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소드 마스터 vs 최강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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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갖가지 업무들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가득했던 마왕성의 광장.
아직 폐허의 티를 다 벗지는 못했으나 생기와 활력이 가득했던 그곳에서 두 인물을 둘러싼 인파가 소란스럽게 북적거렸다.
이 많은 백성들이 저마다 자신의 업무를 미뤄가면서까지 광장에 모여든 것은, 광장의 중심에 서 있는 두 인물 때문이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이유를 설명해라.”
“… 그건…….”
평소의 정중한 존대는 사라져 버린 지 오래인 넬라넬라.
그녀는 크로포드의 멱살을 잡았을 당시보다는 차분해진 느낌이었으나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었고,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직도 천불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차가운 분노에 사로잡힌 넬라넬라가 착용한 강철의 하프 아머(Half Armor)는 무척이나 잘 정비되어 마치 은으로 제작한 것처럼 순백의 광택을 발하고 있었고, 어깨를 보호하는 폴드론(Pauldron)과 팔꿈치를 보호하는 카우터(Couter)까지 구성되어 방비가 무척이나 탄탄한 구조였다.
잘 정비된 것은 그녀가 착용한 건틀렛도 마찬가지였으며, 하프 아머의 아래에 착용한 체인 메일(Chain Mail) 역시 사슬의 틈 구석구석 일말의 퇴색된 부분 없이 깨끗했다.
체인 메일의 너머로 언뜻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내부에 레더 아머(Leather Armor)까지 착용한 것으로 보였는데, 그 역시 가죽의 광택이 확연하고 갈라진 부분이 없어 그녀가 평소 자신의 장비를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하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플레이트 아머(Plate Armor)가 아니었을 뿐이지, 경무장의 장비로서는 무척이나 철저하고 육중한 방어구를 착용한 셈이었다.
그 철저한 방비에 반해 신발은 금속 보호구인 사바톤(Sabaton)이 아니라 두꺼운 재질의 레더 부츠(Leather Boots)였는데, 이는 방어보다도 철저한 신속성을 위한 것이라 추정되었다.
사실 그녀가 소유한 방패만으로도 웬만해서는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보였기에 가죽 재질의 부츠를 착용한 것이 방비의 큰 흠이 되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이백 멘톨의 신장을 가진 그녀의 신체 대부분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강철의 카이트 실드.
이 정도의 거대한 방패를 사용하려면 차라리 타워 실드(Tower Shield)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그 걱정이 무색할 만큼 그 카이트 실드는 거대하고 두꺼웠다.
오백 멘톨의 오우거가 착용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그 무지막지한 카이트 실드를 왼손 하나로만 들고 있는 상황이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를 드는 여유마저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 바스타드 소드는 그녀의 체격에 비례해서 제작되었기에 평범한 데모니안에게는 양손 대검인 클레이모어(Claymore)나 다름없는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건가?”
“… 그렇습니다…….”
하나의 육중한 철벽이나 다름없는 무장을 하고서 당장에라도 돌진할 듯 살벌한 기세를 보이는 넬라넬라.
반면 크로포드의 모습은 전의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 결투를 피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해 몹시 빈약해 보였다.
“어이, 크로포드님 괜찮으실까?”
“무슨 걱정을 해! 무려 천 년 전 헤모니겐트의 소드 마스터셨다구!”
“아니, 근데 잘 봐! 저 방패에 스치기만 해도 날아갈 것 같잖아!”
크로포드는 결투가 진행되다 보니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블랙 나이트 특유의 코르니움 롱 소드를 준비하기는 했으나, 결투 자체를 진행하고 싶지 않은 까닭에 플레이트 아머와 카이트 실드는 착용하지 않은 허술한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현재의 광경을 지켜보는 군중들에게 크로포드는 무척이나 위태로운 상황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입 밖에 내지 못할 이유라면 굳이 들을 이유도 없다!”
넬라넬라는 힘껏 억누르고 있었던 격노를 일갈과 함께 터뜨렸고, 거대한 카이트 실드를 앞세워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장비한 바스타드 소드 역시 평범한 검보다도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무척이나 위협적인 것이었으나, 군중들은 크로포드가 그 검에 찔리길 걱정하는 것보다도 방패에 치이는 사태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가 앞세우고 있는 카이트 실드는 위협적이고 위험한 것이었기에 크로포드로서는 최선을 다해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크윽…!!”
“너도 남자라면 피하지 말고 부딪쳐라!! 아까 러스테리아님을 대하던 냉정한 태도는 어디다 팔아먹었나!!!”
