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블러디 프라이멀 (1)
* * *
“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있었다니…….”
오색 빛의 작은 새가 지저귀는 평화.
찬연한 녹음이 펼쳐진 청초의 대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생명을 품고 있었다.
새하얀 토끼가 검은 눈망울을 빛내며 들풀을 오물오물 뜯었다.
앙증맞은 줄무늬의 다람쥐가 작은 나무 열매를 두 손에 꼬옥 쥐고서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긴 꼬리를 가진 화려한 새 한 쌍이 서로를 좇으며 한가로이 수풀 사이를 노닐었다.
연두색의 작은 개구리는 넓은 이파리 아래의 그늘에서 조용히 쉬고 있었다.
화려하게 핀 꽃들에 주홍빛의 화려한 나비가 날아들어 꿀을 빨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무관하다는 듯 아름다운 평화가 깃들어 있는 자연.
생명의 요람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태고의 숲이었다.
뚜둑
“히야, 이 정도면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조용히 해라. 임무 수행 중이다.”
한 휴미안 병사가 자신의 손바닥만 한 꽃 하나를 꺾어 들고서 신이나 흥얼거렸다.
그러자 이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인물 하나가 나직이 제지하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현재 은밀한 군사 작전을 진행하는 중이었기에, 우두머리로 예상되는 인물은 작전에 차질이 생길만한 일을 원치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꽃을 꺾어든 병사는 대장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흥겨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거 좀 보십쇼! 조용히 하게 생겼습니까? 무려 꽃이 있습니다! 에스테로난에서도 귀하다는 게 꽃인데, 여기는 에스테로난에 없는 품종의 꽃이 지천에 널려 있다구요? 이거 몇 뿌리 캐가면 금방 부자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나도 안다. 그래도 우리는 임무 수행 중이고, 지휘관님은 적의 저항이 거셀 경우 숲을 모조리 태워버리라고 하셨다. 공과 사를 혼동하지 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노예다. 그깟 풀뿌리 따위에 한눈팔다가 노예를 놓치게 되면 곤란하다.”
“하기야, 노예가 가장 돈이 많이 되기는 하죠?”
이들은 휴미안군의 경장보병들이었다.
베아트리스와 전투하던 휴미안군 본대에 존재했던 오십 명의 경장보병.
베아트리스는 그들의 규모치고는 경장보병이 너무 적다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었고,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었다.
그리고 베아트리스의 의심은 사실이었다.
휴미안군은 노예를 사로잡는 일을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던 상황이었고, 이종족들이 저항을 해봐야 얼마나 위협적이겠냐는 안일한 생각마저 하고 있었었다.
심지어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마도 거병을 무려 이십 기나 끌고 온 상황이었기에, 지휘관은 본대의 전열을 지킬 중장보병은 필요도 없고 경장보병조차 거추장스러울 뿐이라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이종족 노예사냥에 있어서 단 하나의 도주자조차 원천 차단하기 위해 군세를 나눈 것이었다.
그것이 더 영리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케르디하크가 마왕성을 치면 강대한 드래곤을 막기 위해 이종족들이 마왕성에 전력을 투입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카보니 숲은 그야말로 껍데기가 깨진 호두가 되는 것이었다.
집어삼키는 과정에 일말의 노력조차 필요 없을 먹음직스러운 호두.
만약에 이동 수단이나 연락 수단이 없어 마왕성으로 향하지 못하고 카보니 숲에 머무르는 병력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본대의 상대는 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본대가 여유롭게 카보니 숲의 이종족들을 상대하는 동안 이종족 무리의 싸우지 못하는 약자들은 근방에 존재하는 태고의 숲으로 피난을 갈 거라 예측했고, 지휘관의 예측이 들어맞아 피난민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들 중에는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휘관은 상대적으로 쓸모가 덜 한 경장보병을 달리 써먹기로 한 것이었다.
태고의 숲에 이들을 은밀히 침투시켜 그 피난민들조차 남김없이 싹 쓸어 포획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사실 남성 노예보다는 여성 노예가 더욱 상등품이니 피난민의 포획이야말로 진정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경장보병대의 임무는 일말의 도주로조차 차단하여 피난민들을 전원 생포하는 것이었고, 지휘관의 예상이 들어맞는다면 필시 존재할 피난민들에게 존재를 들키지 않도록 기척을 감추고 다가가 그들을 포위해야만 했다.
그러니 경장보병대의 대장은 임무를 은밀하게 진행하여 실수 없이 완수할 수 있도록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이었다.
행여나 피난민을 포위하기 전에 발각되어 추격전이라도 벌어지게 된다면, 여러모로 골치 아픈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지나가다 들었는데, 이 숲이 원래는 엘프들이 살던 숲이라면서요? 먼 옛날에 폐허가 된 땅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는데 이거 엘프 노예를 기대해 봐도 되는 거 아닙니까?”
“… 그래. 엘프들이 돌아왔을 확률이 높지. 누가 뭐래도 엘프는 마법력도 높고 자연에서 살아가는 종족이니……. 오염된 환경에서는 살지 못하는 것들이니 그것들이 이 숲에 돌아왔다면 필시 자신들이 살아 숨 쉴 수 있을 환경을 필사적으로 조성했을 확률이 높다.”
“으햐아아아!! 엘프년 살 냄새는 꽃향기나 풀냄새가 난다고 하던데 진짜입니까!? 아… 상상만 해도 꼴리네…!!!”
“조용히 하라니까!”
엘프가 존재할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서 바지춤을 부여잡는 휴미안 병사.
휴미안 병사들은 본래 어떤 장소에서 복무를 하던 성노예를 안을 수 있었다.
