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광산의 도적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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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멜티아는 잠시 휴미안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녀가 현재 착용하고 있는 의복 나이트 일루전에게는 완전 수복의 능력이 있었다.
착용자의 마력이 모자라지 않는 이상 어떻게 훼손되거나 망가지던 무한한 초고속 수복 능력을 보이는 마법 의상이었다.
네로멜티아의 오랜 벗, 카디스텔라 문 나이트가 네로멜티아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보물.
그 소중한 물건이 하잘것없는 공격을 받아 계속해서 망가지는 모습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네로멜티아는 휴미안의 모든 총기를 무력화시켰다.
말 그대로 그들의 총기에 새겨진 모든 마력 회로를 무력화시킨 것이었다.
이런 귀찮기만 한 보잘것없는 공격은 사양이다.
제대로 진심을 다해 덤벼 보아라.
네로멜티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유일한 무기를 잃어버린 휴미안들은 모든 전의를 상실한 모습이었다.
“나서는 자가 없구나. 이게 너희들의 답인가?”
네로멜티아는 자신의 앞에서 떨고 있는 휴미안들이 더욱 증오스러워졌다.
자신들의 무기를 잃고도 전의를 불태워 돌진하는 용기를 보였다면, 가증스러운 적일지언정 하나의 전사로서 대우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총기의 앞에 총검을 꽂아 자신에게 달려드는 용맹함이라도 보였다면.
단검을 들고 전력을 다해 달려오는 패기를 보였다면.
하다못해 맨주먹을 쥐고서 고함을 치며 돌진하는 갸륵한 모습이라도 보였다면.
그러나 이들은 애초에 총검이나 단검조차 없었다.
오로지 자신들의 총기 한 자루만을 믿은 채 다른 무장을 일절 택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적을 향해 하찮을지언정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필사의 의지도 없었다.
자신들의 뚜렷한 적수가 없는 상황에서 발전한 마도 공학의 기술력만을 믿고, 다른 이들의 모든 것을 짓밟았던 잔혹한 정복자들이 싸움에 진 개의 모습을 하고서 상대의 자비를 바란 채, 미동도 하지 못하고 떨고만 있는 것이었다.
긍지나 명예 따위는 일말의 작은 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비굴한 모습이었다.
“고작 이 정도의 각오를 가지고서 다른 이들을 학살하고 유린한 것인가. 그렇다면 실망이다 휴미안.”
“부, 부디… 부디 자비를…!! 뭐, 뭐든 드리겠습니다!!”
휴미안 병사들을 호령하던 백인장 하나가 어떻게든 협상을 해보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어떻게든 놀려 상대를 협상의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 필사의 권유를 하기 시작했다.
마구 요동쳐 초점조차 흐린 그의 눈동자에는 생존이라는 목적만이 가득 자리해 있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화, 황금이 두 상자나 있습니다! 귀한 보석이 한 자루나 있습니다! 신기한 마도구는 어떠십니까! 저를 무사히 돌려보내 주신다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저, 저는!! 멋진 노예를 선물해 드릴 수 있습니다!! 토목 공사로 다져진 건장한 몸의 남성! 같은 남성조차 욕망이 끓을 정도의 아름다운 남성! 어떤 명령이든 순순히 따르는 잘 조교된 남성도 있습니다! 어떤 노예를 원하시던 취향에 맞는 노예를 드리겠습니다!! 아니! 전부 드릴 수 있습니다!! 여성 노예가 없는 것뿐이지 남성 노예는 많이 있습니다!! 이종족 노예답게 성기도 크니까 밤일도 분명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미쳐가는 백인장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백인장 둘이서 경쟁이 붙어 버렸다.
온갖 보물들로 회유하는 백인장과 뒤늦게 나서서 온갖 남성 노예들로 회유하는 또 다른 백인장.
네로멜티아는 이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역겹고 혐오스러워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그들이 거래를 위해 제시한 모든 것들은 희생자의 피가 흥건한 보물이었으며 갈기갈기 찢어진 희생자들의 인권이었다.
어떻게 이토록 한결같이 추악할 수 있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악행을 위해 창조된 종족인 것 같았다.