“크윽…!! 그건…!!!”
평범한 이들의 눈으로는 잔상조차 보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이동한 크로포드.
심지어 평소 착용하는 코르니움제 육중한 플레이트 아머와 카이트 실드마저 없는 상황이라 그의 움직임은 더욱 빠른 것이었다.
그러나 넬라넬라의 맹렬한 돌진은 평소보다 가벼운 조건의 크로포드로서도 가까스로 피해야 할 만큼 순식간에 쇄도한 것이었다.
어깨가 거의 스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돌진을 피해낸 크로포드는 숨이 멎을 듯 섬뜩해졌다.
가뜩이나 큰 체격을 가진 그녀가 강철의 갑옷과 거대한 카이트 실드를 들고 행하는 차지(Charge) 공격은 고스란히 그 모든 무게를 폭발적인 파괴력으로 바꿔내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다 철저히 단련된 오크 군인으로서의 강력한 근력까지 더해져, 조금이라도 스쳤다가는 투석기가 쏘아낸 바위나 포탄을 맞는 정도의 충격이 가해질 것이었다.
크로포드는 어떻게든 결투를 멈추기 위해, 애써 정당성을 주장해 보려고 했으나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분명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기색이었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그것을 발설하지 못하는 모습이었고, 격노한 넬라넬라는 그가 겪는 내적 갈등을 볼 수 있을 만큼 냉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쿠구구구구구!!!
또다시 돌진을 감행하는 넬라넬라.
마치 거대한 공성 병기가 돌진하는 듯, 주변의 대지가 진동할 만큼 그녀의 돌진은 강대한 것이었다.
크로포드는 두 번째에 이른 돌진에서야 넬라넬라가 착용한 방어구 세트의 의도를 이해했다.
유연하고 신속한 동작을 위해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지는 않았으나, 철저한 방비와 함께 육중한 무게를 더하기 위해서 두꺼운 강철의 하프 아머와 체인 메일 그리고 기타 부속 방어구를 착용한 것이었다.
거기다 같은 이유로 빠른 돌진을 위해 무겁고 둔한 사바톤이 아닌 레더 부츠를 착용한 것이었고, 그녀가 장비한 카이트 실드 역시 이를 위해 그토록 거대한 크기로 제작된 것이었다.
부우우우우웅!!!
“크으으으윽…!!!”
이번에도 크로포드는 측면으로 이동하며 돌진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대한 카이트 실드에 가려져서 보지 못한 두 번째 공격이 이어졌기에, 그는 급히 허리를 뒤로 꺾어 연속된 공격을 피해야 했다.
카이트 실드의 돌진 범위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크로포드의 눈앞에 방패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던 바스타드 소드가 쇄도한 것이었다.
애초에 넬라넬라는 자신의 방패를 피한 상대를 검으로 벨 생각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눕혀서 든 채 돌진 중이었고, 워낙에 거대했던 카이트 실드가 검의 모습을 가리고 있어 크로포드는 두 번째 공격을 미리 눈치챌 수 없었던 것이다.
‘사, 상당하다…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한다…!!’
“피하기만 할 셈인가!! 그 검은 그저 장식인가!!!”
“무례를 용서하시길…!!”
크로포드는 최소한 상대를 무력화하지 않으면 상황이 더욱 곤란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검에 전력을 쏟아부어 강렬한 참격을 날렸다.
애초에 넬라넬라를 무력화시킬 셈이었던 크로포드는 대놓고 그녀의 방패를 노렸다.
까아아아앙!!!
아무리 평범한 검보다 긴 길이를 가진 롱 소드라도, 아무리 평범한 금속보다 무거운 코르니움으로 제작된 검이라도.
애초에 크기와 두께부터 상대가 되질 않기에 크로포드의 검으로는 넬라넬라의 방패에 일말의 타격도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크로포드가 노린 것은 두 번째 공격이었고, 첫 번째는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마치 몽둥이를 휘두르듯 풀 스윙으로 롱 소드를 휘두른 크로포드는 철저히 카이트 실드의 중앙을 때렸다.
그러자 카이트 실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고, 눈에 보일 만큼 요동을 쳤으며 넬라넬라의 방패 통제가 버거워지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눈으로 본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신기(??).
헤모니겐트의 소드 마스터라는 위명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기술이었다.
크로포드는 넬라넬라의 방패가 순간적으로 통제를 잃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자신의 신체를 힘껏 날렸다.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그녀의 거대한 방패를 치워낼 수는 없으나, 세밀한 통제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자신의 신체를 날려 전력을 다해 밀친다면 충분히 방패를 밀어붙여 치워버릴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었던 것이다.
