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깡통과 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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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선혈의 여제, 카디스텔라 문 나이트.
그녀의 강대한 권능은 따로 발현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인지할 수 있을 만큼 확고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분명 카디스텔라는 절대자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고, 불특정 다수가 신격화한다 할지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존재였다.
실제로 크림슨 캐슬의 망자들은 그녀를 추앙하며 하나의 종교와 같이 그녀를 모시고 있었고, 그들이 카디스텔라에게 가진 신앙은 그들의 지극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넬라넬라는 새롭게 나타난 인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도록 천천히 다가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왕군 소속 공병대장 넬라넬라입니다.”
“반가워. 나는 크림슨 캐슬의 성주이자 뱀파이어들의 지배자. 퍼스트 블러드, 오리진 뱀파이어, 블러드 엠프레스.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카디스텔라라고 불러주면 고맙겠어.”
첫인사에서부터 그녀가 지닌 드높은 긍지가 느껴졌다.
하나같이 찬연한 위엄이 존재하는 이름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그것을 오만이라 부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고, 카디스텔라 그 자체를 이르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저… 그럼 카디스텔라님. 마왕 폐하를 찾아오신 게 맞습니까?”
“맞아. 나는 마왕의 벗이니까. 진작 마왕성에 합류했어야 했지만,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서 늦었을 뿐이지. 이제는 다 해결이 되었으니까 지체 없이 찾아온 거고.”
“그런데… 이 성은 어떻게…….”
넬라넬라로서는 처음 마주하는 존재였기에, 거짓을 이용한 적의 기만책일수도 있다는 의심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토록 강대한 존재가 마왕이 도착하기만 하면 바로 탄로 날 거짓말을 굳이 꾸며야 할 이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러스테리아가 무척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마왕의 벗’이라는 카디스텔라의 주장은 상당한 신빙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전능한 마왕의 벗이라면 마왕성의 일원이 틀림없는 것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카디스텔라님! 너무너무 반가워요!!”
“오, 러스테리아. 잘 지내고 있었어? 여전히 귀엽구나. 착하다, 착해.”
“헤헤.”
카디스텔라를 반갑게 맞이하는 러스테리아.
강아지가 꼬리를 치며 반기는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깊은 친애를 담아 카디스텔라에게 안겼다.
카디스텔라는 자신을 살갑게 반기는 러스테리아를 쓰다듬으면서 칭찬을 해 주었고, 러스테리아는 카디스텔라의 부드러운 손길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너무 소식이 없으셔서 휴미안에게 당하신 줄 알았습니다.”
“너는 여전히 밉상이구나, 깡통 메이드.”
정체불명의 굉음으로 인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식당의 상황을 정리한 뒤, 뒤늦게 나타난 베아트리스.
베아트리스는 도착하자마자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카디스텔라를 자극했다.
걱정을 빙자한 도발을 건넨 것이었다.
무려 스스로의 의지로 죽음을 딛고 일어선 퍼스트 블러드이자, 피의 계보를 이룬 오리진 뱀파이어에게 휴미안을 언급하며 건네는 걱정의 말.
전능한 존재에게는 심히 거슬리는 모욕이었고, 드높은 권능을 낮잡아보는 폄하와 다르지 않았다.
카디스텔라는 첫마디부터 은근히 속을 긁어오는 베아트리스에게 깡통을 언급하며 응수했다.
기계장치로 구성된 에고 돌을 고철 취급하며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디스텔라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자 콤플렉스가 있었기에 결코 베아트리스를 이길 수 없었다.
“네, 모루 여제님도 여전히 평평하시군요.”
“네 가슴은 뭐가 달라!? 네 거는 코르니움과 인공세포로 제작된 인공 가슴이잖아! 뭘 잘난 체를 하고 있어!!”
“그래도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행복합니다. 후후후.”
“이이이이이이익!!!!!”
카디스텔라의 평평한 가슴을 모루에 빗대어 놀려버린 베아트리스.
전능한 존재로서의 여유를 유지하기 위해 베아트리스의 도발에도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썼던 카디스텔라는 모루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폭발해버렸다.
가슴이라는 건 카디스텔라에게 있어서 하나의 기폭제였고, 그녀를 도발하기에 이보다 좋은 수단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냉정을 유지하려 애를 쓰며 베아트리스의 가슴을 맞서 깎아내리려 했으나, 없는 것보다는 낫다며 오히려 비웃음을 흘려버리는 베아트리스의 역공에 분통이 터져버린 것이었다.
카디스텔라의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녀는 날카로운 손톱이 길게 뻗어지기 시작하는 모습마저 보일 정도로 격분하기 시작했다.
카디스텔라의 진홍빛 눈동자의 동공이 수축했고, 송곳니에 혈기가 돌아 그 끝이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당장에라도 전투에 들어갈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었고, 베아트리스 또한 이에 지지 않고 맞서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블러드 엠프레스와 킬링 머신이 당장에라도 부딪칠 기세로 대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멈추십시오!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실태(??)입니까!”
주변을 포위한 오크군을 헤치고 나타난 이는 크로포드였다.
대지를 뒤흔드는 굉음에 적습을 의심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섰던 크로포드는 무척이나 익숙한 고성의 등장을 목견했고, 이 사건의 원인이 카디스텔라임을 알 수 있었다.
적습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한 크로포드는 기겁하며 혼비백산하는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상황을 정리하다가 뒤늦게 나타난 것이었다.
“이 깡통이 나더러 모루라잖아! 인공세포로 만든 가슴 주제에!!”
