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러스테리아의 구직 활동 (2)
* *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넬라넬라는 급하게 마왕성 재건 공사 현장을 순회했다.
그녀는 각 현장과 부서의 부장들에게 자신이 없어도 일을 완벽하게 마칠 수 있는 단순한 작업을 진행하도록 지시했고, 아침 식사에 맞춰 러스테리아의 거처를 찾아갔다.
똑 똑 똑
러스테리아의 거처는 마왕성의 몇 안 되는 임시 건물이었고 폐허의 낡은 벽돌을 주워다 쌓은 방 한 칸짜리 작은 건물이었지만, 마왕조차 천으로 이루어진 막사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상당한 특혜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은 낡은 막사에서 생활하더라도 러스테리아 만큼은 조금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머무르길 바라는 네로멜티아의 애정 가득한 배려가 엿보이는 장소였다.
넬라넬라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끼이이익
몇 차례 더 노크를 해 보았지만 아무런 답변도 들려오지 않자, 넬라넬라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침대와 탁자, 그리고 작은 옷장이 전부인 아담한 내부.
러스테리아는 붉은빛의 두꺼운 솜이불을 덮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주인의 허락 없이 거처에 들어서는 건 예의가 아니었지만 애초에 마왕성의 재건 계획으로 바쁜 넬라넬라가 낼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고, 오늘 하루를 비운 것만 해도 상당히 노력한 것이었기에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들어온 것이었다.
“러스테리아님, 아침입니다. 많이 피곤하십니까?”
“우으으응…”
가까이서 들리는 넬라넬라의 음성은 분명 러스테리아에게 닿았다.
그러나 잠에 취한 러스테리아는 그녀의 음성을 단순한 소음 정도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고, 잠시 몸을 뒤척이다가 다시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넬라넬라는 도통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러스테리아를 깨우기 위해 재차 말을 걸었다.
“러스테리아님? 들리십니까?”
이제는 아예 뒤척이기는커녕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러스테리아.
넬라넬라는 이 상황이 다소 난처했다.
조금 더 언성을 높인다면 당연히 러스테리아를 깨울 수 있겠지만, 그래서야 놀라서 깨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아무래도 꺼려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부드러운 말로 깨워서는 아침 식사가 아니라 점심 식사를 맞이해야 할 판인 것이었다.
넬라넬라는 러스테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붉게 물든 눈가가 유독 도드라지고 있었다.
간밤에 울다 잠이 들었던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모습.
심지어 밤이 지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넬라넬라는 깊이 잠든 러스테리아를 조금 더 부드럽고 포근하게 깨워주기로 마음먹었다.
“러스테리아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러스테리아의 양어깨에 손을 짚은 채, 그녀의 신체를 작게 흔들었다.
조심스러운 넬라넬라의 손길은 러스테리아가 자연스럽게 잠에서 깰 수 있도록 천천히 유도하는 것이었다.
“흐으으응…”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이 인상 깊은 러스테리아의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가고, 그녀의 보랏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반쯤 잠긴 채로 드러났다.
눈은 떴으나 아직은 몽롱한 그녀의 눈빛.
넬라넬라는 달콤한 잠의 바다에 빠져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며 자상하게 이야기했다.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아침 식사로 빅 보어 베이컨을 곁들인 버튼 머시룸 수프가 나올 예정인데, 배고프지 않으십니까?”
“헤헤… 주인니이임…”
“읏…!!”
맛있는 걸 좋아하는 러스테리아를 자극하기 위해 아침 식단까지 언급하던 넬라넬라.
러스테리아는 반쯤 감긴 몽롱한 눈빛으로 헤실헤실 웃으며 넬라넬라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러스테리아의 손길에 넬라넬라는 놀라면서도,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한 채 그대로 러스테리아의 품에 안겨 버렸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살 내음과 따뜻하고 포근한 체온, 뺨에 닿아 느껴지는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젖가슴의 감촉.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넬라넬라의 낯은 잔뜩 상기되었고, 눈빛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러스테리아가 착용한 레드 바이올렛 컬러의 매혹적인 네글리제.
가슴이 깊게 팬 형태의 그 네글리제는 잠결에 어깨끈이 흘러 내려져 있었고, 그에 따라 네글리제 역시 아래로 흘러내려 커다란 젖가슴이 더욱 노출된 모습이었다.
