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드워프 조사대 구출 (1)
* * *
카디스텔라가 마왕성에 나타나기 한 시간 전.
네로멜티아는 자신의 거처에서 정무를 보고 있었다.
카보니 숲과 그 주변 일대의 개발 계획에 관련된 서류만 한 무더기로 두 개의 산을 쌓았고, 마왕성 재건 계획에 대한 정기 보고와 관리에 대한 서류가 또 한 무더기로 탑을 한 층 쌓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채 끊임없이 펜을 놀리던 네로멜티아는 너무나 압도적인 업무 분량에 현실 감각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이래서야 비축해 놨던 종이도 다 써버리겠는데……. 종이 생산 라인도 구축해야 하는 걸까… 후후후후…….”
현재 마왕성에서 사용하는 종이는 모두 네로멜티아의 디멘셔널 스토리지에 비축된 것들이었다.
언제 어떤 장소에 가더라도 모자란 것이 없게끔 온갖 물건을 비축해 두었던 네로멜티아.
천 년 전 그녀의 준비성이 오늘날 빛을 발하는 경우는 상당히 많은 것이었다.
소중한 이들에게 간혹 내어놓는 맛있는 식사와 디저트.
헤스티니아 휘하의 마도 연구소에서 교재로 사용하는 마법서들.
생산이 소비를 못 따라가는 인기 생필품인 비누.
그리고 목재가 모자라는 현실에 제작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인 종이.
사실 종이는 십 층짜리 성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비축되어 있었으나, 매일 이런식으로 서류가 쌓이다가는 그 방대한 양의 종이도 금방 동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에에, 마왕님. 계신가요오?”
“응. 계시지.”
모습은 비추지 않고 밖에서 목소리만 흘러들어왔으나, 끈적하고 나긋한 음성이 무척이나 도드라지는 이유로 목소리의 주인을 첫 마디에 알아챌 수 있었다.
네로멜티아는 다른 이들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는 건성인 태도를 보이며 대답도 대충할 뿐, 시선은 오로지 서류에만 가 있었다.
“저도 좀 반겨주시지 그러세요. 비서관님 오시면 그렇게나 달콤하시면서.”
“… 조금이라도 호감을 보여주면 바로 눈이 돌아서 침대로 끌고 가려고 드는 에로 마녀에게 무슨 꼴을 당하려고…….”
네로멜티아의 거처에 들어선 것은 헤스티니아였다.
이미 상대의 정체를 음성만으로 파악했던 네로멜티아는 애써 시선조차 주지 않으려는 모습이었고, 헤스티니아는 그런 마왕이 야속하다는 듯 러스테리아를 언급하며 환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네로멜티아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헤스티니아를 애써 무시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헤스티니아는 네로멜티아의 냉대가 불만스럽다는 듯 표정을 구기다가, 살며시 네로멜티아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바라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서류만을 바라보고 있는 네로멜티아의 모습을 확인하자, 헤스티니아의 시선은 네로멜티아의 눈에서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선홍빛의 매끄러운 입술.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지는 뺨.
가늘고 고운 굴곡의 목선.
날이 선 듯 선명한 쇄골.
종착지는 여체의 농염한 매력이 흠뻑 느껴지는 젖가슴이었다.
보기만 해도 따뜻한 체온과 달콤한 살 내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직접 만져보지 않아도 그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 시각을 통해 느껴졌다.
이따금 다음 서류를 집기 위해 상체를 움직일 때면 도톰하게 오른 윗가슴에 매혹적인 파문이 출렁이는 것이었다.
“이러니까 너를 경계할 수밖에 없는 거야.”
“히끅!”
너무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헤스티니아가 네로멜티아의 가슴에 모든 정신과 시선을 빼앗긴 동안, 네로멜티아는 어느새 헤스티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마녀에게 미간을 좁히며 완곡한 제지를 하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차분하고 조용하게 경고를 한 셈이었으나, 젖가슴에 푹 빠져서 넋을 놓고 있던 헤스티니아는 화들짝 놀라 버렸다.
“놀래라…….”
“내가 더 놀랐다. 갑자기 아무 말도 없길래 이상해서 봤더니 남의 가슴이나 뚫어져라 쳐다보고.”
“에에, 마왕님도 여자들 가슴 맨날 훔쳐보시잖아요.”
“이익!! 나는 그렇게 대놓고는 안 봐!!!”