크로포드의 강경한 제지에 뜨끔했던 카디스텔라는 위협적인 살기를 거두긴 했으나 여전히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강대한 능력, 테라리스의 망자들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권력까지.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뱀파이어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단 하나의 유일한 요소에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본래 샐러드에 여러 개 얹어진 스트로베리보다 케이크에 얹어진 단 한 개의 스트로베리가 훨씬 눈에 띄는 법이었다.
그리고 베아트리스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후후후. 주인님께서는 이 가슴을 무척 좋아하셨답니다.”
“…!!!”
은근한 조소와 함께 자신의 가슴을 주물러 보이며 과시하는 베아트리스.
단지 평범한 가슴이었다면 카디스텔라는 어떻게든 분노를 억누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베아트리스의 가슴은 네로멜티아나 러스테리아만큼 크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크고 풍만한 가슴에 속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어디 한 구석 모나거나 흐트러진 부분 없이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던 베아트리스의 가슴.
흠잡을 데 없는 각도와 곡선을 지녔기에 완성된 아름다움 그 자체였고, 이상적인 비율로 봉긋 솟아있어 보기만 해도 그 탐스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창조주가 빚어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 매력은 마도 공학자 로널드 거트만의 일생 역작이었다.
이런 완벽한 존재를 자신의 앞에서 주물러대며 약을 바짝 올리니 카디스텔라로서는 불이라도 토할 것만 같은 심정이 되는 것이었다.
급격히 터져 나오는 분기에 말문이 막혀 소리도 지르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크로포드는 난색을 표하며 러스테리아를 바라보았다.
헤모니겐트의 소드 마스터라는 이명을 지닌 강대한 크로포드라 할지라도 블러드 엠프레스와 킬링 머신을 동시에 말리기에는 역부족인 것이었다.
러스테리아가 도와준다면 어떻게든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을 테지만 마음 약한 러스테리아가 제대로 나서줄 수 있을지 걱정이 드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러스테리아는 두 존재의 싸움을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도록 하죠. 지금까지는 식당을 엉망으로 만든 것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습니다.”
“뭐어!? 난 하나도 안 끝났어!”
“마왕성에 도착하신 걸 환영합니다, 선혈의 여제님.”
지금까지 유지했던 얄미운 조소를 순식간에 지워낸 뒤, 일방적으로 싸움을 끝내 버린 베아트리스.
그녀의 도발과 자극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크림슨 캐슬이 등장하며 일으켜진 굉음과 대지의 진동.
그것에 의해 식당은 건물 전체가 뒤흔들렸고, 그 과정에서 식탁 위에 놓인 음식 여럿이 엎질러지고 바닥에 뒹굴게 된 것이었다.
예고도 없는 등장으로 소중한 음식을 못 쓰게 만들었으니, 식당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나름대로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
카디스텔라는 자기 마음대로 싸움을 끝내려는 베아트리스를 놓아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싸움을 거는 건 자유지만 먼저 걸어온 싸움을 멋대로 그만두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것이었다.
‘감히’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정도로 베아트리스는 일방적으로 싸움을 중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스가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을 하고서 정중한 인사와 함께 ‘선혈의 여제’라고 자신의 이명을 똑바로 불러주니, 여기서 더 물고 늘어졌다간 오히려 카디스텔라의 꼴이 우습게 되는 것이었다.
“하……. 그래. 내 성이 좀 요란하게 나타나서 식당이 어지럽혀졌다는 거지? 그거 참 미안하구나.”
“두 분은 정말 여전하십니다. 어떻게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대기 바쁘신지…….”
“그나저나 마왕은 어디 갔어? 내가 도착하고 시간이 꽤 지난 거 같은데 왜 아직도 모습이 안 보이는 거야?”
카디스텔라는 허무하고 어이없는 상황에 분노조차 차게 식어버렸기에 순순히 사과를 건네어 싸움의 끝을 맺었고, 크로포드는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과거의 기억에 얽힌 감상을 꺼냈다.
그리고 온 정신을 사로잡았던 사건이 마무리 지어지자 카디스텔라는 지난 시간 동안 가장 바라왔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짧은 재회를 이룬 뒤, 또다시 헤어져야만 했던 네로멜티아와 카디스텔라.
선혈의 여제는 마왕을 다시 만나기 위해 크림슨 캐슬이 직면한 난제를 속히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베아트리스의 조언 덕에 상당히 빠른 성과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조차 기다리기 벅찰 정도로 네로멜티아가 그리웠기에 이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아예 성 전체를 일순간에 옮겨 버리는 무지막지한 방법을 사용해가며 마왕성으로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러나 기꺼이 마중 나올 줄 알았던 네로멜티아가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도 보이지 않자, 카디스텔라의 마음은 초조해졌고 섭섭한 감정이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카디스텔라의 불만이 섞인 이야기에 크로포드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베아트리스나 러스테리아 그리고 넬라넬라 역시 의아함이 앞섰다.
네로멜티아의 성격이라면 순식간에 도착해서 자신의 벗을 환영했을 것이었다.
특히 미녀를 좋아하는 네로멜티아라면 신속히 달려와 카디스텔라를 꼭 끌어안아 주기까지 했을 것이 뻔한 상황인데, 네로멜티아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크로포드는 자신에게 모이기 시작하는 이목에 난처해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는 급히 드워프들을 찾으러 출발하셨습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함께 식사를 했던 네로멜티아가 아무런 언질도 없이 떠나 버렸다.
러스테리아와 베아트리스 그리고 넬라넬라는 멍한 표정으로 크로포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싶어 해명을 요구하는 무언의 요청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회하자마자 헤어져야만 했던 네로멜티아가 자신과 길이 엇갈려 서로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카디스텔라는 격분했다.
“네로멜티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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