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넬라넬라의 고민 (2)
* * *
마왕성의 재건 공사로 인해 느슨한 훈련과 편한 경비 임무가 필연이었던 나날.
그로 인해 해이해진 병사들의 분위기가 오늘의 훈련으로 단단히 조여지고 있었다.
넬라넬라의 호령에 따라 시작된 모의전은 병사들에게 각자가 가진 수단 전부를 내어놓게 만들고도, 새로운 수단을 찾아야 할 정도로 몰아세우는 엄격함이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눈빛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면의 전의를 불태우며, 자신을 몰아세워 새로운 대책을 구상하는 것이었다.
모의전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 역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저마다 가슴 깊은 곳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걸? 오히려 블랙 나이트에게 본받으라고 해야 할 판이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마왕 친위대인 블랙 나이트와 비교하시다니요. 오히려 요새들어 병영의 분위기가 많이 해이해진 것 같아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느끼는 거지만, 넬라도 대단해. 평소의 점잖고 차분한 모습과는 딴판이잖아? 병사들의 사기를 순식간에 향상시켰어. 힘든 훈련인데도 오히려 다들 전의를 불태우고 있고 말이야.”
“분위기를 잘 타는 아이라 그런 거지요. 다 큰 녀석이 요즘도 저와 단둘이 있으면 어리광을 부리곤 한답니다.”
“하윽!! 보고 싶다!! 넬라가 어리광부리는 모습!!!”
훈훈한 담소를 나누던 네로멜티아와 베리베리.
이들은 현재 성벽의 위에서 연무장을 내려다보며 오크군의 훈련을 감상하고 있었다.
오크군을 칭찬하는 마왕과 겸손하게 부정하는 영주.
넬라넬라를 칭찬하는 마왕과 겸손하게 화제를 전환하는 영주.
그리고 체통을 무시한 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빠져드는 마왕.
스토니 포트리스에 마왕이 방문했다는 보고를 받은 베리베리는 모든 정무를 미뤄둔 채, 마왕을 맞이하러 달려나갔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마왕의 존재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기에 일말의 고민 없이 마왕을 영접한 것이었고, 현재 베리베리는 자신의 선택에 무척이나 흡족해하고 있었다.
네로멜티아는 베리베리와의 대화를 기꺼이 즐기고 있었고, 넬라넬라가 이끄는 모의전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주인님! 여기 가져왔어요!”
“잘했어, 러스! 역시 내 비서는 러스밖에 없어.”
“에헤헤…….”
러스테리아가 카보니 숲과 주변 일대를 그린 지도를 가져왔다.
그저 네로멜티아가 작성해 자신의 집무실 책상 위에 둔 것을 그대로 들고 왔을 뿐이지만, 네로멜티아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녀의 머리를 힘껏 쓰다듬으며 끌어안아 주기까지 했다.
주인의 과한 애정이 불편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없이 행복했던 러스테리아는 주인의 품에 머리를 파묻고 뺨을 비벼댔다.
하트 모양의 첨단이 인상적인 그녀의 악마 꼬리는 좌우로 힘껏 흔들어지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보는 것 같아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지난날 주고받지 못했던 애정을 모두 충당하겠다는 듯, 마왕과 서큐버스는 서로에게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을 멈추지 않았다.
베리베리는 둘의 애정 행각이 싫기는커녕 오히려 흡족하고 귀엽게 느껴지는 까닭에 ‘허허허’ 웃으며 사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나, ‘분명 지도를 가져오게 지시하셨다면 지도에 얽힌 본론이 있으셨을 텐데.’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어 그의 미소는 무척이나 복잡미묘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상! 수고 많았다! 청결 또한 건강으로 귀결되니, 반드시 몸을 씻어 전력 유지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하도록!”
병사들 모두가 서 있기도 벅찬 녹초가 되고 나서야 훈련은 끝이 났다.
훈련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근엄한 지휘관의 모습을 유지하던 넬라넬라는 병사들이 연무장 밖을 나서자, 기세를 거두고 유순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장비를 소중하게 여기는 넬라넬라는 조용히 자신의 검을 살펴 날의 상태를 체크했고, 가죽으로 제작된 검집에 검을 꽂아 정리했다.
그리고 허리의 작업 벨트에 걸린 수납 주머니들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자신의 땀을 닦았다.
“땀에 젖은 넬라!! 좋은 장면이야!!!”
“으읏…!!”