방패만 제거된다면 검과 검의 격돌에서는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콰가가각!!!
투우우웅!
“크윽!!”
크로포드의 충돌 공격은 맥없이 저지당했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크로포드는 비로소 그녀가 왜 카이트 실드를 고집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저 드넓고 거대하며 육중한 방패를 사용할 거라면 타워 실드도 있는데 왜 카이트 실드를 고집했는가.
카이트 실드의 하단 날카로운 부분이 지면에 깊이 박혀 있었다.
이어지는 충격에 버티기 위해 넬라넬라는 방패를 지면에 박아 고정시킨 것이었다.
이미 지면 깊숙이 뿌리를 박은 하나의 철벽이 되어버린 카이트 실드.
카이트 실드에 어깨를 부딪치느라 크로포드는 무척 가까운 거리에 근접해 있었다.
그녀의 방패는 지면에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나, 그녀에게는 두 번째 공격 수단이 있었다.
측면을 통해 맹렬히 쇄도하는 넬라넬라의 바스타드 소드.
쐐애애애액!!!
크로포드는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현실이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이대로는 더 버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크로포드의 생각보다 넬라넬라의 맹격은 강대한 것이었고, 어설픈 자세로는 오히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이른 것이었다.
블랙 나이트의 코르니움 롱 소드에 시커먼 빛이 뿜어져 나왔다.
스릉!
“읏…!!”
넬라넬라는 자신의 검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양단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날카로운 식칼로 무른 채소를 썰기라도 한 듯, 일말의 저항감 없이 그녀의 바스타드 소드는 두 조각으로 깨끗하게 나뉘어 버렸다.
크로포드의 롱 소드는 시커먼 빛으로 이루어진 검날이 덧씌워진 듯한 형상이었고, 롱 소드의 날에 닿기도 전에 그 빛으로 이루어진 날에 닿기만 해도 강철이 썰려 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반사적으로 휘둘러진 크로포드의 검은 넬라넬라의 바스타드 소드를 양단하고 더 나아가 거대한 카이트 실드까지 갈라내고 있었다.
카아아아아앙!!!
“이게 무슨 짓이야!!!!!”
순간 맹렬한 불꽃이 튀며 시야가 밝은 빛에 가려지나 싶더니, 두 사람의 사이에 한 여성이 나타났다.
어깨를 한껏 드러내며 가슴 또한 일부 노출된 과감한 형태, 그러나 오히려 고귀함이 느껴질 정도의 매력을 지닌 검은색 홀터넥 드레스.
그 고결한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마법 장비 ‘나이트 일루전’은 루이나의 여신이자 헤모니겐트의 지배자인 마왕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결투에 임하던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은 마왕 네로멜티아 디 이시스였다.
“특히 크로포드 너. 누가 함부로 마나 소드를 휘두르라고 했지?”
“주, 주군…!!”
현재 검은빛으로 구성된 검의 형상은 네로멜티아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강철조차 일말의 저항감 없이 깨끗하게 갈라버리는 빛의 검을 네로멜티아는 맨손으로 막아낸 것이었다.
이내 크로포드는 자신의 마나 소드를 황급히 지우고, 네로멜티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괜찮아? 다치진 않았어?”
“… 아… 괘, 괜찮습니다… 폐하……. 크로포드 경의 검이… 제 목 앞에서 멈췄으니… 분명 괜찮았을 겁니다…….”
“… 마나 소드를 넬라넬라의 목 앞에까지 들이밀었다는 거지?”
네로멜티아는 얼어붙는 듯한 살기를 품고 크로포드를 노려보았다.
이전에 유토피아 사건에서 아티스에게도 살기를 보였었으나,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가공할 살기였다.
주변의 군중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선 자세 그대로 경련하기 시작했고, 넬라넬라 역시 본능을 자극하는 섬뜩한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 살기의 대상이 된 크로포드가 이 상황을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지금 누구의 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야. 마나 소드의 사용자도 아닌 상대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크로포드.”
이내 네로멜티아는 자신의 살기를 모두 거뒀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비로소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숨통이 트이는 모습을 보였고, 넬라넬라 역시 극도로 긴장한 마음을 어떻게든 추스를 수 있게 되었다.
그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닫고 침묵을 지키던 크로포드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네로멜티아와 넬라넬라는 그제야 사건의 내막과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일이 어떻게 이렇게 꼬일 수 있었는지 경악스러웠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사라진 러스테리아를 찾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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