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캐노피 침대와 곰돌이 인형 (2)
* * *
창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왕은 위엄있는 지배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무척이나 친근하고 애정이 묻어나 계급에 민감한 넬라넬라조차 마음이 편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신하된 자로서 해이해질 수 없다는 생각에 넬라넬라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제게… 하명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지고한 존재인 마왕이 특별한 용건이 있지 않은 이상 이런 깊은 밤에 자신을 찾아올 리 없다고 생각했던 넬라넬라.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넬라넬라의 예상과 다른 말을 건넸다.
“흐응. 분명 나는 보고 싶었냐고 물었는데?”
그저 인사 대신의 사소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말이었으나, 마왕은 넬라넬라의 답변을 바라고 진심으로 물어온 것이었다.
넬라넬라에게 있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게 만드는 이 사적인 질문은 무척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감추고 싶은 자신의 감정, 나아가 감춰야만 하는 금기의 감정.
그렇다고 마왕에게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기에 넬라넬라는 입을 벙긋거릴 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넬라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나 봐? 슬프다…….”
“아, 아닙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흐흥. 정말이야?”
무척이나 슬프다는 듯, 고개를 떨군 채 기운 없는 모습을 보였던 네로멜티아.
마왕이 갑작스럽게 실망감을 내비치자 당황한 넬라넬라는 자신도 모르게 진심을 말해 버렸다.
그러자 네로멜티아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또다시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넬라넬라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 그… 그게… 저…….”
이십 멘톨은 더 컸던 넬라넬라를 바라보다 보니 네로멜티아는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정중한 기립 자세에서 마왕을 내려 보아야 했던 넬라넬라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면적이 작은 홀터넥의 구조로 제작된 네로멜티아의 드레스 ‘나이트 일루전’은 그 형태에 걸맞은 과감한 노출도를 과시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다 감싸지 못할 정도로 큰 젖가슴 한 쌍과 그 사이의 부드러운 계곡.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고혹적인 광경에 넬라넬라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이었다.
“당연히 죽을 정도로 보고 싶었을 거야. 그러니까 늦은 밤에 귀빈실까지 찾아와서 엿본 거 아니겠어?”
“…!!!”
넬라넬라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몰래 엿보았다고 생각했건만 마왕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지고한 존재의 은밀한 밤을 엿본 신하는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이 그리 많지 않았다.
털썩!
넬라넬라는 이성이 허락하는 최고의 속도로 무릎을 꿇었다.
몇 번을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라고 생각했기에 변명을 입에 담을 생각은 없었으나, 적어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 사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여성의 성교를 훔쳐보아도 맞아 죽을 만큼의 파렴치한 일인데, 하물며 마왕의 성교를 훔쳐보았으니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무릎을 꿇은 넬라넬라가 고개를 조아리지 못하게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혼내려고 온 거 아니야.”
“하, 하지만…!!”
“괜찮다니까. 나는 넬라가 편히 있어 줬으면 좋겠는걸?”
네로멜티아의 음성은 무척이나 차분했고, 노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안했다.
오히려 자애가 흠뻑 배어나는 음성이었고, 미소에서는 인자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렇기에 크게 벌을 받더라도 당연할 것이라 여겼던 넬라넬라는 네로멜티아가 이끄는 대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사고가 반쯤 정지한 넬라넬라는 네로멜티아가 자신의 손을 잡고 이끌자, 홀린 듯 순순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네로멜티아가 이끈 장소는 넬라넬라의 귀여운 캐노피 침대였고, 두 여성은 침대에 걸터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조금 진정하도록 할까?”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미소를 보이던 네로멜티아는 허공에 손을 한 번 휘저었고, 그와 동시에 허공이 갈라지며 시커먼 암흑의 공간이 나타났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인위적인 차원의 공간을 생성해 창고로 삼는 마법 ‘디멘셔널 스토리지(Dimensional Storage)’였고, 이는 네로멜티아가 자신의 물건을 꺼낼 때마다 이용하는 마법이었기에 넬라넬라에게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네로멜티아는 차원의 공간 안에서 방금 끓인 것 같이 뜨거운 티포트와 티컵을 꺼냈고, 넬라넬라의 손에 티컵을 들려준 뒤 티포트를 기울여 차를 따라 주었다.
티컵에 차가 따라지며 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캐모마일의 향기가 혼란스럽던 정신을 편안하게 진정시켜 주었다.
“향이 좋지?”
“… 네……. 이렇게 훌륭한 차를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로멜티아가 내어준 캐모마일 차는 달콤한 사과의 향기가 선명히 연상될 정도의 특상품이었고, 차를 끓인 기술 역시 수준급이라 맛과 향이 정밀하게 조율되어 깊은 풍미를 과시하고 있었다.
한 모금을 머금었을 뿐인데도 긴장한 마음에 안락을 가져다주었고, 목으로 넘기자 찻물의 따스함이 신체의 피로마저 달래주는 느낌이었다.
“귀여운 곰돌이들이네? 테디 매디의 메르헨 베어 시리즈 레플리카 맞지?”
“… 네……. 역사서에서 봤던 것을 흉내내서 만들어 봤는데… 저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입니다만…….”
천 년 전 헤모니겐트가 건재했을 당시 유행했던 곰돌이 인형 시리즈, 메르헨 베어.