“에이, 며칠 전에도 공사 현장 시찰하신다고 나오셔서 넬라넬라님 가슴하고 엉덩이만 감상하시는 거 다 봤는걸요?”
“너… 진짜…….”
“그 전날 언더 바르커스 온천에서 다 같이 목욕할 때는 러스테리아님이 베아트리스님한테 안기는 거 보시고 무척 흐뭇해하셨죠? 가슴 두 개가 서로를 막 누르고 비비고 그러니까…”
“너 나 스토킹하냐!!?”
여성의 가슴을 훔쳐보기 좋아하는 두 여성의 대화.
서로 주고받는 설전은 네로멜티아가 발끈하며 끝이 났다.
헤스티니아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비하당하든 상관이 없다는 식이었고, 단지 네로멜티아를 자신과 같은 급으로 떨어뜨리려 할 뿐이었다.
반면 네로멜티아는 헤스티니아의 행동을 지적하며 시작했으나 이어지는 폭로전에 연달아 타격을 받으며 말을 잊기까지 했다.
결국 지킬 것이 많은 자는 지킬 것이 없는 자를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후후후후. 마왕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니까요? 무척 즐거워요.”
“… 그럼 좀 평범한 대화를 해…….”
마치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눈 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러워하는 헤스티니아.
네로멜티아는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많았으나, 상당 부분을 포기하고 그저 한숨을 지을 뿐이었다.
그나마 흘린 짧은 한마디는 네로멜티아의 간절한 소망이 깃든 것이었다.
헤스티니아는 네로멜티아의 축 처진 반응이 귀엽다는 듯 잔잔한 미소를 짓다가 비로소 대화의 본론으로 진입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남은 즐거움은 다음을 기약하지요. 마왕님께 급히 전해드릴 소식이 있거든요.”
“… 급히 전할 소식치고는 너무 늦게 이야기하는 거 아니야?”
무척이나 아쉽다는 듯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헤스티니아.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깃털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네로멜티아에게 다가갈 뿐, 네로멜티아의 당연한 지적에 굳이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네로멜티아는 헤스티니아와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짙은 장미 향기가 후각을 온통 사로잡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이 짙은 향수 향기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저마다의 황홀한 감상을 늘어놓았을 테지만, 네로멜티아에게는 무척 익숙한 터라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헤스티니아는 번번이 향수를 바꾸기 때문에 향기 자체가 익숙한 것은 아니었고, 짙은 향수 자체에 익숙할 뿐이었다.
언제나 무언가를 연구하곤 하는 마녀다 보니 약품을 만질 일도 많아서, 온갖 약품의 퀴퀴한 냄새가 몸에 밸 때가 많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독한 약품 냄새를 지우고자 향수를 많이 뿌릴 뿐인 것이었다.
네로멜티아가 속으로 향수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고 있었던 짧은 순간, 헤스티니아는 네로멜티아의 앞에 다가와 부채를 펼쳤다.
앉아있는 네로멜티아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혹여 누가 엿들을세라 부채로 측면을 가린 채 은밀히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었다.
“드워프들이 휴미안들에게 쫓기고 있어요.”
“뭐, 뭐?”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소식에 네로멜티아는 제대로 된 질문도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잔뜩 헝클어진 느낌으로 갖가지 의문들이 휘몰아치며 두서없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드워프들은 지난 몇백 년 동안은 광산 도시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 하지 않았어?”
“어머, 기억하시네요?”
“이제 와서 드워프들이 밖으로 나왔다는 거야? 아니면 휴미안들에게 이제 와서 광산 위치가 발각됐다는 거야?”
이유야 어찌 되었든 무척이나 다급한 이야기였다.
휴미안들에게 사로잡힌 이들의 말로는 언제나 비극이었고, 때로는 사로잡히기 전에 즉결 처형 당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사로잡힌 경우라면 조금 머리 아프긴 하더라도 늦지 않게 구출하면 될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죽어버리면 손 쓸 수 없게 되는 셈이었다.
“아무래도 태고의 숲을 지키던 결계가 해제된 것이 원인인 것 같아요. 드워프들이 종종 초소형 비행 골렘을 광산 밖으로 띄워서 주변을 살피곤 했었거든요. 죽은 나무만 가득했던 황폐한 숲이 어느새 대자연의 숲으로 변해 버렸으니 그들로서는 조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그런 중요한 건 미리미리 좀 말해줘…….”
“드워프들이 초소형 비행 골렘을 개발했다는 거요?”
