 지녔다는 증거였다.
철걱! 철걱! 철걱!
넬라넬라가 다른 휴미안 병사들을 향해 나아가고, 그에 따라 그녀의 사바톤에서 둔중한 금속음이 울리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에서 피로 물든 발자국이 지면에 새겨지고 있었다.
휴미안 병사들은 어떠한 공격도 통하질 않는 절대적인 천적에게 공포를 느꼈고, 압도당한 나머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푸욱!! 푹!! 푸욱!!!
“케윽…!!!”
“제발 그만!! 우리가 잘못 했어!! 나가게 해줘!!!”
“살려줘!! 제발 그만해!!! 컥…!!”
그러나 넬라넬라를 피한다고 명줄이 길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주변 일대에 포진한 오크 저격수들이 볼트를 날려대며 시시각각 휴미안 병사의 수를 줄이고 있었고, 겁을 집어먹은 휴미안 병사의 일부는 오크 저격수의 집중 사격을 피하기 위해 포위진을 뚫으려다가 타워 실드의 너머에서 날아드는 스피어에 목숨을 잃고 있었다.
그나마 힘을 합쳐 포위진을 뚫으려 하면 어김없이 넬라넬라가 들이닥쳤고, 무리를 지은 휴미안 병사들은 모조리 피범벅의 고깃덩어리가 되어 지면에 처박혔다.
“제, 젠장… 본대의 지원만 있었더라면…”
자신의 허벅지에 박힌 볼트를 뽑았다간 과다출혈로 죽을 수 있기에 붕대를 감아 압박하는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던 보병대장.
그는 너무도 절망적인 상황에 비탄하다 뇌리를 스치는 하나의 가정에 아연실색하여 붕대를 감던 손을 멈추기까지 했다.
혹여 본대는 연락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연락을 못 받을 상황인게 아닐까.
애초에 휴미안 본대의 습격도 드래곤 케르디하크가 협조를 구한 기습 작전이었다.
자신이 마왕성을 습격하여 이목을 끌고 병력을 끌어낼 테니, 휴미안군은 비어 있을 카보니 숲을 공략하라는 계획.
동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친다.
더 나아가 현재 자신의 임무는 그 기습 작전에서 파생된 더욱 은밀한 기습이었다.
카보니 숲을 기습하는 일이 만에 하나 들키더라도, 자신들은 들킬 확률이 더욱 희박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이끄는 경장보병대를 기다렸다는 듯이 포위한 오크들은 무엇인가.
심지어 자신들의 이동 경로를 미리 파악하지 않고서야 이토록 정확한 위치에 구덩이를 파고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경장보병대의 은밀한 침투는 이미 오크의 손바닥 안이었다고 봐야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보병대장의 가정은 신빙성을 얻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자신들이 들켰을 정도면 본대는 어떠할까.
마왕이 존재하고 있다면 전능한 드래곤인 케르디하크가 말해 주지 않았을 리가 없었고, 그것에 더해 마왕의 부활은 아스타리스 북부의 전초기지가 처리할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니 에스테로난에서 대대적인 출병(出兵)을 할 일일 터였다.
결국 마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드래곤 케르디하크가 간접적으로 보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천 년 전에 패망한 헤모니겐트의 생존자 일부가 모여 삶을 도모하기 위해 발버둥을 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케르디하크가 느낀 마력의 파장과 데카스트라스 산맥 근처에서 발견된 드워프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명품은 한낱 패잔병들이 생존을 위해 뭉친 사소한 결과로 봐야 했다.
지금까지는 그랬었다.
자신들의 위치와 목적 그리고 이동 경로까지 발각되었다면, 본대의 습격 또한 진작에 발각되었다고 봐야 했다.
본대는 현재 다급한 지원 요청도 받지 못할 정도의 위기를 직면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통신 마도구를 지닌 본대의 모든 인원이 전부 연락을 안 받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대, 대체 뭐가… 어떻게…….”
투욱… 툭…….
순간 보병대장의 발치로 둥근 물체 하나가 날아들어 지면을 굴렀다.
그것은 보병대장이 이끌던 부하의 머리였다.
넬라넬라의 방패에 치여 신체가 산산이 조각난 채, 그의 머리가 보병대장의 발치로 굴러온 것이었다.
마치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눈을 부릅뜬 채 죽은 부하의 눈이 보병대장에게 생생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보병대장은 떨리는 시선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부하들의 애원과 비명이 끊이질 않는 참상.
무릎을 꿇고 목숨을 애원하다 눈에 볼트가 꽂혀 비명을 지르는 병사.
자신의 떨어진 팔을 주워 들고는 그것을 다시 붙여 보려고 절단면에 수차례 갖다 대는 미친 짓을 반복 중인 병사.
방패를 붙들고 악을 쓰다 스피어에 복부가 뚫려 내장이 튀어나온 병사.
유사시에 태고의 숲을 불태우기 위해 가져왔던 화약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던지려다 볼트에 맞아 저지당하며 자폭해버린 병사.
거대한 갑옷과 카이트 실드로 무장한 여성 오크를 사살하기 위해 검을 휘두르다 그녀의 방패에 치여 한쪽 어깨가 통째로 뜯겨 나간 병사.
주변 일대의 대지가 붉게 물들 정도로 피가 뿌려지고 있었고, 자욱한 피비린내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보병대장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보았다.
거대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오크.
그레이트 헬름의 틈 사이로 보이는 갈색 눈동자.
적을 참살하는 일에 비정할 정도로 거침이 없는 눈빛.
연(?) 모양의 거대한 철벽은 피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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