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태고의 숲으로 (1)
* * *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연회도 서서히 날이 밝아올 무렵이 되자, 모두가 달콤한 잠에 빠지며 끝이 났다.
밤새워 술을 마시며 연회를 즐겼기에 공식적으로 오늘은 휴일이 선포되었고, 성의 경비나 식사 준비를 위한 필수 인력들 외에는 모두가 일을 쉬었기에 각자 마음 놓고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거나 연무장에 그대로 널브러져 곯아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꿋꿋이 식당에 들어가 아침 식사를 챙기는 이들이 있었는데, 네로멜티아를 위시한 마왕군의 간부들이었다.
“흐흐흥~ 흐흐흐흥~”
기분이 너무 좋아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였던 러스테리아는 간밤의 행복한 순간에 피로조차 싹 날아간 건지, 피부가 매끄럽고 탄력이 넘칠 지경이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해 마지않는 주인의 손길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지고의 쾌락을 경험한 것이 행복했고, 서큐버스로서 주인과의 성교를 통해 막대한 정기를 취하기도 했으니 몸 상태 또한 최상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많은 술을 들이켰음에도 막강한 신체를 가진 덕분에 멀쩡했던 오운과 충분히 즐길 만큼 즐기고 수면을 취했던 넬라넬라 역시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잘 절제해가며 술을 마셨던 크로포드와 모카는 연회가 파하는 순간까지 현장을 지켜야 했던 이유로 잠은 잘 수 없었으나 적어도 숙취라는 건 전혀 없었기에 모카의 경우로는 조금 피곤할 뿐이었고, 그나마도 마왕과 권속의 계약을 맺은 크로포드는 그의 상당한 신체 능력 덕에 일말의 피로조차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반면 데모니안이나 휴미안에 비하면 강한 신체를 가졌으나, 오우거에 비하면 그다지 강하다고 할 수 없는 종족인 오크 베리베리의 경우에는 다소의 숙취와 상당한 피로가 쌓여 기운 없이 비실대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편이기도 했기에 더더욱 힘든 상황이었는데, 그나마 마왕과 권속의 계약을 맺어 능력이 상당하게 향상되었기에 버틸 수 있는 것이었다.
나아가 권속의 계약은 맺지도 않았고 약소한 신체를 가진 종족인 고블린 아티스의 경우는 말 그대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름대로 강인한 오크인 베리베리의 페이스를 따라가며 밤새워 술을 마셨다가, 피로고 뭐고 숙취를 제대로 경험하며 죽을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 식사를 맞이하기 전에 다섯 번이나 토악질을 하고 왔음에도, 그의 위장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극렬한 통증에 몸부림치며 현기증과 오한에까지 시달리고 있었다.
애초에 나약한 종족인 고블린인데다 고블린의 한계 수명이라 불리는 오십 세의 노쇠한 몸이기도 한 만큼 아티스의 상태는 언제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많이 힘드냐?”
“끄흐으으으… 일생 이토록 죽이 잘 맞는 친구는… 처음인지라……. 노쇠한 몸 생각도… 못하고… 끄흐억…!! 면목이… 없습니다…….”
티끌만큼의 기력도 없이 다 죽어가는 기진맥진한 몸이면서도 간헐적으로 강렬하게 발산해대는 헛구역질이 위태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의 위중한 모습을 지켜보던 네로멜티아는 한숨을 푹 쉬고서 그에게 마법을 몇 가지 시전해 주었다.
“큐어(Cure). 리커버리(Recovery). 힐링(Healing).”
알코올 분해를 위한 큐어와 피로 회복을 위한 리커버리, 거기다 신체의 치유를 위한 힐링.
종류별로 회복마법을 사용해주는 네로멜티아의 손짓 몇 번에 아티스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활기를 되찾았다.
“오오오!! 이, 이런 세상에!! 이것이 마법의 힘!! 감사합니다, 마왕 폐하!!”
“마왕이 신하의 숙취 해소 뒤치다꺼리나 해줘야 한다니. 애석하다, 정말.”
“오호호호! 그런 말씀 마시지요! 신하를 긍휼히 여기는 것 또한 지배자의 덕목! 하찮은 고블린이라 할지라도 은혜에 감격하여 더욱 열심히 일해 보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끙끙 앓으며 다 죽어가던 고블린 어디 갔냐는 듯, 금세 멀쩡해진 아티스는 평소의 능글맞은 모습을 되찾았다.
