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케르디하크의 분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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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케르디하크가 할 수 있는 건 말문을 닫고 작은 서큐버스를 멍하니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러스테리아가 대화를 하고자 나왔을 때는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하건 자신이 주도권을 잡아 원하는 정보를 얻을 자신이 있었다.
시종일관 자신의 화만 돋우고 한마디도 지지 않는 카디스텔라보다는 어리고 순진한 서큐버스를 상대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고 생각해 오히려 러스테리아를 반기기까지 했었다.
마왕의 존재 유무만 알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속 시원하게 공격을 퍼붓고 마음 편히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케르디하크에게 러스테리아는 하나의 간편한 지름길로 여겨진 것이었다.
러스테리아가 아무리 신경 써서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무조건 자신에게 이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녀가 할 이야기라고 해봐야 오늘만은 물러가 달라는 간곡한 요청이나 힘없는 이들은 눈감아 달라는 절절한 부탁일 거라고 생각했다.
기껏 배짱을 부려봐야 주인을 죽게 만든 과거의 일에 대한 원망을 하거나 카디스텔라를 따라서 자신을 모욕하는 정도의 도발을 택할 거라고 예측했다.
“우선 블루베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써도 좋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블루베리 잼을 사용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베이스가 되는 아이스크림이나 생크림이 달기 때문에 평범한 블루베리를 사용하면 신맛만 강조되고 블루베리의 단맛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 저기…”
“덧붙이자면 아예 푹 익힌 잼을 사용하게 될 경우 블루베리 특유의 맛이나 식감을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형태가 남아있는 정도의 잼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식감으로 따지자면 블루베리 설탕 절임을 사용해도 좋지만 블루베리 잼 특유의 시럽을 사용한 것 같은 질척함이 없어서 별로예요!”
이건 정말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교묘한 화술을 통해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올 자신은 있었지만 이 상황은 명백히 케르디하크의 손을 벗어난 것이었다.
애초에 대화가 성립하는 상황이 아니었고 러스테리아 본인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관심사를 전달할 뿐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수분이 덜 한 게 좋습니다! 그래야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더 농후하게 느껴지고 식감도 부드럽기 때문이에요!”
“나, 나는 파르페라는 것에 관심이 없…”
“그럼 아이스크림의 제조 단계부터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아이스크림의 혼합 비율도 중요하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는 거품입니다! 공기를 어떻게 주입하냐에 따라서 아이스크림의 모든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케르디하크는 이 일방적인 요리 교육을 중단하고자 몇 번이나 시도를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황이었다.
일방적으로 떠들기만 할 뿐 케르디하크의 모든 발언을 가차 없이 무시해 버리는 러스테리아에게 말이라는 수단으로 어찌할 수 있는 방도는 전혀 없는 것이었다.
수상할 정도로 파르페에 진심인 러스테리아였다.
“아직 마왕성의 기반이 충분하게 다져지지 않은 상황에서 적들에게 위기감을 심어주는 수단은 지양해야 합니다. 오히려 마왕성의 재건과 종족들의 규합은 오로지 마왕군 간부들이 독자적으로 계획한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려야 할 상황이죠.”
“이해했어. 그럼 네로멜티아의 존재는 오히려 없는 것으로 확정인 셈이네?”
한 편에서 파르페에 대한 일방적인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을 무렵, 나머지 마왕군 간부들은 은밀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차분한 모습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베아트리스의 이야기는 이의라는 것이 존재하기 힘들 정도로 명확한 것이었기에, 베아트리스와 자주 다투는 카디스텔라도 순순히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떠오른 듯 흠칫 놀란 크로포드가 베아트리스의 의견에 가세하여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이어서 설명했다.
“베아트리스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주군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존재를 숨기기로 결정하셨고, 에고 돌을 이용한 기만책까지 설계해 두셨습니다. 주군의 부활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사망한 휴미안 병사들의 모습을 본떠 에고 돌들을 제작해 에스테로난에 파견하고, 주군의 부활 저지에 성공했다는 가짜 보고를 전달한다는 계획입니다!”
“역시 주인님이시군요. 헤스티니아님 휘하의 마도 연구진들이 에고 돌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건 그 계획 때문이었겠군요. 이미 확실한 대책까지 설계해 두시다니, 그 깊은 심계에 탄복했습니다.”
