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케르디하크의 분노 (2)
* * *
콰우우우우우!!
드래곤의 거대한 체구에서 쏟아져 나온 포효는 주변 일대의 대기를 뒤흔들며 나아갔다.
둔중하면서도 강렬한 진동의 물결은 지나가는 모든 생명체들의 심장을 진탕하고 폐부를 압박했다.
흉곽 전체가 울리고 고막이 찢어질 듯 요동쳤으며 딛고 있는 지면마저 가늘게 떨려오는 압도적인 권능.
먹이 사슬의 정점이라 일컬어지는 드래곤의 포효는 생물들이 가진 본능을 자극해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쿠허어어억!!!”
“카흐으윽!!!”
이미 평범한 주민들은 언더 바르커스로 피난을 간 후였기에 큰 참사는 막을 수 있었으나, 피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크군 병사의 일부가 호흡을 멈추고 뒤로 넘어가거나 힘겨운 신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쓰러진 것이었다.
베리베리는 그 모습에 엄한 불호령을 내리고 싶었으나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오크 최강의 검이라 칭송받는 넬라넬라와 호각이었던 베리베리.
넬라넬라와는 무장의 종류나 전법이 다를 뿐 그 역시 오크군 최강의 전사였고,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뼈를 깎는 단련을 쌓아온 것이었다.
그런 베리베리도 드래곤 피어에는 견디기가 버거워 인상이 찌푸려질 지경이었으니, 아무리 혹독한 훈련을 거친 정예병일지라도 일개 병사가 견디기에는 무척 힘겨운 공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부 몇몇의 병사들만이 쓰러졌을 뿐, 어떻게든 굳건히 버티며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병사들이 대다수라 오크군의 위용은 칭송받아야 마땅할 경지인 셈이었다.
“호오. 꽤 괜찮은 벌레들이 아닌가. 깨끗이 정리될 줄 알았건만.”
케르디하크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분노에 차올라 내지른 포효였으나, 그가 예상했던 결과와는 판이하게 다른 현실을 보고 나름대로 흥미가 오른 것이었다.
본래 드래곤 피어는 종족을 불문하고 인족이라면 누구든 거품을 물고 기절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나약한 이들에게 가해지면 피를 쏟고 쓰러져 경련하다가 숨이 멎는 경우도 상당했다.
날아가는 그리폰도 추락시키고 거대한 자라탄(Zaratan)도 심해 깊은 곳까지 줄행랑을 치게 만드는 드래곤의 포효는 창조주가 그들 종족에게 부여한 본질의 권능이었다.
고작 오크들 주제에 자신의 압도적인 권능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고 버티고 있다 생각하니 흥미가 돋은 것이었다.
그러나 케르디하크의 감탄은 그저 밟아도 죽지 않고 돌아다니는 개미들을 발견한 정도의 놀라움 뿐이었으니 필사적으로 버텨낸 오크들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달가운 반응은 아니었다.
“졸렬한 도마뱀 같으니. 약한 애들 상대로 저러면 좋을까 몰라.”
“어설프게 힘이 있는 자들이 주로 약한 이들을 괴롭히며 자존감을 채운다고 하더군요.”
“아하하하하! 그거 맞는 말이네!”
드래곤 피어를 받고도 그다지 타격을 받지 않은 강자들 역시 존재했다.
카디스텔라와 베아트리스, 헤스티니아 그리고 크로포드.
이들 같은 절대적인 강자들에게 드래곤 피어는 그저 조금 시끄러울 뿐인 고함에 지나지 않았기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주변의 다른 간부들보다 약한 입장이었던 넬라넬라조차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조금 숙였을 뿐, 자신의 귀를 막기보다 러스테리아의 귀를 대신 막아주는 여유로움까지 있었고 러스테리아 또한 넬라넬라의 손을 꼬옥 잡은 채 미간을 좁히는 정도의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존재하는 강자들의 입장에서는 서로 사소한 대화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카디스텔라의 비아냥에 베아트리스가 차분한 기색으로 동조하며 말을 보태니 케르디하크가 환장할 법한 대화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여유로운 대화가 조금 흥이 올랐던 케르디하크의 기분을 다시 시궁창에 처박았다.
“이런 건 그저 인사 대신이다!”
“인사 대신 좋아하시네. 진심으로 오크 애들 싹 다 쓰러트릴 셈이었으면서.”
“감히 나를 뭐로 보고!!!”
또다시 케르디하크의 약을 올려대는 카디스텔라.
실실 웃으며 케르디하크를 놀려대던 카디스텔라의 뒤로 베아트리스가 다가와 은밀히 속삭였다.
“저는 이 전투에서 이탈하겠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케르디하크가 눈치채지 못하게 카디스텔라의 등 뒤에서 은밀히 전하는 베아트리스의 속삭임.
케르디하크에게 대화가 들키지 않도록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모습 그대로 입술만을 작게 달싹거려 전하는 카디스텔라의 속삭임.
이 은밀한 대화는 당사자들과 주변의 동료들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음성을 통해 진행되고 있었다.
“케르디하크가 혼자 찾아왔을 리가 없습니다. 혹여 주인님께서 계실 것도 염려해 두었을 것이니 분명 다른 수작을 준비해 두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주인님 한 분도 감당하지 못해서 용사 일행을 먼저 앞세웠던 자이니 마왕과 간부들 전체를 홀로 상대할 배짱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네로멜티아가 없다는 걸 알고 온 건 아닐까?”