불현듯 들려온 익숙한 음성에 넬라넬라는 고개를 돌렸다.
무척이나 높은 음색으로 탄성과도 같은 감상을 전해오는 여성의 목소리.
눈치채지 못한 사이 자신의 곁에 네로멜티아가 다가와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넬라넬라는 낯을 붉히며 동작을 멈춰 버렸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넬라넬라는 그저 부끄럽다는 듯이 네로멜티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 폐하……. 모습이 엉망이라… 부끄럽습니다…….”
“아니야! 촉촉하게 젖은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운걸!!!”
자신보다 작은 체격의 네로멜티아를 바라보느라 시선을 낮추고 있었던 넬라넬라의 모습은 부끄러움에 시선을 낮게 깔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모습이었으나, 지고의 존재에게 단정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된 넬라넬라는 강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넬라넬라가 착용한 전투복은 그녀가 평소 착용하는 작업복과 색상만 다를 뿐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짙은 회색으로 통일된 민소매의 상의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짧은 기장의 핫팬츠.
양팔을 시원하게 드러낸 상의는 무척이나 짧은 기장을 가졌기에 그녀의 복부마저 훤히 드러내고 있었고, 하단의 핫팬츠 또한 골반만을 겨우 가리는 기장으로 허벅지의 전체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노출도가 높은 의상으로 인해 넬라넬라의 맨살은 대부분이 드러나 있었고, 피부에 맺힌 땀방울들이 반짝이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목선을 타고 쇄골을 지나 흐르던 땀방울들이 그녀의 탐스러운 젖가슴 계곡 사이로 모여들어 상의의 칼라가 흠뻑 젖어든 모습.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던 땀방울이 그녀의 뾰족한 귀 끝에 맺혀 새벽이슬처럼 빛나고 있는 모습.
거친 훈련을 마치고 정리되지 못한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활기가 넘치는 아름다움이 짙게 배어 있는 것이었다.
“흐읏…!”
탐스러운 가슴 계곡과 하반신을 가리고서 고개를 떨구는 넬라넬라.
자신의 신체를 내려다볼수록 더욱 부끄러움이 강해지는 듯, 넬라넬라는 낯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거야?”
“… 저…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아아… 그게 문제였구나…….”
네로멜티아는 넬라넬라가 자신의 노출도 높은 의상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줄 알았지만, 그녀에게 이러한 의상은 당연한 것이었고 단지 땀을 흘린 모습이 부끄러웠을 뿐인 모양이었다.
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노출도 높은 의상이 부끄러워 감출 정도라면 넬라넬라의 성격상 이런 의상을 버젓이 입고 다닐 리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따라 양측의 디자인에 대한 차이점은 존재하나, 현재 넬라넬라가 착용한 전투복은 오크군에게 일상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당연한 의복이었다.
활동량과 노동량이 많은 공병대는 주로 이런 짧은 의상을 입고 다녔었다.
긴 기장의 의복이 땀에 젖으면 신체에 들러붙어 활동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었고, 빠른 땀 배출로 체온을 낮추기 위해서 이런 구조를 택한 것이기도 했다.
그 증거로 넬라넬라의 의상은 평소보다 더욱 타이트하게 변해 있었다.
애초에 걸리적거리지 않는 타이트한 재질의 의상이어서 신체의 선이 선명하게 엿보였었는데, 현재는 그 의상이 땀에 젖어 신체에 바짝 들러붙어 있는 터라 여체의 굴곡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이상해…!!’
넬라넬라는 요동치는 자신의 감정에 깊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검을 들고 싸우는 군인이 땀에 젖은 모습을 보이길 부끄러워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넬라넬라는 일생에 단 한 번도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특히 군사 훈련이나 건설 작업, 장비 제작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너도나도 땀을 흘리기 마련이고, 그건 무척이나 당연한 순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왕의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정신 차려… 군인의 몸으로 요조숙녀 같은 모습이라도 바란 거야…?’
넬라넬라는 애써 자신의 부끄러움을 떨쳐 내려고, 고개를 힘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당당함을 되찾기 위해 의식적으로 가슴을 펴고 바르게 섰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붙잡으며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폐하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공병대장 넬라넬라, 지금 훈련을 마치고 지고하신 마왕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늠름한 넬라도 너무 멋있다. 후후후.”
“… 연무장이 어수선해서 면목 없습니다. 폐하께서 방문하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해서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아니야, 훈련하는 연무장인데 당연한 거지. 예고 없이 찾아온 건 나인걸?”