아무리 휴미안이 밉더라도 그중에는 분명 착한 휴미안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던 네로멜티아.
그러나 휴미안이라는 종자들은 하나같이 악독하고 잔혹하며 비위가 상할 만큼 더러웠다.
이제는 정말 선량한 휴미안이라는 것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하기는 한 것인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네로멜티아가 지금껏 봐온 모든 휴미안들은 거짓말같이 쓰레기들 뿐이었다.
“너희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역겹구나. 짐이 정말 그런 걸 원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냐?”
“히, 히익…!! 요, 용서를…!!”
“그 멀쩡하게 달려 있는 주먹을 쥐고 덤벼라. 여의치 않으면 다리를 써라. 그것조차 여의치 않으면 이빨이라도 들이대라. 피 흘리며 일어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기어서라도 전진하라. 너희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보라는 말이다!”
정말 하나같이 아찔할 정도로 쓰레기들 뿐이었다.
처음 마주했었을 때, 이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네로멜티아를 성노예로 삼으려 했었다.
한 치의 거리낌 없이 네로멜티아의 외모를 평가하며 저속한 음담패설을 늘어놓고, 정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위아래로 훑으며 노골적인 감상과 함께 입맛을 다시기 바빴다.
타인의 인권을 유린하고 자유를 빼앗으며 생살여탈권마저 쥐려는 행태가 이들이 얼마나 잔인한 정복자들인지를 보여주는 정확한 증거였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운 여성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벅차올라 추잡한 음담패설을 지껄이던 것이 이들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자신들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꼬리를 내린 채,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었다.
상대에게 자비를 구하며 자신들의 알량한 몸뚱아리를 보신(??)할 얕은 꾀를 내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노예로 삼으려고 침을 삼키던 상대를 앞에 두고, 다른 이들의 터전을 짓밟으며 약탈한 재물들과 그들의 자유를 빼앗으며 수확한 인권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두려는 만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것이었다.
근본부터 어긋나 있는 역겨운 종족이었다.
천 년 전 헤모니겐트를 수차례 침공했었던 휴미안들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 년이 지나 부활한 현재로서도 지금까지 만난 두 번의 휴미안 무리들은 천 년 전과 비교해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진정 휴미안들은 근본부터 썩어버린 테라리스의 기생충들인가 하는 생각이 확신의 단계에 접어들 정도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문득 네로멜티아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휴미안이 하나 있었다.
‘저는 신왕의 이름 아래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싸웠습니다.’
네로멜티아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었던 휴미안의 용사.
그녀는 이 간악한 휴미안의 편에서 싸웠고, 결국 네로멜티아의 심장에 성검을 꽂았다.
그 과정에서 공평함이나 정정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피난하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붓고 양손마저 묶여 있었던 네로멜티아에게 오히려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일말의 배려 없이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정의가 있었다.
‘저 밖을 봐라. 대지를 피로 적시며 학살당하는 나의 백성들에게도 이것은 평화인가.’
‘저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이 싸움을 끝으로 우리 휴미안은 신들의 의지 아래 모든 생명들을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오늘 흘린 피는 그에 따른 불가피한 희생이었습니다.’
‘우리 헤모니겐트의 백성들도 평화를 얻을 것이라는 말인가.’
‘약속하겠습니다. 더는 피를 흘리거나 고통받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신왕 오드볼그께서 제게 그리 말씀하셨으니까요.’
잘못된 편에 서서 싸울지언정 그녀의 눈동자에는 선량함이 깃들어 있었다.
잘못된 논리를 받아들였을지언정 그녀의 검에는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잘못된 믿음을 가졌을지언정 그녀의 마음에는 평화를 바라는 소망이 깃들어 있었다.
신왕의 용사, 베르카디아 벨 거트루드.
단 한 차례의 전투에서 마주했을 뿐인 그녀의 모습과 이름이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녀가 선한 모습을 보여준 유일무이한 휴미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상식적으로 종족 전체가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이 모두 추악할 수는 없었다.
분명 그들 중에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이들이 있을 것이었다.
