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마왕의 권속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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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속 계약을 준비하며 마력을 끌어올리는 네로멜티아.
그녀의 머리 위로 연단을 뒤덮고도 남을 정도의 거대한 마법진이 허공에 구성되며 그 복잡한 마력 회로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 강대한 마력의 운용은 루이나 특유의 어두운 빛이 가득했고, 게걸스럽게 주변을 집어삼키는 모양으로 연무장 일대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루이나의 아래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은 그녀의 루이나가 얼마나 강대하고 웅장한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기에, 오크나 오우거는 일생 처음 보는 마왕의 위용에 저절로 무릎을 꿇으며 경배하기에 이르렀다.
네로멜티아가 전방에 손을 휘두르며 마력을 흩뿌리자,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베리베리와 오운, 그리고 넬라넬라의 가슴에 각각의 작은 마법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작은 마법진은 눈이 부실 정도의 광휘를 가졌고, 마법진에 가득한 루이나의 타오르는 듯 이글거리는 기세는 낙인을 찍기 위해 존재하는 금속 도장이 새빨갛게 달궈진 것과 모습이 흡사해 살벌하게도 느껴졌다.
언뜻 보면 마법진이 보이는 모습 그대로 권속 계약 역시 노예의 낙인을 찍는 것과 같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흘러나온 네로멜티아.
대부분 헤모니겐트의 주민들은 마왕이 선사하는 권속의 계약에 상당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드높은 마왕의 권좌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그 존재를 보필할 수 있다는 영광.
스스로 가진 종족적 한계를 벗어나 더욱 우월한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향상심.
그리고 모든 생명이 가진 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욕망.
분명 권속의 계약도 만능은 아니었기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거나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건 막을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수명이 무한정 늘어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마왕이 선사하는 권속의 계약은 루이나의 아래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선망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그것이 꿈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녀와의 계약을 거절한 이는 존재했었다.
마왕의 전속 메이드, ‘베아트리스 더 매직 돌’의 창조자.
헤모니겐트 최고의 마도 공학자이자 에고 돌의 장인.
로널드 거트만.
그의 존재가 소중했던 점차 네로멜티아는 볼품없이 늙어가는 그에게 몇 번이고 권속의 계약을 제시했지만, 번번이 그는 마왕의 손길을 거절했다.
심지어 조금은 화를 냈었던 적도 있었다.
그 당시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네로멜티아가 하루는 그를 붙잡고 진중하게 이유를 물어봤었고, 그 역시 진중한 모습으로 자신의 의지를 전했다.
그리고 둘은 진심을 가지고 서로에게 부딪쳤었다.
‘이건 나의 인생일세, 친구. 태어나는 건 나의 의지가 아니었으나, 이 일생을 땀 흘려 일궈온 건 오로지 나라는 존재 하나일세. 그렇다면 내 인생의 종막 역시 나의 것이지.’
‘긴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나쁜 거야!? 오래 살면서 함께 즐거운 것이 최고잖아!’
‘그래, 그대도 잘 아는군. ‘오래’라고 말할 뿐 ‘영원히’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대와 계약을 맺고 무한의 수명을 가지면 어떻게 되는가. 영원불멸할 수 있나? 그것 또한 학자로서 호기심이 동하긴 하네만, 그런 기한 없는 인생은 가능하지도 않겠으나 일단 사양일세. … 이봐. 영원한 수명이라는 건 스스로 마지막 순간을 택할 기회를 무기한 박탈당하는 것과 다르지 않네. 그대가 나를 좋아한다는 건 잘 아네만, 마왕에게는 마왕의 생이 있고 한낱 데모니안 공학자에게는 그에 맞는 생이 있는 거야.’
뭐라고 더 반박하고 싶었던 네로멜티아는 치밀어 오르는 말을 애써 삼켜야 했었다.
그는 자신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네게도 영생은 어울린다는 등의 설득을 하려다 경솔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침묵을 지킨 것 역시 그의 저의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일생의 종막을 선택할 자유만큼은 친애하는 친구인 자네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네. 이건 오로지 나의 것이야. 나만의 것이지.’
