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나는 언제나 네가 자랑스러워.
* * *
마왕성의 영역, 가장 바깥에 존재하는 폐허.
본래 적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던 외성은 오래전에 무너져 무덤 같은 돌무더기가 되어 있었다.
그중 첨탑의 잔해로 추정되는 돌무더기 위에 러스테리아가 앉아 있었다.
흐릿한 눈빛으로 마왕성 밖에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러스테리아.
씁쓸한 감정에 흠뻑 젖어 들어 모든 기력을 잃어버린 그녀는 그저 지나간 일들을 되짚어 볼 뿐이었다.
처음에는 한가해 졌다고 몹시 좋아했었다.
사랑하는 주인님이 전혀 업무를 건네주지 않고, 내키는 대로 해도 좋다는 식으로 방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갑자기 여유로워진 일상에 러스테리아는 앞으로 있을 일들을 잔뜩 기대하며 행복해하기까지 했다.
남는 시간에 침대에서 뒹굴거나 맛있는 것을 먹거나, 혹은 아름다운 태고의 숲을 거닐며 산책도 하고 싶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주인에게 여유가 생기면 그녀의 곁에 머물며 은밀하게 사랑을 속삭이고도 싶었다.
그러나 홀로 한가로이 놀고먹는 시간도 하루 이틀이고 거기서 더 오래 지속되면 죄책감이 드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방대한 업무량에 하루가 짧아 늦은 밤까지 자신의 임무에 시간을 들여야 할 정도로 노력하고 있는데, 자신만 할 일이 없어 마왕성의 일대나 거닐다가 식당이나 기웃거리니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는 것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주인 역시 늘 정무에 시달리며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았다.
할 일은 없는데 자꾸 스스로가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니 어떻게든 일을 찾아보려고 주인의 곁을 지키기는 했었다.
그러나 주인은 그다지 맡길 일이 없으니 편히 있다가 가라고 얘기할 뿐이었고, 일손이 모자라 서류가 쌓일 때면 곁에 있는 자신은 내버려 두고 차라리 베아트리스를 불러서 해결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나마 러스테리아가 뭔가 하고 싶다고 칭얼댈 때면, 차를 끓여오라거나 문서를 전달해달라는 등의 심부름을 마지못해 건네줄 뿐이었다.
오히려 차를 끓이는 일은 메이드가 해야 할 일인데, 그 메이드가 주인의 곁에 붙어서 비서의 업무인 서류 작업을 보조하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밤시중을 드는 일 또한 정중하게 거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상에!
레이디 킬러라고 불리는 자신의 주인이 여성과의 뜨거운 밤을 거절하다니!
언제나 틈만 나면 자신이나 베아트리스를 더듬으며 사랑을 속삭였던 주인.
아름다운 여성과의 성애를 좋아해 근래에는 성(?) 경험과 연애 경험이 전무한 넬라넬라에게까지 매혹을 흩뿌렸었던 그녀가 자신의 밤시중을 거절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었다.
“… 난 너무 멍청해…….”
이 모든 일들에 이상한 일도 다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뿐이었고, 조금 마음이 불편하고 소외된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최대한 자신의 여유를 즐기려고 노력했다.
마음을 내려놓고 생각을 비운 채 이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려 했고, 그렇기에 실제로 일주일 정도는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날 막대 사탕을 핥으며 마왕성 일대를 산책하다가 깨달은 것이었다.
마왕군 간부 중에서 일을 하고 있지 않은 건 자신뿐이었다.
직책을 떠나서 평범한 백성들조차 매일같이 땀을 흘려 일을 하고 있었으며, 허리가 다 구부러진 노인들조차 자신들의 노쇠한 몸을 이끌고 각자의 경험을 살려 사소한 일이라도 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생존과 미래를 걸고 국가를 재건하는 현실에 한가로이 놀러 다니고 있는 건, 어린아이들과 자신뿐이었다.
그 후, 넬라넬라를 찾아가 유능하고 필요한 인재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를 도전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했다.
사실 고작 세 번의 실패일 뿐이었으니 앞으로 몇 번은 더 도전해 볼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대하는 크로포드의 모습에서 러스테리아는 그만 마음이 꺾여 버린 것이었다.
한숨을 지으며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던 크로포드.
러스테리아는 순간 자신이 모두에게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지는 않나 의문이 들었다.