그 모습이 싫지 않았고, 오히려 유쾌한 기분이 들었던 네로멜티아는 능청스러운 그의 언변을 감상하다 문득 시선을 돌려 베리베리를 바라보았다.
아티스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 역시 상태가 좋지는 않아 보였다.
“… 너도 해줄까?”
“윽! 으흠!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큐어. 리커버리. 힐링. ……. 체면, 예의, 눈치 살피지 말고 바라는 거 있으면 그냥 얘기해. 속으로만 끙끙 앓는 모습이 더 보기 싫어.”
“으헛! 폐하의 은혜에 깊이 감복했사옵니다! 친히 신하를 돌보시는 그 자애! 휴미안에게 대지의 여신이 있다면 헤모니겐트에는 루이나의 여신이 있는 것이로군요! 껄껄껄껄!!”
끙끙 앓으며 식사나 제대로 할까 싶던 오크 어디 갔냐는 듯, 금세 멀쩡해진 베리베리는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을 되찾았다.
분명 그의 단련된 신체를 보면 오크 로드답게 오크치고도 상당한 무위(??)와 신체 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고작 하룻밤 진탕 마신 술에 몸 상태가 나빠질 정도인 것을 보면 분명 초월적인 힘은 낼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가 네로멜티아와 맺은 권속의 계약은 점차 그를 강대하게 만들어 줄 것이었고, 그의 지나간 전성기 시절의 능력 그 이상을 손에 넣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였다.
그 점은 그와 같이 권속의 계약을 맺은 오운과 넬라넬라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현재가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 나이이지만 현재보다도 더욱 초월적인 힘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문제는 아티스였다.
고블린의 한계 수명이라는 오십이 그가 가진 연령이었다.
당장 언제 죽더라도 노화로 인한 자연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긋한 나이의 고블린.
아무래도 조금은 급한 것을 알기에 전날 서약식에서 그에게도 겸사겸사 권속의 계약을 맺어줄까 생각도 했으나, 애초의 계획으로는 그가 고블린이라 하여 무시하는 이들이 혹 있을까 싶어 그가 명확한 공을 세우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의 권위를 세워주며 계약을 맺어줄 생각이었기에 조금만 더 미루자고 마음을 바꿨었다.
그에게 더욱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의 권위를 높여줄 하나의 장치로써 염두에 둔 셈이었는데, 이후 크로포드의 의미심장한 보고도 있고 해서 그의 신상이 명확해질 때까지 계약을 더 미루는 것으로 변경했다.
물론 상당한 확률을 지닌 예상되는 바가 존재했고, 네로멜티아의 예상대로라면 그의 사조직 ‘유토피아’는 위협과는 거리가 먼 단체일 것이었다.
그러나 일말의 가능한 위험성조차 완벽하게 짚고 넘어가기 위해 계약을 미룬 것이었다.
걱정되는 것은 그 의심이 해소되기 전에 아티스가 숨이 넘어가는 최악의 상황.
그를 위해서라도 유토피아에 대한 조사는 속히 이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로즈메리와 감자, 그리고 사과 설탕 절임을 넣고 끓인 스튜입니다.”
식사로는 다소 가볍고 담백한 요리가 내어졌다.
약간의 소금 간과 사과 설탕 절임이 만들어 낸 깊은 단맛.
재료만 보면 이것을 과연 스튜라고 부를 수 있나 싶었으나 숙취를 생각하여 기름진 육류 대신 감자를 넣은 것으로 추정되었고, 빅 보어의 담백한 뒷다리살을 아주 약간 다져 넣어 구색을 맞춘 것으로 나름대로 스튜라고 부를 수 있기는 하다 싶었다.
심지어 그 추정이 맞는 모양인지 재료는 모두 숙취에 좋고 장기에 자극이 없는 것뿐이었다.
애초에 숙취가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인 네로멜티아였고 술은 거의 마시지도 않은 상황이었으나, 나름 체계적이고 친절한 배려가 있는 이 식단이 몹시 마음에 들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스푼을 들었다.
마왕이 식사를 시작하자 다른 이들 역시 식사를 시작했다.
애초에 상태가 최상이었던 러스테리아는 달콤한 스튜가 너무 마음에 들어 배시시 웃고 있었고, 상태가 나쁘지 않았던 크로포드, 오운, 넬라넬라, 모카 역시 식사에 거침이 없었다.
