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번 부활 끝에 마왕님은 환경 보호를 위해 노력한다!-65화 (65/216)

〈 65화 〉 태고의 숲으로 (3)

* * *

대자연이란 말이 세상 어느 장소보다도 잘 어울리는 푸르름이 가득한 숲.

온갖 오염물질과 독소가 세상에 죽음을 내리는 가혹한 현실과 전혀 다른 시간을 살고 있기라도 한 듯, 생기와 활력이 살아 숨 쉬는 이 숲은 현실의 모든 문제에 초탈하여 자유로운 듯 보였다.

오히려 세계에 멸망이 내리기 전인 천년의 과거 시절에서도 볼 수 없었던 멸종한 동식물들도 심심찮게 발견될 정도로 다양한 생명이 평화를 누리고 있었고, 그 모습은 단연 태고라는 이름이 가장 걸맞게 느껴졌다.

이 푸르고 아름다운 생명의 보고(??)는 태고의 숲(Primal Woods)이라 불리고 있었다.

카보니 숲도 녹음이 가득하고 수풀이 우거진 광활한 숲이었는데, 태고의 숲 내부는 카보니 숲보다 훨씬 울창한 광경을 과시하고 있었다.

삼림의 싱그러운 향기가 맑고 선선한 바람에 가득 실려 밀려오는 모습에 네로멜티아 일행은 그녀들이 지나온 이름 없는 황야가 어떻게 생명의 기운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런 광활한 규모의 청정산림을 양측에 끼고 있으니, 그 사이에 존재하는 황야 또한 덩달아 깨끗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보니 숲과 태고의 숲이 양측에 자리하며 오염을 걸러주고, 맑고 깨끗한 대기를 내어주었기에 비교적 깨끗한 토양과 약간의 식물을 싹 틔울 수 있었던 것.

네로멜티아는 지나간 황야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청정한 그 대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오염 수치가 낮은 지역일수록 정화를 위한 삼림이나 식량 확보를 위한 농경지 등의 이로운 영역을 구성하기 수월할 테니 좋은 여건의 정보를 얻은 셈이었다.

“저… 비서관님?”

“아? 네, 말씀하세요!”

한창 주변의 청정한 삼림을 감상하며 나아가는 러스테리아의 뒤로 넬라넬라가 은밀하게 다가섰다.

뭔가 숨기는 듯, 주변에 들리지 않을 작은 음성으로 러스테리아에게 말을 건넨 넬라넬라는 가장 앞선 네로멜티아와 가장 뒤처진 베아트리스를 연달아 곁눈질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 베아트리스님께서… 많이 편찮으신 것 같은데…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 겁니까?”

“아…….”

넬라넬라는 스토니 포트리스에서 보낸 아침부터 줄곧 베아트리스의 위태로운 상태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의 증세가 점차 심해지고, 스스로의 몸도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며 멈춰서는 주기가 늘어가는 것을 보다 못한 넬라넬라는 혹시 아무도 이 상황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정작 넬라넬라는 이 사건의 내막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이 현실을 네로멜티아가 일부러 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눈치만으로도 알 수 있었기에 마왕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음성으로 러스테리아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흐음…….”

러스테리아는 스쳐 지나가듯 짧은 순간으로 베아트리스의 모습을 관찰했다.

자신의 하복부나, 허벅지 혹은 그 가운데의 은밀한 부분을 지그시 눌러가며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모습.

전면이 반으로 갈라진 과감한 구조를 통해, 그 틈으로 길고 매끄러운 다리가 선명히 보이는 랩어라운드 스커트.

그녀가 앞에 두른 앞치마 따위는 실용성을 따지지 않은 장식에 불과했고 가슴 아래부터 하복부 부근까지의 짧은 범위만을 겨우 가린 형태였기에 그녀의 하반신을 훔쳐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평소의 베아트리스였다면 그녀 특유의 조신한 모습으로 스커트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해서 최대한 노출을 차단했을 테지만, 현재와 같이 여유가 전혀 없고 끙끙 앓기까지 하는 상황에서 바른 몸가짐을 바란다는 건 꿈만 같은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흰색 스타킹은 애초에 30데니아 밖에 안 되는 원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녀의 피부를 상당히 적나라하게 투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는 그 스타킹이 흠뻑 젖기까지 한 상황이라 투과율이 스타킹을 착용하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았고, 심지어 스타킹이 그 액체를 가득 머금어 선명한 반사광마저 보여주고 있으니 오히려 스타킹을 착용하지 않은 맨다리보다 더욱 야하고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나아가 그 액체는 그녀가 착용한 검은 단화까지 흠뻑 적시고 있어, 애초에 투박한 무광 재질이었을 그것이 선명하게 빛을 반사하는 모습마저 보이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베아트리스가 비틀거리며 걸어온 길은 지면의 흙이 드문드문 조금씩 젖어있어서, 보는 이가 이 모든 걸 잘못 본 게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마저 아무렇게나 흘리고 다니는 형국이었다.

