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헤스티니아 위즈위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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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인사였음에도 기품이 유독 돋보인 헤스티니아의 자태는 마왕의 과격한 협박에도 전혀 위기를 느끼지 않는 여유로움에서부터 비롯된 듯 보였다.
오히려 마왕이 자신을 해쳐주길 바라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고, 세상 그 어떤 것도 그녀를 위압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본래 두려움이 없는 자는 매사에 태연할 수밖에 없으니, 그녀에게 각인된 기품은 내면의 고고함에서 파생된 하나의 결과인 셈이었다.
“익숙한 분들뿐이라 제 소개가 늦었네요. 거기 계신 매력적인 오크 아가씨께서는 모르실 테니 진작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개의치 말아 주십시오. 천 년 만에 만나셨다니 당연히 재회의 인사를 나누시는 게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토니 포트리스의 공병대장, 넬라넬라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헤스티니아님.”
“어머, 어쩜 이리도 달콤하실까. 후후, 그냥 편하게 헤스라고 불러주셔도 좋아요. 넬라넬라 대장님.”
다시 한번 넬라넬라를 향해 끈적한 시선을 던져오는 헤스티니아.
거기다 자신의 양팔을 앞으로 끌어모아 배배 꼬면서, 양팔의 사이에 자신의 거대한 젖가슴을 밀어 넣어 마구 비비고 흔들어대는 모습을 보였다.
분명 노골적으로 의도된 행동이었으며, 농염한 색기가 너무 강해 저속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몸짓이었다.
다소 담담하게 대처하려고 했던 넬라넬라는 상대의 부담스러운 태도에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여성이라는 특징이 동일한데도 네로멜티아와 헤스티니아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네로멜티아가 자신의 허리를 감싸온 일에 대해서는 깊은 호감을 느꼈지만, 헤스티니아의 추파에서는 오히려 거부감만 가득 일어날 뿐이었다.
네로멜티아는 다시 헤스티니아의 앞을 막아서며 강경하게 못을 박았다.
“쓸데없는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할 얘기 많으니까 안내나 해.”
헤스티니아는 네로멜티아의 강한 반응에 깊은 흥미를 느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네로멜티아는 결코 좋은 감정으로 그녀를 대한 것이 아니었으나,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게는 퍽 마음에 드는 광경인 모양이었다.
“좋아요. 편히 쉬시면서 대화하실 수 있도록 누추하지만 제 거처에 모시도록 하죠.”
헤스티니아의 거처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태고의 숲 가운데에 여유로운 공간을 두고 비워진 공터.
그곳에 세워진 오두막은 온갖 잡동사니가 많았지만, 쌓인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고 아늑한 분위기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온갖 색색의 약품을 담은 플라스크들이 즐비했으나, 헤스티니아의 손가락질 한 번에 차원의 틈이 열리며 그 내부로 둥실둥실 떠올라 모두 사라졌다.
플라스크를 가열하기 위해 존재하던 램프 위에 티포트를 올려 차를 준비했고, 부엌에서 몇 가지 과일들이 내어져 나왔다.
“와아아아! 이 포도 정말 맛있어요!”
“후후후, 비서관님은 즐길 줄 아시네요. 높은 당도와 산뜻한 향기, 거기다 크기를 키움에 따라 넘치는 과육과 과즙. 씨앗이 자라나지 않게 하여 식감 또한 살렸습니다. 이 품종을 개량하는데 수고 좀 했어요.”
“과일의 싱그러운 향기와 달콤한 꿀 향기가 함께 느껴지는 것이 놀랍습니다. 달콤함도 비할 바가 없어 무척이나 감미롭습니다. 당도가 너무 높아서 텁텁하다고 여겨지기 쉬울 정도인데, 풍부한 과즙의 산뜻함이 입안에 가득 차올라 오히려 갈증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어머, 넬라넬라님도 미식가셨군요! 정말 반가워요. 저는 아름다운 맛을 즐길 줄 아는 고상한 분을 좋아한답니다?”
어느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오두막의 내부를 가득 메웠다.
상당한 경계와 두려움을 가지고 네로멜티아의 등 뒤에 몸을 숨겼던 러스테리아와 노골적인 추파에 불편함을 느껴 얼어붙기 일쑤였던 넬라넬라는 밝은 웃음을 되찾았다.
한 번 대화가 시작되니 헤스티니아는 나긋하면서도 포근한 모습으로 그녀들을 대했고, 헤스티니아를 기피했던 그녀들은 어느새 과거의 일 따위는 모두 잊고서 헤스티니아와 즐거운 담소를 나누는 모습만이 남게 된 것이었다.
네로멜티아 역시 그녀들의 정답고 화목한 모습이 좋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향기로운 차를 음미하며 그녀들의 웃음소리를 음악 삼아 안락을 즐기고 있었다.
“그나저나 베아트리스님께서는 참여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순간 자리의 모든 인물이 말을 잊었다.
현재 인지의 정도만 다를 뿐 베아트리스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일행 모두가 알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헤스티니아의 질문은 답하는 이 없이 허무하게 지나가 버렸다.
잠시 찾아든 침묵에 헤스티니아는 의미 모를 진득한 미소를 띠고 베아트리스에게 다가갔다.