“그랬다면 지금처럼 말이나 주고받으며 화를 내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주인님께서 복귀하시기 전에 마왕성을 초토화시킬 수 있도록 즉시 공격했겠죠. 저자는 아직까지도 눈치를 보고 있는 겁니다. 이 장소에 주인님께서 계시는지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제대로 공격하지 않을 셈입니다.”
베아트리스의 추측은 주변 모든 이들이 생각은커녕 가늠하지도 못한 방향의 새로운 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베아트리스의 추측은 반론의 여지가 전혀 없을 정도로 정확해 보였다.
“그럼 네가 추측하는 케르디하크의 수작질이란 뭔데?”
“… 동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친다. 이 상황에서는 북에서 소리를 내고 남쪽을 친다고 봐야겠지요. 휴미안군이든 다른 드래곤이든 어떠한 조력자를 두고 다른 장소를 공격할 셈일 겁니다.”
“설마…!”
베아트리스의 이야기를 이해한 넬라넬라가 사색이 되었다.
추측이 맞다면 케르디하크의 목표는 카보니 숲의 멸망인 셈이었다.
자신의 고향이 표적이라는 말에 넬라넬라는 마음이 무척이나 다급해졌고, 러스테리아의 어깨를 짚고 있었던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양측을 모두를 지키기 위해 마왕군의 전력이 분열될 수밖에 없고, 간부들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전투의 승패에 관계없이 우리는 지상의 모든 기반을 잃게 되겠죠.”
“그럼 폐하께서 복귀하신다고 선언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 반대입니다. 주인님의 복귀는커녕 주인님의 부활 자체를 들켜선 안 됩니다. 적들은 주인님의 존재 자체를 불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케르디하크도 눈치만 살필 뿐 쉽사리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 상황에서 주인님의 존재를 드러낸다면 드래곤 뿐만이 아니라 12신들 역시 적으로 돌려야 할 겁니다.”
휴미안에게 신탁을 내리고 용사를 만들어 마왕을 친 신들이 마왕의 부활을 눈치채게 된다면 이후 벌어질 사태는 일목요연한 것이었다.
마왕의 복수를 두려워하는 신들이 다시 한번 마왕을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었고, 제대로 된 방위 대책은커녕 재건의 기반조차 다 이루어지지 않은 마왕성은 신들의 공세를 버텨낼 재간이 전혀 없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왕의 존재를 들키는 사태는 되도록 미루는 것이 합당한 상황인 것이었다.
“러스테리아. 저 도마뱀한테 아무 얘기나 하면서 시간 벌어. 회의할 시간이 필요해.”
“에에. 제가 할 수 있는 거예요? 자신이 없는데…….”
“걱정하지 마. 네로멜티아의 유무가 확실해질 때까지 저 녀석은 결코 움직이지 않을 거야. 오히려 우리의 발을 묶어두고 있으면 카보니 숲을 수월하게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더 달가워할걸?”
카디스텔라의 지시에 자신이 없던 러스테리아는 자신의 보드라운 뺨을 한 번 두드리며 의지를 다졌다.
애써 자신감을 채운 러스테리아는 당당한 모습으로 케르디하크를 향해 몇 걸음 나아갔다.
잠시의 침묵을 깨고 자신의 앞으로 나서는 서큐버스를 발견한 케르디하크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빛에 이채가 감돌고 있었다.
“흠흠! 안녕하세요! 저는 러스테리아 서비 아브노아라고 합니다!”
“… 그래. 그 마왕년의 꽁무니 따라 다니던 어린 서큐버스. 기억하고 있지. 익숙한 벌레들이 참 많이도 모였구나. 진정 마왕년이 부활이라도 한 것이냐?”
러스테리아는 차분히 호흡을 한 번 가다듬었다.
이것이 무언가를 말하기에 앞서 행하는 준비과정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명백한 행동이었기에, 케르디하크는 러스테리아가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앞서 나왔는지 궁금해져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더 나아가 여유로운 모습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내심 마왕의 유무를 속히 판단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이었던 케르디하크는 전혀 관심은 없으나 그냥 지나가듯이 묻는다는 형태로 마왕의 부활을 언급한 것이었다.
이에 러스테리아는 굳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만 집중하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케르디하크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보았던 러스테리아는 무척이나 심약하고 힘없는 존재였으며 순진하기까지 했으니, 일단 대화가 시작되기만 하면 러스테리아 하나 요리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상관없이 어떻게든 교묘하게 대화를 주도하여 원하는 답을 이끌어 낼 자신이 있는 것이었다.
케르디하크는 러스테리아를 교묘한 혓바닥으로 휘두르기 위해 다소 다정한 말투를 가장하며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이거야 원, 화가 많이 나서 그런지 내가 말이 과했구나. 내 말이 거칠었다면 사과하마. 그래, 우리 서큐버스 아가씨는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나왔지?”
러스테리아는 갑자기 다정해진 케르디하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음성은 무척이나 따뜻했지만 표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드래곤의 안면은 감정의 형태를 가리는 가면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시커먼 속셈은 무척이나 간교(??)하고 음흉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러스테리아는 케르디하크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이후 러스테리아의 부드러운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이야기는 케르디하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들었다.
“지금부터 블루베리 파르페(Parfait)의 레시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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