크로포드는 자신의 정무를 보다가 보고를 받고 달려 나왔다.
넬라넬라는 마왕이 직접 권한을 부여하며 맡긴 중요한 재건 임무를 미뤄두고 자신을 돕기 위해 이틀이나 시간을 내었다.
모두에게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는데 오히려 걸리적거릴 뿐이었다.
주인님에게 꼭 필요한 하인이 되고 싶어 노력했는데 이룬 것 하나 없이 재건 공사에 차질만 빚었다.
러스테리아는 자신이 몹시 쓸모없다고 느껴졌다.
무척이나 비참한 심경이었다.
“러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후방에서 들려온 다급한 음성.
러스테리아는 고개를 돌려 그 음성의 주인을 찾았다.
결코 잊을 리 없는 익숙한 음성이었다.
“걱정했잖아. 괜찮아?”
“… 저는 하는 일도 없는데 주인님께 걱정까지 끼쳐 드린거네요…….”
“무슨 말이야!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촉촉하게 젖어가는 러스테리아의 눈가에는 더욱 깊은 슬픔이 어렸다.
주인이 진심으로 걱정해서 자신의 안색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되도록 웃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으나 입꼬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러스테리아는 거짓으로라도 웃을 수 없을 정도로 비관의 수렁에 빠져 버린 자신이 더욱 싫어졌다.
그때, 크로포드가 어색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러스테리아는 조금 전 보았던 크로포드의 곤란한 기색의 모습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했고, 이후 이성이 따라오며 크로포드가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을 더 귀찮아하면 어떻게 할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로포드는 러스테리아의 앞에 서자 마자 고개를 숙여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비서관님!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마음을 다치시게 해서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허리까지 직각으로 꺾으며 정중하게 사죄하는 크로포드.
러스테리아는 자신을 한없이 낮춰 사죄하는 크로포드에게 당황해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마치 토끼나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이 놀라는 듯한 모습.
“사실 주군께서 내리신 명령이 있었기에 러스테리아님의 휴식을 권장하려 했을 뿐입니다. 주군께 직접 명령을 받았으면서도 제가 미처 신경을 써드리지 못했고, 그로 인해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셔야 할 비서관님께서 무언가 작업에 열중하고 계시는 상황을 보니 저 자신에게 화가 났었습니다.”
“에에…”
“최대한 비서관님의 마음을 헤아렸어야 했는데, 속히 휴식을 취하시게 해드릴 생각이 앞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비서관님께 저의 태도가 고압적으로 비쳐졌다는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마음 깊이 사죄드립니다!”
러스테리아는 반쯤 넋이 나갈 정도로 이해가 따라가질 않았다.
급작스럽게 펼쳐진 예상 밖의 상황에 사고가 정지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인식과 전혀 다른 정보가 주어지니 생각이 정리조차 되지 않는 것이었다.
크로포드의 진심이 담긴 정중한 사과에 마음이 녹아들기 시작한 러스테리아는, 비로소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네로멜티아와 크로포드의 너머까지 시선을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는 넬라넬라, 베아트리스, 헤스티니아, 아티스, 오운, 베리베리가 서 있었다.
마왕군의 간부가 모두 러스테리아를 찾아온 것이었다.
몹시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 러스테리아에게 네로멜티아가 다가왔고, 아직까지 떨리고 있는 러스테리아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너도 알다시피, 인력이 부족했을 때 네가 고생 많이 했잖아. 네가 그동안 너무 바쁘게 일해 와서 조금은 쉬라고 배려한 건데,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게 만들었다니……. 미안해, 러스.”
“아, 아니에요! 제가 멋대로 오해했을 뿐이에요!”
“아니야.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 네게 최대한 관심 두지 않아야 내 눈치 안 보고 자율적으로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게 너를 멋대로 방치한 셈이 되어버렸어.”
더욱 당황하기 시작한 러스테리아는 언제 풀이 죽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생각해왔던 최악의 상황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해 안도감이 들었고 점차 활기를 되찾고 있었던 것이다.
러스테리아의 눈을 바라보는 네로멜티아의 눈.
자애로운 주인의 눈빛은 따뜻한 애정을 품고 있었고, 러스테리아는 지난 시간 동안 가졌던 부정적인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저번에 러스테리아님이 제작하신 마력 열차 말인데요. 생각해보니 저희 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공중 부양 방식보다 소비되는 마나를 상당히 아낄 수 있을 거 같아서, 마왕성 외부의 물류 운송 목적으로 사용하면 탁월할 것 같아요.”