심지어 붉은빛이 감도는 유륜이 살짝 엿보일 정도로 노출되어있는 상황이었고, 조금만 더 네글리제가 흘러내린다면 러스테리아의 그 커다란 유방이 아예 다 드러날 법한 상황이었다.
러스테리아의 젖가슴에 파묻혀 있었던 넬라넬라의 눈 바로 앞에, 본래라면 은밀하게 감춰져 있어야 할 여성의 유륜이 너무나도 가깝게 드러나 있는 상황이었다.
“으읏… 아아…”
“으으으응…?”
넬라넬라가 당혹감에 젖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익숙지 않은 느낌을 받은 러스테리아가 비로소 달콤한 잠의 장막을 걷어내고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잠결에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포근하게 어루만지니 당연히 자신의 사랑해 마지않는 주인님인 줄 알고 끌어안았던 러스테리아.
그러나 상대가 불안하게 몸을 떠는 감각에서 이질감을 느꼈고, 너무나도 익숙한 주인의 신체보다 더 크고 단단한 감촉에서 또 한 번 이질감을 느꼈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 러스테리아는 자신의 젖가슴에 파묻혀 있는 넬라넬라를 발견하게 되었다.
“흐와아아아아아…!!!”
“어으으읏…!!!”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을 끌어안고 있었다는 걸 자각한 러스테리아가 상대의 머리에 감긴 자신의 양팔을 황급히 풀었고, 넬라넬라는 자신을 속박하던 상대의 팔이 풀어지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 다 우스울 정도로 맥없는 비명을 질렀고,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으으으… 죄, 죄송해요…!! 제, 제가 잠결에…!!”
“아, 아니, 아닙니다…!! 막, 저기, 그, 함부로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러스테리아는 자신이 넬라넬라를 끌어안았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 사고가 정지하기 직전이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넬라넬라는 아예 등을 돌린 상태로 횡설수설하며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러스테리아는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말을 마구 더듬는 넬라넬라의 모습을 보다가 문득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내려다보았다.
네글리제의 어깨끈이 흘러내려 그 위로 거의 튀어나오기 직전인 젖가슴만이 두 눈에 확연히 들어오고 있었다.
러스테리아는 황급히 자신의 의복을 단정하게 추슬렀고,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해 안면이 잔뜩 붉어져 버렸다.
‘하으으으… 기분 나쁘셨으면 어떻게 하지…….’
본래 여성을 좋아하는 네로멜티아.
본래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는 서큐버스인 러스테리아.
본래 주인만을 열렬히 사모하는 이유로 성별이 중요하지 않았던 베아트리스.
본래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는 취향이면서 네로멜티아만을 좋아하던 카디스텔라.
이들은 모두 저마다 다른 이유로 여성과 여성 사이의 스킨십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넬라넬라는 어떤 취향과 어떤 이상형을 가지고 있는지 조금도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이었다.
넬라넬라가 남성을 좋아하며 여성간의 스킨십을 혐오하는 인물이라면 러스테리아는 상당히 큰 실수를 저지른 상황인 것이었다.
“시, 싫으셨… 나요…?”
“아, 아닙니다…! 그저… 조금… 갑작스러워서…….”
불안감을 잔뜩 안고 물어본 러스테리아.
그에 답하는 넬라넬라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고, 말을 더듬는 것 역시 여전했다.
그녀의 모습이 러스테리아에게는 큰 불안감을 주었다.
‘어떻게 해… 싫으셨나 봐…….’
넬라넬라가 자신을 쳐다보지 않은 채 당혹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으니, 러스테리아는 넬라넬라가 자신이 무심코 벌인 스킨십을 싫어하고 있다 생각해 울상이 되어 버렸다.
러스테리아는 천 년 전의 네로멜티아를 상기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강대한 힘, 마왕으로서의 권력.
그녀가 지닌 것들은 세상 어떤 것보다 값진 보물이었고, 자신감이 넘치는 남성이 찾아와 청혼을 하는 일은 꽤 빈번한 일이었다.
남성에게는 취향이 없었던 네로멜티아였으나 그녀는 배려가 깊고 자애로운 마왕이었기에, 남성들에게서 어떤 청혼이 들어오든 상대의 기분이 나쁘지 않게 잘 거절하고는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간 큰 데모니안 귀족 하나가 네로멜티아의 거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뜸 그녀의 손을 잡은 적이 있었다.
여성의 손을 잡고 손등에 고상한 입맞춤을 하면, 어떤 여성이든 낭만을 느껴 홀딱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는 네로멜티아의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는 것까지 성공했다.