“다른 이를 선뜻 걱정해 주시는 넬라넬라님의 선하고 순수한 마음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넬라넬라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아…”

“눈치채셨기에 제게만 은밀히 말씀하신 거겠지만, 주인님께서 일부러 방치하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실 거예요. 주인님께서는 넬라넬라님께서 이 상황을 모르고 계시길 바라시니 침묵을 지키시는 걸 테고, 그렇기에 제가 여기서 주제넘게 무슨 일인지 말씀드릴 순 없을 것 같아요.”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매혹적인 눈동자의 깊은 내부, 선명한 육망성이 은은한 빛을 내며 현기(??)를 흘리고 있었다.

들여다볼 수는 있으나 이해를 끌어낼 수 없는 작고도 광활한 세계.

바라보고 있노라면 끝을 모르고 떨어질 것만 같은 깊고 어두운 심연이, 보는 이의 영혼을 탐욕스럽게 어루만지는 느낌을 주었다.

실로 존재를 구현한 몽환(夢?).

보는 이의 내면을 뒤흔드는 그 깊은 소우주를 통해 넬라넬라는 순순히 이 모든 상황을 체념했다.

넬라넬라가 내적으로 겪은 심경의 변화를 읽은 것인지, 러스테리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고 분위기를 환기했다.

“베아트리스님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만 눈치를 채셨고, 증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 안심이네요. 주인님께서 마음 쓰실 정도는 아닌 거예요!”

“… 증상… 말씀이십니까…?”

“자, 자. 주인님의 옆자리가 비었잖아요. 어서 가서 주인님 적적하지 않으시게 대화 좀 나눠보세요. 주인님의 곁을 함부로 비우는 것 또한 불경이라구요?”

“아앗… 자, 잠…!”

환하게 웃으며 활기차게 넬라넬라의 등을 떠민 러스테리아.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넬라넬라는 몹시 당황하는 모습으로 네로멜티아의 곁까지 떠밀려졌다.

누군가 본다면 억지로 떠밀린 것 같은 광경이었으나, 이백 멘톨이 넘는 장신에 근육이 도드라지는 건장한 체격을 지닌 넬라넬라가 비교적 상당히 작은 체구의 러스테리아에게 힘으로 떠밀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러스테리아는 마왕인 네로멜티아나 퍼스트 블러드인 카디스텔라같은 초월자의 특징으로, 소유한 신체와 관계없이 강대한 완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입장조차 아니었다.

러스테리아는 단지 높은 마법 능력과 악마로서의 권능이 뛰어날 뿐인 가냘픈 여성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넬라넬라가 결코 힘에서 억지로 밀린 것이 아니라는 게 더욱 명확한 상황인 것이었다.

“으읏… 폐, 폐하…….”

“무슨 일이야, 넬라?”

낯을 가득 붉히고서 부끄러움이 가득한 모습으로 우물쭈물 두 손을 모은 넬라넬라.

그런 그녀를 애정이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 간드러진 음성으로 대하는 네로멜티아.

몹시 친근한 모습으로 그녀를 반긴 네로멜티아는 넬라넬라의 이름을 반토막 내어 애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 저… 저기… 아으…! 모, 모르는 장소이니만큼… 위험하니…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내심 네로멜티아의 곁이 싫지 않아서 자신을 떠미는 러스테리아의 손길을 제대로 거부하지 못한 채 앞서 나오기는 했는데, 뚜렷하게 이야기할 용건이 없었던지라 말을 심하게 더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어떻게든 없던 용건을 만들어내어 용기 있게 외친 넬라넬라는 누가 보더라도 부끄러워한다는 인상이 확연할 정도로 낯을 붉히고 있었다.

네로멜티아는 그녀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 더욱 진한 미소를 보여주다가 그녀의 심정을 짐짓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이면서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내가 제일 강하니까 오히려 내가 넬라를 지켜주려고 했는데. 어쩌나아?”