“에에…”
“소음이 심하니까 백성들이 거주하는 성내에 설치하기는 그래도, 바깥으로 오가는 운송책으로서는 이상적이라는 이야기랍니다. 훌륭한 일을 해내셨어요.”
전날 러스테리아가 개발한 마력 열차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헤스티니아.
그런 그녀가 지금은 전혀 다른 방향의 긍정적인 이야기를 전해오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노력이 큰 성과를 나타냈다는 이야기에 러스테리아는 할 말을 잊었다.
“비서관 아가씨가 고안한 체조도 알고 보니 훌륭한 것이었어. 단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근육을 자극하는 가벼운 준비 운동은 근육의 성장을 더욱 촉진할 수 있다고 헤스티니아 선생이 말하더군. 들어보니 합당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전신의 모든 근육을 자극할 수 있는 비서관 아가씨의 체조는 더없이 이상적이란 말이야? 우리 오우거는 그 다이너마이트 뭐시기 체조를 훈련에 적극 도입하기로 했어.”
“비서관님의 경계 경보 마법진 또한 적극적으로 채택할 겁니다. 현재로서는 거주지도 넓지 않고 주민의 수도 감당 못 할 정도가 아니니 블랙 나이트 단원들 선에서 관리가 됩니다만, 앞으로 마왕성의 면적은 더욱 넓어지고 백성들의 수도 늘어날 전망이니 분명 인력이 모자랄 시기가 곧 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헤스티니아님의 조언에 따르면 향후 일 년 안으로 그 시기가 도래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렇게 되면 미리 대비해서 편성해 둔 경비대에 비서관님께서 개발하신 마법진과 마도구를 지급해 운용하게 될 겁니다.”
러스테리아의 체조를 무르다고 비판했던 오운은 헤스티니아의 조언에 마음을 바꿔 러스테리아의 체조를 적극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러스테리아에게 블랙 나이트만으로 치안을 담당할 수 있다고 선을 그었던 크로포드는 헤스티니아의 조언에 따라 러스테리아가 개발한 마법진과 마도구를 적극 채택하겠다고 밝혔다.
러스테리아는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긍정적인 조언을 건네준 헤스티니아를 바라보았다.
헤스티니아는 러스테리아의 시선을 받고 싱긋 웃으며 애교가 넘치는 윙크를 보냈다.
러스테리아가 노력하여 이룬 것들이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게 된 것이었다.
노력의 결실이 찬연하게 다가온 것에 대한 감동.
자신을 위해 나서준 헤스티니아에 대한 감사.
상실한 줄 알았던 주인의 애정이 여전하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
러스테리아의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이 점차 그렁그렁해졌고, 시야가 점차 뿌옇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거의 울기 직전이었던 러스테리아를 살며시 끌어당긴 네로멜티아는 자신의 귀여운 비서를 포근하게 끌어안았다.
따뜻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떨리고 있는 신체를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수고 많았어, 러스. 나는 언제나 네가 자랑스러워. 단 한 순간도 그렇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
“우그으으으… 흐아아아아앙…!!”
더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려버린 러스테리아.
그토록 바랐던 주인의 말이 비로소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놓아 울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주인의 품에 힘껏 안겨,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쏟아냈다.
애정이 가득한 이 광경은 아침을 알리는 햇살만큼 따스한 것이었다.
엇갈린 감정이 비로소 서로를 마주해 오랜만에 돌아온 집처럼 안락한 것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저마다 미소 짓거나, 눈물을 찔끔 흘리는 등 감동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중 단 한 명은 조금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네로멜티아와 러스테리아의 애정이 교차하는 순간.
이를 목격하고 있는 넬라넬라는 가슴 한편이 아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 의미 모를 감각은 감정의 통증이라 할 만큼 불편한 것이었다.
분명 러스테리아라는 소중한 인물이 비로소 행복을 되찾았으니 순수하게 기뻐해 줘야 하건만.
다른 이들 모두가 저마다 순수한 감격을 드러내며 그녀를 축하하고 있건만.
자신 역시 러스테리아가 되찾은 행복에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 와중에 이질적인 불협의 감정이 끼어들어 몹시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관조할 수 없었던 넬라넬라는 순수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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