“당연하잖아! 네로멜티아는 우리의 마왕이라구? 감히 루이나의 여신과 지혜를 겨룰 녀석이 있겠어? 아마 크로포드 네게 에고 돌의 계획을 알려준 것도, 지금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예견해서 알려준 거 아닐까?”
“존재를 감추려고 하시는 의도를 저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시기 위해서…?”
크로포드의 보고에 감탄하며 미소 짓는 베아트리스와 카디스텔라.
오히려 카디스텔라는 더 나아가 크로포드가 전해 들은 계획의 내용 역시 현재 직면한 문제를 미리 예견한 네로멜티아가 장치를 마련해 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크로포드가 에고 돌 계획을 들으면 네로멜티아가 존재를 감추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 나중에 케르디하크가 습격하더라도 네로멜티아 본인이 의도한 대로 크로포드가 자신의 존재를 감춰줄 것이라 여겼다는 것.
사실 네로멜티아의 에고 돌 계획은 자신의 부활을 감추려는 계책인 것은 맞았으나,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밀하게 상황을 예견하여 내어놓은 계획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이 어쩌다 보니 잘 맞물려 돌아가게 되었고, 간부들 사이에서는 네로멜티아가 모든 상황을 예측해서 최적의 계획을 설계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었다.
네로멜티아가 이 폭풍과도 같은 착각의 현장을 보았다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난색을 표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역시 주군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감격의 미소를 보이는 크로포드.
자신의 일인 양 의기양양해 하면서도 내심 자랑스러운 기색을 내비치고 있는 카디스텔라.
그리고 베아트리스는 고개를 숙이고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경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부끄러울 지경이군요. 저는 당장 직면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계산하다가 비로소 떠올린 일인데, 주인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예견하시고 그에 맞는 계획까지 진행하고 계셨다니……. 미천한 하인은 주인의 뜻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것 같습니다.”
“부끄러워하지 마! 네로멜티아의 뜻을 뒤늦게나마 알아낸 것만 해도 너는 대단해!”
“카디스텔라님…….”
카디스텔라는 베아트리스를 위로하고 오히려 칭찬해 주기까지 했다.
서로 앙숙같이 다투던 모습은 사라졌고, 마왕을 향한 존경으로 인해 우정이 생기는 훈훈한 모습까지 연출되고 있었다.
헤스티니아는 이 모든 상황이 무척이나 재미있어서 입을 가린 채,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과도한 오해와 착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으나, 몹시 재미있으니 굳이 정정하지 않고 현실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
“케르디하크는 주인님의 존재 유무를 파악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파악이 완료될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셈이겠지만, 시간을 오래 끌을 수는 없습니다. 주인님의 존재가 파악이 안 되는 상황이 길게 이어지면, 그건 곧 주인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 되어버리니까요. 드래곤이 마왕성에 나타났는데 마왕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그런 의미입니다.”
차분히 상황을 정리한 베아트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케르디하크를 향해 전의를 불태우면서도 긴장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던 오크군을 향해 시선을 돌린 것이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전투에서 이탈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전력의 이동을 최소화하며 방어에 성공해야 하고, 적이 우리의 전략을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행해야 합니다. 카디스텔라님과 크로포드님께서는 케르디하크와 길게 대화를 하셨기에, 두 분이 전장을 이탈하신다면 케르디하크는 우리에게 다른 계책이 있는 것인지 의심할 것입니다. 그건 현재 케르디하크의 관심을 돌리고 계신 러스테리아님도 마찬가지시겠죠.”
“아아…….”
“그렇기에 가장 덜 이목을 끈 제가 카보니 숲으로 가야 합니다. 간부들 중에 저 하나 빠지는 건 티도 나지 않을 것이고, 눈치를 챈다 해도 주민들의 대피를 도우러 간 거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크림슨 캐슬의 등장으로 주민들이 이미 예전에 대피했다는 걸 케르디하크는 모르고 있을 테니까요. 무엇보다 케르디하크는 저와 마주친 경험이 전무합니다. 저는 늘 주인님의 거처에서 시중을 들뿐, 대외적인 활동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아마 조금 강할 뿐인 메이드 정도로 치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케르디하크의 오만한 성격상 저를 경계할 확률은 극히 적을 테니, 제가 전장을 이탈해야 티가 나지 않습니다.”