오두막 한편의 계단에 앉아 손잡이에 머리를 기댄 채, 끙끙 앓고 있었던 베아트리스.
헤스티니아가 자신에게 흥미롭다는 듯 다가서자, 상처 입은 야수가 상대를 노려보는 모습으로 살벌한 시선을 쏘아왔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날카로운 살기를 가지고 경고를 하고 있었다.
자신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명백한 경고.
헤스티니아는 베아트리스에게 더 다가가지 않았다.
단지 그녀와 약간의 거리를 둔 정도로 근접해서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베아트리스를 바라보는 헤스티니아의 모습에는 자신의 흥미를 전혀 감추지 않는 당당함이 있었다.
그리고 헤스티니아는 허공에 노크를 했다.
쩡!
순간 헤스티니아가 노크를 한 장소에 공간이 깨지며 차원의 틈이 만들어졌고, 헤스티니아는 그 안으로 자신의 손을 뻗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베아트리스가 소스라치게 놀라기 시작했고, 후방으로 몸을 돌림과 동시에 회전력을 넣어 팔꿈치로 공격을 가했다.
빠각!!! 후두두두두…
베아트리스의 일격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녀의 안 좋은 상태를 잊게 할 정도로 빨랐고 강했다.
대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육중하게 터지며 자신이 기대고 있던 계단의 손잡이와 벽면을 모두 부숴버린 것이었다.
비록 목표를 맞추지 못하고 허공을 갈랐을지언정 그녀의 공격은 상당히 위력적이고 심각하게 위협적이었다.
헤스티니아는 차원의 틈에 들어갔다 나온 자신의 손을 매만지며 짧은 생각에 잠겼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베아트리스를 바라보며 짐짓 어린아이를 훈계하는 모습으로 말을 걸었다.
“어머, 손이 날아갈 뻔했잖아요. 그럼 못써요.”
“… 만지지… 마십시오…….”
베아트리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의 후방을 공격한 이유는, 그녀의 등 뒤에 생성된 차원의 틈이 말해주고 있었다.
헤스티니아는 차원의 틈을 열어 베아트리스의 목덜미를 어루만진 것이었다.
그 모습을 모두 보고 있었던 넬라넬라는 베아트리스의 전투능력과 헤스티니아의 마법적 권능에 대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크 중에서 검술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자신조차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없었던 베아트리스의 공격.
차원의 공간을 부수고 그 틈을 비집어 열기를 포도 열매 따는 것보다도 쉽게 해내는 헤스티니아.
둘 다 인지를 벗어난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이 명백해 보였다.
“그나저나 마왕님,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계셨네요?”
“…….”
“그렇군요. 이렇게까지 하시면 이 대단한 킬링머신도 어쩔 수 없겠죠.”
차원의 틈을 모두 닫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헤스티니아.
네로멜티아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듯 이야기하는 헤스티니아를 애써 무시하며 차를 마실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스티니아는 이리저리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 저… 헤스티니아님…?”
“그래요! 우선 두 분 사이의 일을 매듭지어주는 편이 좋겠어요!”
헤스티니아의 긴 침묵에 불현듯 불안감을 느낀 러스테리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헤스티니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생각에 몰두해 아무렇게나 일을 벌여 버렸다.
이미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하건 들릴 기색이 아니었다.
경쾌한 손짓 두 번으로 각각 네로멜티아와 베아트리스를 가리킨 헤스티니아.
쩡! 쩌정!
쯔우우우우웅!
순간 네로멜티아와 베아트리스의 아래에 차원의 틈이 생성되었고, 그것은 먹이를 삼키는 뱀과 같이 아가리를 벌려 탐욕스럽게 그녀들을 삼켜버렸다.
목표가 되는 이들을 삼키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차원의 틈은 사라져 버렸고, 오두막의 내부에는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불안한 정적만이 오두막 내부를 짓눌렀고, 창문으로 들이치는 햇볕에 의해 반짝이고 있는 대기의 먼지 따위가 가장 인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정지했다.
“후. 완벽했어.”
“뭐, 뭐가 완벽해요!! 지금 주인님하고 베아트리스님을 삼켜버리셨잖아요!!!”
“오…….”
상당한 만족감을 가지고 뿌듯한 미소를 지은 채, 흐르지도 않는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서는 헤스티니아.
잠시 하얗게 물들어 정지했었던 이성에 제어를 되찾자마자 극도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며 헤스티니아를 향해 격렬한 지적을 외쳐대는 러스테리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실낱같은 감탄사를 흘릴 뿐인 넬라넬라.
“자, 아가씨들? 우리는 오붓하게 차나 계속 즐겨 볼까요? 아, 나는 정말 천재라니까.”
“뭔가 한 건 해결했다는 듯이 해맑게 웃지 마세요!! 주인님 어디로 보내셨어요!!!”
“오…….”
몹시 우아하고 기품있는 귀부인의 말투를 하고서 차를 마시기 시작하는 헤스티니아.
그녀의 옆에서 울상이 된 채 병아리가 우는 듯 빽빽거리며 항의하는 러스테리아.
여전히 한 줄기 감탄사를 흘릴 뿐인 넬라넬라.
총체적 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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