군에 복무하는 동안 성욕을 해결하는 수단 역시 보급의 한 갈래라고 여기는 것은 휴미안들의 상식이었고, 애초에 이종족을 말이 통하는 가축 정도로 취급하는 상황이니 그들에게 성노예는 자아를 가진 보급품인 셈이었다.
어떤 기지나 본부에도 성노예는 무조건 배치되는 것이 당연한 룰이었고, 그들은 임무 수행 중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성노예를 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래 노예사냥이 좀처럼 성과를 보이지 못하는 까닭에 이들의 본부는 에스테로난에서 성노예를 보급받지 못하고 있었고, 그나마 이들이 노예사냥을 다닌다 할지라도 이종족 여성을 발견하는 일은 없었기에 이들의 본부에는 성노예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삼 년 전에 병들어 사망한 성노예를 마지막으로 여체를 품지 못해 스스로를 달래기만 하며 살아온 휴미안 병사들.
아예 성노예를 구경도 못해 본 이라면 모를까, 성노예를 안는 것이 일상이었던 자들에게 금욕의 삼 년은 무척이나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런 와중에 평범한 이종족도 아닌 엘프라는 요정족이 언급되자 휴미안 병사의 눈이 돌아버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테라리스의 여러 종족들 가운데에서도 드높은 미색을 자랑하는 종족.
싱그러운 대자연의 아래에서 살아가는 청초한 요정족.
엘프는 이종족 노예들 중에서도 최상품으로 취급받는 보물이었기에, 삼 년간 쌓인 욕정을 엘프로 풀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정욕이 끓어올라 견디기 힘들어지는 것이었다.
이는 대장과 대화 중이었던 병사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고, 은연중에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다른 동료들마저 저마다 낯을 시뻘겋게 상기시키고 고간을 부풀리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사령관이 처녀에 민감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겠지? 처녀인 성노예는 특히 높은 등급을 받으니 말이다. 사령관은 열심히 노예를 상납해서 에스테로난 고위층의 눈에 들고 싶어 하니 노예의 질이 떨어지는 건 그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일이겠지. 그래서 노예사냥 도중에 노예들을 건드리는 일 또한 금지하는 것이지만… 처녀가 아닌 것들은 눈감아 줄 테니 다치게 하지 않는 선에서 마음대로 해도 좋다.”
“저, 정말입니까!? 크흐!! 역시 대장님!! 크하!!!”
“그러니까 조용히 해라. 임무를 실패해서 노예를 놓치게 되면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아!”
“알겠습니다!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도록 하겠…”
푸욱!!
임무를 칼같이 수행하는 사무적인 대장이지만, 자신의 부하들에게는 곧잘 호의를 베푸는 너그러움도 있었다.
문제는 그가 쓰는 선심이 다른 이의 자유를 빼앗고 그들의 인격을 유린하는 것이라는 점이었으나, 부하들에게 대장은 그저 은혜를 베풀 줄 아는 호인으로 보일 뿐이었다.
대장의 묵인과 허가가 떨어지자 휴미안 병사는 날아갈 듯이 기뻐하며 더욱 전의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음습하고 더러운 환희가 그가 보였던 생애 마지막 모습이었다.
“케…! 케륵…!!!”
“저, 적습이다!!!”
노예를 품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벅차 만면에 웃음을 지었던 병사의 목이 꿰뚫렸고, 그는 기도를 타고 뿜어지는 피거품을 토해내며 버둥대다가 절명해 버렸다.
그의 목을 꿰뚫은 것은 팔의 반만 한 짧은 길이의 볼트(Bolt)였다.
보병대장은 목이 꿰뚫린 부하를 굳이 살리려 하지 않았고, 그저 적습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휘권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는 분명 대장이 아끼는 부하 중 하나였고, 그렇기에 임무 수행 중에 그가 무례한 언동을 보여도 좋게 넘어갈 정도였다.
그러나 목이 꿰뚫린 이상 치료할 수단조차 없는 작전지에서 그를 살릴 수 있을 방법은 전무한 것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보다는 직면한 위기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대처를 해야만 더 큰 희생을 줄일 수 있는 것이었고, 대장의 결단력은 즉시 빛을 보고 있었다.
적습이라는 경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경장보병대는 방어를 위한 진형을 갖추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서로가 사주경계를 위해 바깥을 바라보며 갖춘 둥근 진형.
분명 이로써 즉각적인 대처를 할 수는 있을 터였으나, 문제는 이들의 장비였다.
경장보병의 특성상 전신을 완벽하게 가릴 수 있는 방패가 없었고, 더욱 최악인 것은 현재로서 적의 공격을 차단해 줄 갑옷조차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본래 아무리 기동성을 중시한다 할지라도 기본적인 방어구는 갖추는 것이 정석이었다.
경장보병이라 할지라도 가벼운 목재의 라운드 실드(Round shield)나 하프 아머(Half armor) 정도는 기본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습을 위하여 은밀히 침투하는 작전을 펼치던 중이었으니, 움직이며 소리가 날 수 있는 금속 장비들을 모조리 제외한 상황이었다.
기껏해야 가벼운 참격을 조금 더 무디게 해 주고, 불의(不?)의 화상을 조금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레더 아머(Leather armor).
그것이 이들이 착용한 방어구의 전부였다.
이런 방어구로는 저 짧은 볼트조차 막아낼 수 없었고, 사주경계를 진행하며 적의 위치를 파악해 접근전을 벌이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인 상황이었다.
그때, 나직한 여성의 음성이 그들에게로 전해졌다.
“내 눈으로 너희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듣던 대로 더럽고 추악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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