헤모니겐트에 침략하던 휴미안만이 네로멜티아가 목격할 수 있었던 휴미안의 전부였고, 그들 모두가 추악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신왕 오드볼그의 용사, 베르카디아 벨 거트루드는 네로멜티아에게 휴미안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 유일한 존재였었다.
그렇기에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간 그녀의 약속을 지켜보겠노라는 말을 남긴 것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믿고 있었던 신왕 오드볼그와 휴미안들이 사실은 정의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순간.
견고한 믿음과 신뢰가 철저히 박살난 순간.
그녀가 타락보다는 평화를 위한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살해한 마왕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떤 결과를 마주하더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끝까지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바람과 휴미안에 대한 분노는 별개의 문제였다.
“안 되지 안 돼. 아무리 보잘것없는 버러지들일지라도 적을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해서야…….”
네로멜티아는 잠시 깊게 빠졌었던 회상(回?)을 지우고, 현재 그녀가 직면한 현실을 다시 마주했다.
네로멜티아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자신들의 말을 흘려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백인장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회유를 위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었다.
네로멜티아가 잠시 가졌던 침묵의 시간은 백인장들에게 네로멜티아가 자신들이 제시한 조건이 마음에 들어 고민을 하고 있다는 커다란 착각을 안겨준 것이었다.
“아름다운 엘프 노예도 있습니다! 요정족답게 체력이 좋아서 노동도 잘하는 만큼! 밤일도 만족시켜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익! 비켜!! 그런 더럽고 냄새나는 노예들 따위를 좋아하시겠나!! 저, 저는 트롤의 가죽과 피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무려 두 달 전에 사냥한 트롤들에게서 나온 신품입니다!!”
네로멜티아는 그들의 필사적인 외침에 비로소 반응을 보여주었다.
슬며시 웃음을 보인 네로멜티아는 눈빛에 이채를 담고 그들에게 흥미라는 감정을 드러내 주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입술과 선홍빛의 아름다운 눈이 만든 가벼운 미소.
백인장들은 네로멜티아의 고혹적인 미소가 대지의 여신 아스타의 미소처럼 자애롭게 느껴졌다.
드디어 살길이 뚫렸다는 확신을 가진 것이었다.
“호오. 엘프라고?”
“에, 엘프에 관심이 있으시군요! 엘프는 겉보기에는 비리비리해 보여도 명색이 몇천 년을 사는 요정족이라 무척 튼튼합니다! 거기다 그들의 미색은 숲의 보석이라고도 칭해질 정도로 뛰어나니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저, 저도 노예를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가진 보화를 이용하면 근방의 노예 상인과 접촉해서 에스테로난에 납품할 노예를 가장 먼저 빼돌릴 수 있습니다! 아니마! 아니마는 어떠십니까!!”
“호오, 노예 상인?”
“그, 그렇습니다!! 고양이! 새! 표범! 쥐! 개! 여우! 온갖 형태의 아니마들을 만나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비스테리스 숲(Beasteress Woods)은 언제나 금광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네로멜티아는 더욱 짙은 미소를 흘렸다.
백인장들은 이제 됐구나 싶어 안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고, 더욱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상대가 바라는 것을 잘 파악했다고 생각한 이들이 자신들의 생환에 쐐기를 박기 위하여 더욱 뜨거운 열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반면 일반적인 병사들의 안색은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에스테로난에서 정기적으로 보급되는 물품만을 소비하며, 봉급을 타 먹는 이들이었다.
협상의 테이블에 앉을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소위 말하는 가지지 못한 자들이었다.
자신들의 목숨은 보장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네로멜티아가 기분이 좋아져 변심으로 자신들을 살려주는 요행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우선 너희들은 이쪽으로.”
네로멜티아가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었고, 그 순간 백인장 두 명의 신체가 공중에 떠오르며 천천히 네로멜티아의 옆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네로멜티아의 옆자리에 안착한 백인장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보장받았다는 생각에 희열을 넘어 환희마저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네로멜티아는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멸의 눈빛을 띤 채, 남겨진 휴미안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모든 장비를 내려두고, 착용한 모든 의복을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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