넬라넬라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던 네로멜티아는 한결같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넬라넬라가 예쁘고 귀여워서 못 참겠다는 듯, 애정이 가득 넘쳐나는 순수한 미소.
표정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네로멜티아의 감정.
네로멜티아의 내면은 일말의 작은 불협도 없이 완벽하게, 넬라넬라의 모습을 좋아하는 애정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왕이 자신에게 보여 주는 강한 애정은 넬라넬라의 가슴을 진탕시키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깊은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
넬라넬라는 자신이 왜 이런 심경의 변화를 겪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이전의 자신은 결코 이성이 흐려지는 일이 없었다.
모든 감정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었고,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는 완벽한 소유물이었다.
그러나 마왕을 만나고 난 뒤로부터는 감정이라는 것이 고삐 풀린 말처럼 통제를 벗어나 마구 날뛰기 일쑤였다.
문제는 현재 겪고 있는 감정의 이상 징후에 대해 이유와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폐하께서는 카보니 숲 인근 지역의 정비와 시설 개발에 대해 논의하러 방문하셨다. 결국 공병대장인 너와도 상의해야 하는 일이지. 겸사겸사 오크군의 훈련 과정도 시찰하셨고.”
“그, 그러셨군요…….”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하셨단다. 넬라넬라 네가 몹시 믿음직스럽고 멋있다고 하셨어.”
“…….”
넬라넬라는 낯이 달아올라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것은 조금 전 겪었던 부끄러움과는 다른 감정이었고, 넬라넬라는 낯이 잔뜩 상기되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기 힘들어졌다.
이 감정만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기쁨, 환희, 쾌감, 열락.
무수한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굳이 정리하자면 한 단어로 나타낼 수 있었다.
그것은 행복이었다.
“정말이야, 넬라. 이렇게 늠름한 네가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기쁘고 설레던걸?”
“…….”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로 기쁨에 도취된 넬라넬라.
행복감이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그녀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군인의 입장으로서 충성을 바치는 군주가 자신을 칭찬한다면 더없이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현재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질적으로 다른 느낌이 있었다.
넬라넬라는 무수한 감정들이 들끓어 자꾸만 웃고 싶어지는 마음을 애써 휘어잡아 고삐를 조이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스토니 포트리스의 귀빈실에서 자고 갈까 하는데. 괜찮을까?”
“그저 하명하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십니다. 스토니 포트리스의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후후후. 그거 기쁜걸?”
네로멜티아는 베리베리의 지극한 환대에 고결한 미소로 답했다.
한 손으로 살포시 입을 가리며 웃는 네로멜티아의 자태는 우아하면서도 고상한 매력이 가득한 것이었다.
그리고 네로멜티아의 곁에 있던 러스테리아가 베리베리의 환대에 기쁜 모양인지 네로멜티아의 품에 안겨들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귀여운 비서의 기쁨이 담긴 애교가 몹시 사랑스러웠던 네로멜티아는 그녀의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고, 둥글게 말려진 뿔을 어루만져 주었다.
“스토니 포트리스는 식사도 너무 맛있고, 침대도 보드랍고 폭신해서 좋았어요!”
“그럼 러스는 앞으로도 여기서 지낼래?”
“으응… 주인님 곁이 제일 좋아요! 다른 건 그다음 문제라구요!”
“후후. 그럼 오늘도 러스는 좋은 밤 보내겠는걸?”
자신의 품으로 비서를 끌어당겨 안아주는 네로멜티아.
포근한 주인의 품에 안겨 고개를 파묻고 행복해하는 러스테리아.
이 모습을 지켜보며 인자한 미소를 보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베리베리.
넬라넬라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상의 기분을 맛보았던 자신의 감정이 곤두박질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이의 눈을 앞에 두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정을 과감히 드러내는 두 여성.
러스테리아를 쓰다듬는 네로멜티아의 손길.
네로멜티아의 품에 안겨든 러스테리아의 미소.
넬라넬라는 조바심이 들면서도 불편하고도 실망스러운,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혀 입맛이 씁쓸해졌다.
요즘 들어 자꾸 겪게 되는 부정적인 감정.
이유와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두운 감정.
넬라넬라는 가슴이 아릿해지는 느낌에 그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네로멜티아는 자신의 귀여운 비서에게 신경을 쏟는 것 같으면서도, 넬라넬라의 모든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네로멜티아의 미소가 묘하게 짙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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