유명한 인형 장인 테디 매디의 인기 상품이었던 메르헨 베어는 역사서에 실릴 정도로 드높은 유명세를 구가하고 있었고, 남겨진 책들을 모조리 필사하여 새 책으로 제작해 대도서관을 설립한 베리베리에 의해 메르헨 베어 시리즈에 대한 정보 역시 후세에 남겨질 수 있었다.
넬라넬라는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하던 중 메르헨 베어 시리즈의 항목을 읽고, 그 앙증맞고 귀여운 삽화에 반해버려 스스로 인형을 만들어 소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니 무슨 말이야. 이 아이들 끌어안고 잠든 넬라의 모습을 떠올리면 무척이나 귀엽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읏…….”
사근사근하게 들려오는 네로멜티아의 음성.
속삭임과 다르지 않은 작은 음성이 귓가를 간질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더구나 누군가가 자신에게 진심을 담아 귀엽다고 이야기 해주는 건 더더욱 행복한 것이었다.
낯이 뜨겁게 상기된 넬라넬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돌려버렸다.
“이거 한 번 안아볼래?”
“이, 이건…”
넬라넬라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살짝 돌린 동안, 자신의 디멘셔널 스토리지에서 무언가를 꺼낸 네로멜티아.
그것은 침대 위에 놓인 곰인형들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빨간 하트 문양이 가득 수놓아진 파자마를 착용한 곰인형.
넬라넬라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가린 모습을 하여 너무나도 놀라버린 자신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테디 매디의 메르헨 베어 시리즈 오리지널. ‘No.27 파자마 슬리피 베어’. 나도 예전에 조금 모았었거든. 소중한 아이 하나가 이 시리즈를 너무 좋아해서.”
네로멜티아가 건네준 귀여운 인형을 받아든 넬라넬라는 홀린 듯 인형을 끌어안았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더 없을 고급품임을 증명하고 있었고, 철저한 재봉선과 완벽한 부속품이 장인의 손을 거쳐 제작되었음을 명시하고 있었다.
인형을 끌어안으며 보들보들한 표면을 쓰다듬자 기분 좋은 라벤더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잘 어울려. 진심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니까 선물로 주는 거야. 절대 빈말이 아니었어.”
“하으으…….”
천 년 전에 존재했던 실제 메르헨 베어 시리즈.
정확한 형태도 모르는 자신이 제작한 레플리카와는 차원이 다른 완성도를 과시하고 있는 진품.
그 귀중하고 소중한 물건을 선물로 주며 다시 한번 어울린다고 말해주는 마왕에게 넬라넬라는 점차 커져만 가는 고동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행복해하면서도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넬라넬라의 모습에 네로멜티아의 안면에는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넬라는 왜 그렇게 자신이 없는 거야?”
“…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름답다. 예쁘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무척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넬라는 항상 부정하잖아? 부끄러워하고. 당황하고.”
기습적으로 전해져 온 네로멜티아의 의문.
아픈 구석을 찌르는 마왕의 직설에 넬라넬라는 눈빛이 가라앉았다.
행복감이 어려 있었던 안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은연중에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는 모습이었으나 짙은 슬픔이 일말의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 저는 오크이지 않습니까…….”
“오크가 뭐 어때서?”
“그야… 다른 이들에게 몬스터 취급을 받는 종족이니…….”
넬라넬라의 이야기는 드문드문 끊기는 구석이 있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자신이 직접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겨운 일이었고, 넬라넬라는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자조(??)를 보였다.
순간 네로멜티아는 무척이나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감히 누가 그런 말을 했어?”
기세가 험악하게 변화한 마왕의 모습을 본 넬라넬라는 자신이 큰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싶어 무척이나 두려워졌다.
자신의 말 몇 마디에 마왕이 적대적인 감정을 품은 것이었다.
그것은 살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살벌한 것이었고, 넬라넬라는 자신으로 인해 무언가 사달이 날까 싶어 당혹스러웠다.
은밀한 밤의 시간을 엿본 넬라넬라에게도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웃어 주었던 자애로운 마왕이 진심으로 진노하는 모습은 더 큰 당혹감을 주는 것이었다.
“아, 아닙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아으… 제가 읽던 소설들에서…!!”
“… 소설…?”
점차 살기가 더해지며 주변의 공기를 차갑고 싸늘하게 만들었던 네로멜티아.
보는 이로 하여금 누구나 두려움에 떨게 만들 정도였던 네로멜티아의 기세가 급격히 누그러졌다.
그러나 아직은 설명이 모자란 상황이었기에, 넬라넬라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아야만 했다.
자신이 즐겨 읽던 소설과 그 안에서 묘사되던 오크의 모습.
오크는 항상 침략과 습격을 밥 먹듯이 하는 몬스터였다는 이야기.
살인, 방화, 약탈, 강간 그리고 잔혹한 전쟁을 일삼는 악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오크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언제나 ‘녹색의 피부와 거구를 지닌 흉측한’ 따위의 수식어가 따라다녔다는 이야기.
그 어떤 소설도 오크가 주인공이었던 경우는 없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대다수의 다른 종족분들이 보시기에… 저는 무척 흉한 존재가 아닌가 하고…….”
넬라넬라의 긴 이야기를 들으며 네로멜티아는 점차 여유로운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마치 별 것 아닌 문제라는 듯 담담하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오히려 소설의 주제에 대해 다소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을 뿐, 오크에 대한 문제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모두 끝마친 넬라넬라에게 네로멜티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넬라는 로맨스 소설을 좋아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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