그 이후는 대참사였다.
네로멜티아는 그 귀족의 안면을 그대로 갈겨버렸고, 모든 치아가 산산이 부서져 나가며 말 그대로 구강 전체가 함몰되어 버린 것이었다.
네로멜티아의 분노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고, 죽여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것을 크로포드와 마왕 친위대 콰르텟이 일제히 나서서 겨우 뜯어말렸었다.
러스테리아는 그때 ‘취향에 맞지 않는 이가 걸어오는 스킨십은 이렇게 큰 혐오를 불러오는 거구나.’하고, 큰 교훈을 얻었었다.
러스테리아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넬라넬라도 그 당시의 주인처럼 자신을 격렬하게 혐오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스테리아의 걱정과 달리 넬라넬라는 전혀 다른 생각에 빠져, 정신이 혼미해졌을 뿐이었다.
‘폐하와 비서관님은 평소에도 이렇게 살을 맞대고 계시는 걸까…….’
넬라넬라는 러스테리아가 자신을 마왕 폐하로 착각해서 끌어안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딱히 오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네로멜티아와 러스테리아가 평소에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 상상해 보고 있었고, 예상되는 장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하자 부끄러우면서도 몹시 관심이 가고 흥미가 생기는 것이었다.
지난 연회에서 러스테리아와 오운이 나누었던 대화를 엿들었기에, 네로멜티아와 러스테리아는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사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러스테리아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네로멜티아라 착각한 상대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기까지 했으니, 분명 둘은 이 정도의 스킨십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 정도로 가까운 사이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여성과 여성 간의 야릇한 모습들을 떠올리고 있던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설레는 감정이 싹트고 있다는 것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멋진 남자 주인공이 예쁜 여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
넬라넬라가 좋아하는 것은 그런 종류였는데,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 벌어진 스킨십에 가슴이 설레고 심장이 거세게 맥동하기 시작하니 몹시 당혹스러웠던 것이었다.
아직까지 생생한 러스테리아의 부드러운 감촉.
따뜻한 체온과 여체의 향기로운 살 내음.
가슴 깊은 곳까지 따스하게 전해지는 애정.
그 모든 것이 기분 좋았고, 안락했으며, 달콤했다.
“… 폐하와…”
“…?”
“자주… 끌어안거나… 하십니까…?”
“역시… 싫으셨… 던 건가요…?”
더듬더듬 간신히 질문을 던진 넬라넬라.
러스테리아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제대로 답을 해 주지 못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 넬라넬라는 러스테리아 역시 잔뜩 긴장하고 당황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녀가 오해하는 바가 없도록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게 되었다.
“시, 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분이… 좋……. 아, 저… 평소 폐하와 자주 이런 걸 즐기고 계시는지 궁금해서…….”
넬라넬라는 문득 네로멜티아에게 안기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백 멘톨이 넘는 자신이 네로멜티아에게 안기는 모습은 살짝 떠올리기만 해도 너무나 어울리지 않아서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조금씩 설레기 시작하는 자신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늠름하고 아름다운 마왕 폐하.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는 일은 어떤 것일까.
문득 부끄러워하는 자신에게 애정 어린 속삭임을 들려주는 네로멜티아의 모습이 떠오르자, 넬라넬라는 숨이 막힐 정도로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넬라넬라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복잡한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부정적이지는 않다고 느껴지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수백 권의 연애 소설을 읽어 오면서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던, 여성과 여성의 로맨스.
“아아…”
러스테리아는 비로소 넬라넬라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눈치를 채게 되었다.
오히려 자신의 걱정과는 양극단에 존재하는 감정.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넬라넬라의 상기된 안면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넬라넬라는 러스테리아가 걱정한 바와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우, 우선 식사를 하러 가시죠! 어서 식사를 끝내셔야 원하시는 업무를 찾으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네요. 그, 금방 갈아입고 나갈게요!”
넬라넬라는 러스테리아가 속히 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즉시 밖으로 나갔다.
작은 소란이 지나간 후, 러스테리아의 거처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평소와 같은 익숙한 장소임에도, 이 순간만큼은 평소보다 더 고요하다고 느껴졌다.
러스테리아는 의복을 갈아입기 위해 옷장의 문을 열었고, 수면 시에 착용했던 네글리제를 벗었다.
사랑하는 주인님이 선물해 준 야릇한 의상.
러스테리아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매혹적인 네글리제를 내려다보며, 방금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그녀는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