마왕의 은혜로 건강을 되찾은 베리베리와 아티스 역시 마찬가지로 행복한 식사를 즐기고 있었는데, 단 한 사람만이 제대로 스푼도 들지 못한 채 신체를 떨고만 있었다.
“베아트리스님. 어딘가 안 좋으신 겁니까?”
“… 읏…! 하아… 아, 아닙니다…….”
최대한 상태의 이상을 감추려는 듯 떨려오는 신체를 어떻게든 붙들고 있는 모양이었으나, 그녀의 떨림이 너무나 선명하고 수상한 반응까지 보이고 있어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몹시 불안정해 보이는 베아트리스의 모습이 의아했고 걱정도 들었던 넬라넬라가 선뜻 상태를 물어왔지만, 베아트리스는 뭔가 견디기 버거워 보이는 기색으로 부정의 뜻을 밝힐 뿐이었다.
당사자가 직접 말해주지 않는다면 결코 상황을 알 수 없었던 넬라넬라는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가지다가, 베아트리스의 말을 믿고 관심을 끊은 채 식사를 이어갔다.
네로멜티아는 제대로 스튜를 뜨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인 베아트리스의 애처로운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 넬라넬라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관심을 끊고서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스토니 포트리스의 연무장.
지난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이어진 길었던 연회가 모두 마무리되어 허전해진 임시 연회장은 아직까지 그 꾸며진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고, 단지 전날과 다른 점이라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 어질러져 있다는 점뿐이었다.
그 어수선한 공터의 가운데에 마왕과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주군. 진정 안내역이 없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정 누군가 부담되신다면 코(Ko)라도 데려가십시오.”
“걔는 고개 끄덕거리는 거 말고는 하는 게 없잖아. 무슨 소리야, 오운.”
“아니… 우리 같은 수장들은 중요한 역할이 있어서 안 되고… 위치를 아는 오우거 정찰대는 위험에 빠질까 봐 안 된다고 하시니…….”
“그럼 차라리 돌격대장 휴고를 얘기하지 그랬어.”
“아니… 그 멍청한 놈은 지 맘대로 날뛰기 십상이라 좀…….”
단순무식하고 근육밖에 모르는 바보라는 평가가 지배적인 오운에게조차 신용을 받지 못할 정도로 평가가 바닥을 치는 돌격대장 휴고는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그때 베리베리가 오운을 지나쳐 마왕의 앞에 나아가 섰고, 조심스럽지만 고풍스러운 말로 그녀를 설득했다.
“각 수장들은 유사시에 지휘를 해야 하니 자리를 비울 수 없고, 일개 정찰대는 능력이 모자라 위험에 빠질 수 있으니 안 된다는 말씀 깊이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 여동생은 어떠신지요?”
“넬라넬라!?”
“마침 오늘은 폐하께서 내리신 자애로운 명에 따라 경비와 식사 준비 인원 외에는 모든 이들이 휴식을 취하는 날이며, 오크 공병대 역시 화덕에 불도 지피지 않은 채 곯아떨어져 있습니다. 아무리 공병대장이 중요한 직책이더라도, 일하지 않는 휴일에 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네로멜티아는 뭔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묘한 기대감에 젖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기대감을 감지한 이는, 눈치가 비상한 아티스와 모카 정도였기에 다른 이들은 마왕이 넬라넬라를 걱정하여 당황하고 있다는 것만 인지할 수 있었다.
신하의 안위를 걱정할 뿐인 자애로운 마왕으로서의 모습만 볼 수 있었던 베리베리는 네로멜티아가 자신의 여동생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자신의 의견을 더욱 강하게 피력했다.
“‘드레스를 입은 고결한 레이디가 되어라! 그것이 싫다면 늠름한 기사가 되어라!’ 그것이 귀족으로서의 의무라 가르쳤고, 동생은 실제로 오크 중에서 가장 강한 저와 앞뒤를 다툴 수 있을 정도의 무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해 공병대를 맡고 있긴 하지만, 넬라넬라 역시 따를 자 없는 강자입니다. 적어도 위기 시에 맥없이 당하는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소중한 여동생인데…….”
“소중한 가족 이전에 귀족의 의무가 앞설 뿐입니다! 그것이 백성들의 위에 선 자의 숙명!”
“그, 그래? 나야 행복… 아니… 나야 좋지… 좋기는 한데…….”
베리베리의 강경한 열변에 넘어가 납득해 버린 네로멜티아.