“으읏…”

“나를 배려한 넬라의 착한 마음을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몹시 궁색한 이야기였다는 걸 자각한 탓인지, 넬라넬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조금이라도 화술이 괜찮은 이였다면 끝까지 밀어붙이며 충성심 강한 신하의 모습을 보여주었겠지만, 순수한 성격의 넬라넬라는 그러한 융통성이 없어 주눅이 들 뿐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마왕 폐하를 지킨다느니 하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하지 못한 주제에, 누군가에게 떠밀려 나와서 늘어놓은 변명을 끝까지 고수할 정도로 영악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럼 함께 걸어가면 되겠다. 사이좋게. 그렇지?”

“폐, 폐하…!!”

순식간에 넬라넬라의 허리를 감싸 안고 걷기 시작한 네로멜티아.

백팔십 멘톨에 달하는 장신을 가진 네로멜티아임에도, 그녀가 감싸 안은 넬라넬라는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신장을 가졌기에 아무리 네로멜티아가 리드하고 있다 해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위화감이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모양새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음을 느꼈던 네로멜티아는 아예 자신의 머리를 넬라넬라의 가슴에 기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던 넬라넬라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 자신의 어깨에 올려두었다.

“넬라 언니 손이 따뜻하네? 후후후.”

“폐, 폐ㅎ…! 읏…!”

아예 넬라넬라의 가슴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보이기까지 하는 네로멜티아의 짓궂으면서도 애정이 가득 느껴지는 행동에 넬라넬라는 짧은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버벅거리기에 이르렀다.

넬라넬라의 나이는 고작 팔십오 세로 평균 오백 세까지 살아가는 오크로서는 어린 축에 속했고, 오크로서의 평균을 따지지 않더라도 몇천 년을 살아온 마왕이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는 건 명백한 장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넬라넬라는 그저 장난일 뿐인 마왕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진탕하여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가는 것이었다.

분명 자신은 수많은 연애 소설 속 남성들을 보며 고동을 느꼈던 독자였었고, 그 멋진 남성들이 선사하는 낭만의 속삭임에 설레었던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같은 여성인 네로멜티아의 말 한마디 행동 한 번에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는 이 낯선 감정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영문을 몰라 당혹스러웠다.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과 같이 번져나가는 그녀의 감정이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오히려 묘한 기쁨과 안락마저 느끼는 희열이었다는 것이었다.

마왕이 직접 본인의 어깨에 올린 자신의 손을 감히 치울 수도 없어 안절부절못하던 중, 그녀는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매혹적인 감각에 점차 긴장감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보드라웠던 피부는 단지 닿기만 할 뿐임에도 숨이 멎을 듯 기분 좋은 감촉을 지니고 있었다.

은은하게 감도는 따스한 체온은 새벽을 넘어 드리운 아침의 햇볕과도 같이 포근했다.

넬라넬라는 자신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네로멜티아의 어깨를 슬슬 어루만지고 있다는 사실에 아찔할 정도로 놀라버렸다.

감히 신하가 주군의 신체를 마음대로 어루만지다니 있을 수 없는 불경이라 생각해 황급히 손을 치우고자 마음먹었던 순간, 네로멜티아가 자신의 어깨를 감싼 넬라넬라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어 덮어버렸기에 더욱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까운걸.”

“… 폐하…?”

“이렇게 귀엽고 아름다운데, 정작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아서.”

그저 무심히 흘러가는 듯 지나간 네로멜티아의 이야기에 넬라넬라는 다시 번민에 휩싸였다.

무수한 소설 속에서 자신이 지켜본 오크는 흉측한 괴물 취급을 받았을 뿐이었다.

아무리 오크에게 호의적인 소설도 결코 오크를 주인공으로 세우진 않았으며, 그저 비중 없이 지나가는 배경으로 사용될 뿐이었다.

주인공은 언제나 휴미안, 데모니안, 엘프.

기껏해야 머메이드, 요정, 천사와 악마.

오크는 추악한 괴물 아니면 우스꽝스러운 광대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럼 자신에게 끊임없이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마왕은 무엇인가.

많은 소설들이 오크는 추하다고 손가락질했기에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아왔고, 오랜 시간을 마음 아파하며 지내왔었다.

마왕 폐하가 너무 자애로운 걸까.

소설 밖의 세상이 다른 걸까.

“어머! 마왕님이시네요?”

불현듯 들려온 간드러진 여성의 음성에 넬라넬라는 자신의 복잡한 상념을 깨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무성한 수풀만이 가득한 가운데 매력적인 여성의 음성만이 들려올 뿐인 상황.

일행은 자리에서 멈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네로멜티아는 미간을 조금 좁히며 복잡한 심경을 있는 그대로 표출했다.

“역시 너였구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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