베아트리스는 철저하게 상황을 분석하며 도출한 정보를 토대로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만한 계획을 설계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이견이 없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베아트리스님 혼자서 카보니 숲을 지키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오크군과 함께 갈 겁니다. 드래곤을 상대로 오크군은 힘을 쓸 수 없으니 이들이 전장을 이탈한다 할지라도 케르디하크는 불필요한 희생을 막기 위해 당연한 선택을 하는 거라고 여기겠지요.”
베아트리스는 넬라넬라를 바라보았다.
주먹을 꼭 쥐고서 임전 태세의 마음가짐을 보이고 있었던 넬라넬라.
베아트리스가 넬라넬라에게 건네는 시선에는 신뢰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카보니 숲을 공격하는 이들이 현재로서는 불명일지라도, 휴미안의 군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른 드래곤이 협력하고 있다는 상황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휴미안군은 반드시 올겁니다. 천 년 전에도 휴미안과 합세한 케르디하크이니까요. 그렇게 된다면 오크군도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는 오크군과 함께 가겠습니다. 드래곤을 상대로는 힘들더라도 같은 군대와의 전쟁은 그들의 전문 분야니까요.”
케르디하크는 슬슬 인내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사실 러스테리아가 떠드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던 케르디하크는 러스테리아의 뒤에서 마왕군 간부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었다.
분명 무슨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는데, 그렇다고 다짜고짜 공격을 할 수는 없어 러스테리아 하나에게 발이 묶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간부들을 공격하는 일에 정신이 팔린 사이 마왕이 기습을 한다면 자신은 치명상을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단번에 죽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마왕이 부활에 성공했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거라면 분명 숨어서 틈을 노리고 있는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케르디하크의 머릿속 생각의 추는 점차 한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 대치하고 있는데도 마왕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사실 마왕은 부활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지금 눈에 들어오고 있는 마왕성의 재건 상황은 숨어 지내는 가혹한 삶에 지친 나약한 존재들이 서로 규합해서 독자적으로 벌인 일이 아닐까.
마왕이라는 존재 대신 옛 마왕군 간부들이 구심점이 되어 반격을 꿈꾼 것은 아닐까.
그때 뒤에서 한창 대화를 나누던 카디스텔라가 러스테리아의 옆까지 걸어왔다.
“마지막으로 슈거 파우더도 중요해요! 새하얀 크림 위에 얹어지는 거라 티는 잘 안 나겠지만…”
한창 블루베리 파르페의 레시피가 막바지에 이르던 즈음, 러스테리아의 파르페 강의는 카디스텔라가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끝이 났다.
밝게 미소 지으며 열띤 강의를 했던 러스테리아는 카디스텔라의 손길에 감춰 두었던 피로감을 비로소 내비쳤다.
아무렇지도 않게 케르디하크를 무시하는 줄 알았던 러스테리아도 사실은 무척 긴장하고 있었고, 심력의 소모가 상당히 컸던 것이었다.
“수고했어, 러스테리아. 장하네.”
“헤헤헤…”
카디스텔라는 러스테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따뜻한 칭찬의 말을 건넸고, 러스테리아는 기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귀여운 미소를 보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러스테리아의 미소는 눈부시게 밝은 것이었다.
러스테리아를 향해 인자한 칭찬을 건넨 카디스텔라는 그녀를 뒤로 하고 더욱 앞으로 나아갔다.
케르디하크와 대치하고 있는 마왕군 중에서 가장 앞선 위치에 선 것이었다.
카디스텔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선홍빛 입술이 길게 늘어나며 그 틈으로 날카로운 흡혈귀의 치아가 가득 드러났다.
피가 연상되는 진홍빛 안광을 번뜩인 카디스텔라는 케르디하크를 향해 외쳤다.
“네가 기다리는 마왕은 없다! 마왕성의 재건은 내가 계획한 거니까!!”
순간 케르디하크의 왕관 모양을 지닌 한 쌍의 뿔에서 격렬하게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목적을 달성한 케르디하크는 더 이상 상황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케르디하크의 뿔에서 격렬한 전광(?光)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순간만을 절실하게 기다렸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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