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대학살이 있으라 (3)
* * *
처음에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질질 잡아끌며 도망질하던 휴미안군.
한 번 다리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그들의 다리는 신기할 정도로 지치지 않고 움직이게 되었다.
바지에 지린내 나는 오줌을 지린 이들도 상당했으나, 두 다리에 젖은 바지가 질척이며 달라붙는 와중에도 그들의 달음질에는 거침이 없었다.
연이어 들려오는 요란한 굉음이 그들의 도주에 채찍질을 가하는 것이었다.
고막마저 찌릿하게 할 정도로 울려 퍼지는 진동.
흡사 지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지반을 뒤흔드는 폭음.
천재지변의 잔해나 다름이 없었던 그 압도적인 여파는 매 순간이 마도 거병의 말살을 뜻하는 것이었다.
곧 모든 마도 거병들이 산화할 것이고,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이란 하나의 재앙이나 다름없는 저 하녀가 자신들에게 들이닥치는 것뿐이었다.
화염지옥의 악마가 지옥불을 쏟아 낸다 할지라도 사소한 흠집조차 날 수 없을 거라 굳게 믿었던 합금갑은 너무나도 쉽게 찢어 발겨졌다.
난공불락의 철옹성(???)도 단숨에 짓밟아 가루로 만들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던 전탄 폭격은 하찮은 산들바람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물창생(?物??)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던 마력광선포는 그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의지도 신념도 없이 맹목적일 뿐이었던 안일한 믿음은 결국 파멸이라는 약속된 대가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휴미안 병사들은 삶의 미련이라는 빗장과 죽음의 공포라는 자물쇠를 쥐고서 문을 걸어 잠글 뿐이었다.
결국 이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들판에 노니는 사슴보다도 느린 두 다리를 휘저으며 엎치락뒤치락 도망가는 길뿐이었으니, 이들의 빗장과 자물쇠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힘을 지니고 있는지는 장님 조차도 훤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것이었다.
“아아아…….”
가장 다리가 빨랐던 선두의 병사들 몇이 다리를 멈추고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을 제치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을 생각했던 후방의 병사들 역시 하나둘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제자리에 멈춰 서버렸다.
안면에는 그저 허망한 감정만이 피어나고 있었고,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단순한 의지조차 상실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일한 도주 수단이며 필사의 목표로 삼았던 수송용 탑승 차량, 라이노.
그들이 타고 왔던 이동 수단만이 이 지옥 같은 대지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라이노 하나만을 떠올리며 잘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채찍질해 달려왔었다.
드디어 라이노가 대기하고 있던 장소까지 다다랐으나, 문제는 라이노의 앞에 서 있는 존재들이었다.
“왔는가, 간악한 족속들이여.”
온갖 살벌한 무기들과 견고한 강철의 갑옷으로 철저히 무장한 오크.
두껍고 질긴 가죽과 바위와 같이 크고 단단한 근육을 가진 거구의 오우거.
그들이 라이노의 앞을 지키고 서서 휴미안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철저한 대열을 보이며 웅장한 위용을 세운 오크의 군대.
저마다 강대한 근육을 부풀리며 거친 호흡으로 용맹한 전의를 과시하는 오우거 부족 전사.
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오크 하나가 휴미안 병사들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가늘게 꼬부라진 콧수염과 잘 다듬어진 가는 턱수염이 인상 깊었던 오크.
오크치고도 상당한 거구를 자랑했던 그의 신장은 삼백 멘톨에 이를 지경이었고, 그 거대한 체구에서 나오는 위세란 감히 범접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특히 그가 착용한 무기와 갑옷.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듯 살벌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해골이 양각된 거대한 배틀 액스.
날카로운 스파이크가 잔뜩 돋아 있는 시커멓고 육중한 풀 플레이트 아머.
조금이라도 다가갔다간 어떤 방식으로든 처참한 고깃덩어리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미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세가 공포스러웠다.
“후으으으읍!!!”
끼이이이!! 꽈드드드드드득!!!!
거대한 해골의 배틀 액스와 시커먼 가시 갑옷을 입은 거구의 오크가 주었던 위압은 휴미안 병사들의 몸을 마비시킬 정도였으나,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오우거의 위용은 그야말로 휴미안 병사들의 다리를 풀리게 만들 정도였다.
무려 육백 멘톨에 육박하는 거체를 지닌 오우거가 라이노 한 대를 두 팔로 끌어안아 박살내고 있었다.
단지 힘껏 끌어안았을 뿐임에도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수송용 차량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그러지다가 이내 산산이 부서져 온갖 부품과 잔해들을 쏟아내고 고철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훔!!!”
두쿠우우우웅!!!
휴미안 병사 마흔 명은 거뜬히 태울 수 있는 그 거대한 금속의 차량이 단숨에 박살난 것만으로도 기겁을 할 정도였건만, 그 오우거는 더 나아가 지면에 자신의 주먹을 힘껏 내리꽂았다.