“아니, 드워프들이 종종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는 거! 그걸 미리 알았으면 진작 대비했겠지!”
드워프들이 주변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분명 네로멜티아는 그에 맞는 대비를 했을 것이었다.
드워프들의 도시, 맥켄지 광산(Mackenzie Mine).
그 은밀하고도 광활한 지하 세계는 지도에서 본다면 태고의 숲과 그리 멀지 않은 남쪽에 위치한 장소였으나, 실제로는 며칠을 비행해야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먼 곳이었다.
그렇기에 네로멜티아 자신이 직접 찾아가지 않는 이상 드워프들은 광산 밖으로 나올 일이 없을 것이고, 그동안은 계속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드워프들이 이 먼 거리의 상황을 꾸준히 정찰하고 있었다는 건 예상 밖의 변수였다.
그들이 거주하는 맥켄지 광산이 어떤 생활 여건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멸망이 가득한 세상에 대자연이 살아 숨 쉬는 숲을 발견한다면 탐내지 않을 자가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카보니 숲과 태고의 숲 인근 평원에는 대규모의 좀비 무리가 있고, 그것들을 막아내기 위한 휴미안의 장벽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혹여 이 대규모의 언데드 무리가 자신들의 영토로 넘어오지는 않을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을 휴미안인데 그 앞에서 드워프들이 조사를 한답시고 얼쩡거린다면 당연히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네로멜티아는 허공에 손을 한 번 휘저었다.
“크로포드. 바쁜가?”
“아, 주군! 하명하십시오!”
네로멜티아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나타난 원형의 공간.
그 원형의 공간 안으로 업무에 바쁜 크로포드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다.
서로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도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할 수 있는 통신 마법, 리모트 컨버세이션(Remote Conversation)이 시전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통신 마법에 크로포드는 조금 놀라긴 했으나, 그에게 이 마법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기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 바로 드워프들을 찾으러 남하할 것이다. 급한 일이니 설명은 나중에 하마. 내가 없는 동안 경계에 각별히 신경 쓰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정확하고 간결하게 정보와 임무를 전달한 뒤, 네로멜티아는 리모트 컨버세이션을 해제했다.
그리고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네로멜티아는 헤스티니아에게도 지시 사항을 건넸다.
“나는 부활한 이래로 맥켄지 광산에 가 본 적이 없으니까, 네가 날 이동시켜 줘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단숨에 먼 거리의 장소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공간 이동 마법이 필수였다.
물론 네로멜티아 역시 공간 이동 마법은 사용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지리적 정보의 부재였다.
평지인 줄 알고 해당 위치로 이동했는데, 자신이 모르던 사이 바위 같은 것이 세워졌다면 해당 물체와 하나가 되는 대참사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물론 공간 이동 마법이 시전되면 해당 위치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을 밀어내는 마력 파장이 생기기에 먼지나 낙엽, 벌레, 작은 새 같은 사소한 것들은 버티지 못하고 떠밀려 제거된다.
심지어는 물속으로 이동하더라도 수압에 따라서는 물을 밀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위나 나무같이 마력 파장으로 밀어낼 수 없는 물체가 존재한다면 그대로 신체와 해당 물체가 하나로 합쳐지는 대참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마왕 정도 되는 존재라면 신체가 어느 정도 붕괴될 뿐 죽지 않고 충분히 재생할 수 있지만, 이렇게 약해진 틈을 타서 습격을 받는다면 또다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물론 두 공간을 잇는 통로를 생성하는 마법인 ‘게이트(Gate)’를 사용하면 그런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이 역시 주변에 어떤 적이나 재난이 있을지 미지수이기에 되도록 주변 지리를 잘 아는 이가 시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었다.
“후후. 편히 모시겠습니다, 손님.”
쩌어엉!!!
순간 크고 두꺼운 유리가 깨지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헤스티니아가 허공에 무언가를 두드리듯 부채를 휘둘렀고, 부채가 휘둘러진 부분의 공간이 깨져나간 것이었다.
뭔가 이름이 존재하는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마력을 둘러 공간을 두드렸을 뿐이었으나, 해당 공간이 깨지며 차원의 틈이 생성된 것이었다.
차원과 공간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존재가 헤스티니아였고, 12신들도 확신을 가지고 오가지 못하는 차원 이동을 가볍게 나들이하는 수준으로 해낼 정도이니 실로 인지를 벗어난 존재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쫓기고 있는 드워프들 앞으로 통로를 열어 두었어요. 잘 따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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