마왕의 긍정적인 반응에 베리베리는 몹시 기뻐하며 넬라넬라에게 속히 무장을 마친 뒤, 짐을 챙겨오라고 지시했다.
넬라넬라의 의견은 단 한 번도 묻지 않고 강행한 일이라, 네로멜티아는 문득 그녀의 반응이 어떨지 걱정되었으나 넬라넬라도 내심 싫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의 숙소에 달려갔기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경애하는 마왕 폐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쁨에 동생의 능력에 관한 칭찬을 가득 늘어놓기에 바빴던 베리베리는 네로멜티아가 못 이기는 척했을 뿐 속으로는 기뻐서 환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사실 네로멜티아의 속내를 모르는 건 대부분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유일하게 눈치챈 두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있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저 모카가 감흥 없는 눈빛으로 마왕을 바라보고, 영감이 떠오른 아티스가 품속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열심히 펜대를 놀렸을 뿐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어때? 기분 좋지?”
“최고예요, 폐하!! 하늘을 나는 건 처음인데! 너무 기분 좋아요!!!”
별이라도 반짝이는 듯 눈을 한껏 빛내며 환한 웃음을 짓는 넬라넬라.
그녀는 현재 네로멜티아의 품에 안겨 높은 하늘을 비행하고 있었다.
처음 경험해보는 짜릿한 비행의 순간에 평소의 딱딱한 말투조차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해맑게 웃고 있는 넬라넬라의 순수한 모습은 네로멜티아의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감동을 주고 있었다.
사실 출발 전 그녀를 대기의 오염으로부터 지켜줄 정화 마법을 시전했을 때, 비행 마법을 같이 시전해 주었더라면 네로멜티아의 조작이 필요하다는 전제 조건이 따라붙기는 해도 넬라넬라 혼자서 비행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비행 마법을 생략한 채, 그녀를 품에 안은 건 당연하게도 네로멜티아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귀엽고 아름다운데, 순수하고 활기차기까지…! 사랑스러워!!!’
넬라넬라를 품에 안은 네로멜티아는 넬라넬라의 건강한 신체가 맞닿으며 느껴지는 짜릿한 감각을 만끽했고, 눈으로는 그녀의 순수한 매력을 감상하고 있었다.
친절한 마왕 폐하에게 아무런 의심도 하지 못한 채, 비행의 매력에 푹 빠진 넬라넬라는 자신을 안고 있는 네로멜티아의 손이 각각 자신의 젖가슴 측면과 탄탄한 허벅지를 어루만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고, 네로멜티아의 눈이 흑심 가득한 빛을 띠고서 자신을 향해 욕망의 불길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함께 비행하는 두 사람이 각각의 행복을 즐기고 있을 무렵, 그 뒤를 따르던 러스테리아는 사뭇 화기애애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감동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속하고 음탕한 악마인 서큐버스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한 러스테리아의 눈에는 그 앞에 펼쳐진 광경이 그저 자애로운 마왕과 순수한 아가씨의 낭만적인 비행으로만 비추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앞선 세 사람이 저마다의 이유로 행복을 느끼고 있을 때, 베아트리스는 이들 대열의 가장 후위에서 제대로 올곧게 나아가는 건 고사하고 균형조차 잡지 못해 연신 휘청거리며 위태롭게 비행하고 있었다.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는 이가 있다면 그녀의 수상한 모습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신체의 떨림이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심지어 뭔가 견디기 힘겨운 것을 어떻게든 참아내고 있는 모습으로, 그녀는 오른손을 꼬옥 쥐어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둔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왼손은 은근히 하복부와 그 아래의 은밀한 부위를 문지르며, 이따금 신체를 움찔하며 떨어대고 간헐적인 신음과 가쁜 호흡을 보이고 있었다.
매력적인 30데니아의 흰색 스타킹은 스커트 속에서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투명한 액체에 흠뻑 젖어있었고, 그 액체는 허벅지와 스타킹을 적시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의 검은 단화까지 흘러내려 머나먼 지면을 향해 하염없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 크읏… 흐으읏…!”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신음을 어떻게든 참아가며 견디고 있던 베아트리스는 가끔 주인에게 무언가를 전하려 입술을 달싹였으나, 이내 고개를 떨군 채 그 견디기 힘든 괴로움과 또다시 사투를 벌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주인은 무정하게도 단 한 번의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자신의 품에 안겨 기뻐하는 순수한 아가씨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