그리고 뼈와 살로 이루어진 주먹이 대지를 내리치며 난 소리라고는 절대 믿을 수 없을 육중한 진동이 지면을 타고 울려 퍼졌다.
거의 한순간의 지진에 가까웠던 그 울림은 가뜩이나 힘이 풀리고 있었던 휴미안들을 그대로 주저앉히기까지 할 정도였다.
만일 저 주먹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휴미안 병사들은 저 거대한 주먹 앞에서 생존은커녕 본연의 형체를 유지할 자신조차 없었다.
그저 대지에 납작이 처박힌 핏덩어리가 될 미래가 보일 뿐이었다.
살벌한 위압을 보이는 오크와 거대한 위용을 보이는 오우거.
이들은 베리베리 벡 베그리트와 오운이었다.
“듣거라! 용맹한 군인들이여! 긍지 높은 전사들이여!”
베리베리는 전방의 휴미안 병사들을 노려보고 있었으나, 그의 힘찬 외침은 오크군과 오우거 부족 전사들을 향해 있었다.
그 장엄한 외침은 아군의 사기를 고양시킴과 동시에 적에게는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그릇된 야망을 위하여 테라리스를 파멸로 이끈 족속들이 여기에 있다! 자신들의 더러운 탐욕을 위하여 카보니 숲에 피 묻은 손을 뻗치려던 족속들이 여기에 있다!”
오크군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으며 조용히 기립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두꺼운 투구 안에서는 강렬한 전의와 신념이 불타는 선명한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오우거 부족 전사들은 저마다 거친 호흡을 내뿜으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험악한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 깊은 곳에서는 흉포한 적의(??) 내면에 감춰진 선의와 긍지가 빛나고 있었다.
“천 년을 숨죽여 기다려온 우리의 분노를 적에게 퍼부어라!! 헤아릴 수조차 없을 희생자들의 복수를 이루라!! 간악한 이들의 피를 뿌려 정의를 세우라!! 루이나의 여신께서 함께 하시니 우리에게는 오직 승리 뿐이다!!!”
가열한 연설의 가운데 찾아온 잠시의 침묵.
폭풍전야의 소름 끼치는 적막 속에서 휴미안은 심장을 짓누르는 압박을 느꼈고 오크와 오우거는 심장이 마구 고동하는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폭풍을 불러올 이들과 폭풍에 휘말릴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극히 상반된 것이었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만을 생각한다!!”
베리베리는 자신의 배틀 액스를 조용히 치켜들었다.
비명을 지르는 듯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해골 문양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시퍼렇게 선 도끼날이 유독 싸늘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오늘… 지옥을 만들 것이다!!!!!”
“돌격하라!!!!!”
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연설의 끝을 알리는 베리베리의 마지막 한마디.
그것은 전의의 격정에 끓어올라 내지르는 한 차례의 포효였다.
베리베리의 포효에 뒤를 이어서 터져 나온 오운의 돌격 명령.
그것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장엄한 신호탄이었다.
전장의 우렁찬 함성과 함께 오크군과 오우거 부족 전사들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동료를 지키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이들의 신념은 죽음의 두려움이 발도 붙이지 못할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맹진(??)하며 자신들이 믿는 정의와 자신들이 품은 긍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사격해!!! 고작 검이나 도끼를 앞에 두고 뭘 겁먹는 거냐!!!”
“하, 하지만… 지금 발포했다간 저들의 후방에 라이노가 피격당할 수 있습니다!!”
“그걸 걱정할 때인가, 멍청한 자식!!! 지금 죽으면 라이노고 뭐고 없는 거야!!!! 쏴라!!! 닥치는 대로 쏴!!! 살고 싶으면 쏘란 말이다!!!!”
오크와 오우거에게 압도당해 말을 잊었던 휴미안군 지휘관은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전장의 함성을 듣고서야 다급하게 지휘권을 행사했다.
그의 부관이 유일한 퇴각 수단이자 한줄기의 구명줄이었던 라이노를 걱정하여 재고의 요청을 간곡하게 전했으나, 지휘관의 결정은 너무나도 확고했다.
핏발 선 눈으로 부관을 노려보는 지휘관의 시선에는 강경함이 있었다.
피를 토하는 듯 격정을 쏟아붓는 지휘관의 명령에는 단호함이 있었다.
지휘관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 하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삼백 멘톨 가량의 오크와 오백 멘톨에 육박하는 오우거를 상대하기에 고작 이백 멘톨조차 되지 않는 나약한 휴미안의 신체는 하잘것없는 허수아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원거리 무기로 무장한 휴미안이 거대한 오크와 오우거의 접근을 허용하면 벌어질 광경.
그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