정말이지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위대했던 친구.
노쇠한 그의 모습과 대비되게 그의 눈빛은 생기와 활력이 가득했고, 인생의 아름다운 마지막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잠시의 회상을 거친 네로멜티아는 그리운 추억에 웃음이 나면서도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져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다.
로널드의 오래된 시신을 마주하면서 끓어오르던 비탄의 격정은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았고,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들쑤시는 상실감이 되어있었다.
이어서 로널드와의 추억을 회상하다 보니 오늘의 서약식을 거행하기 전, 그의 일생 역작이자 그의 딸이었던 베아트리스가 한 이야기 또한 머릿속에 떠올랐다.
‘주인님. 이번에는 권속들을 확실히 제어할 수 있는 마법진을 구성하시길 추천드립니다.’
‘무슨 말이야? 제어라니?’
‘주인님을 죽음까지 몰고 간 배신자. 마왕 친위대 ‘콰르텟(Quartet)’의 게르딘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런 일은 다시 없어야 할 것입니다.’
크로포드의 이야기를 듣기로 마왕성의 배신자는 마왕 친위대 콰르텟의 일원 ‘게르딘 로먼(Gerdin Roman)’이었다고 했다.
탐욕스럽게 그지없었던 그 드워프가 언젠가는 사고를 칠 줄 알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크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었다.
콰르텟의 단장이 하도 강력하게 요구하니 권속의 계약을 맺어주고 친위대로 삼아 등용한 것이었는데, 이 선택이 헤모니겐트의 멸망을 넘어 테라리스의 멸망이 되어버렸고 이는 크나큰 실책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었다.
‘계약을 위한 마법진에 ‘주인님께 감히 반감을 가지면 심장이 터지는 술식’이라던가, ‘주인님께서 바라시는 순간 뇌가 파열하는 술식’이라던가…’
‘잠깐! 잠깐!! 그 예쁜 입으로 그런 무서운 소리 서슴없이 하지 말아 줄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참사를 이야기하는 베아트리스에게 적잖이 당황하며 그녀를 제지했으나, 주인의 요구에도 베아트리스는 눈빛의 기세를 꺾지 않고 있었다.
본래라면 주인의 말을 절대적인 규칙으로 삼아 지키던 그녀가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는 것에서, 네로멜티아는 베아트리스가 그만큼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조건 제약의 장치를 마련하시길 부탁드립니다. 감히 비천한 인형 주제에 만물의 위에 군림하시는 주인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언제든 이 하찮은 목숨 거두셔도 저는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주인님께서 분풀이로 저를 짓밟아 부수시고 불태우시더라도 저는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지만, 주인님을 잃는 슬픔만큼은 다시 겪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하찮은 종의 간청을 들어주십시오.’
그녀의 강한 의지가 앞선 이야기에 네로멜티아는 그저 비천하다느니 하찮다느니 하는 자기비하는 하지 말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소중한 존재라며 끌어안아 주면서도 정작 그녀가 꺼낸 이야기의 본론에는 답변해주지 못했었다.
겉치레라도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를 해야 할까 싶었으나, 자신의 가슴 위로 뚝뚝 떨어져 흐르는 베아트리스의 눈물이 느껴지자 한마디도 더하지 못한 채 조용히 그녀를 보듬어 주었을 뿐이었다.
‘아버지와 딸이 너무 다르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은 있어도, 딸이라서 다른 것인가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 네로멜티아.
그 허술한 잔웃음은 자조적인 감정이 함께 묻어나고 있었다.
어느덧 계약의 마법진이 완성되며, 이전보다도 더 찬연한 광휘가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약자들 각자의 가슴 위에 자리하던 작은 마법진들이 그들의 가슴을 뚫고 들어가 심장에 안착했다.
생살을 태우며 낙인을 찍듯 심장에 각인되어가는 계약의 마법진은 상당한 통증을 주고 있었고, 누구나 인정할 만큼 강직한 성격을 지닌 베리베리와 오운, 그리고 넬라넬라 역시 식은땀을 흘리며 미간을 깊게 좁히고 있었다.
고통을 견디기 위해 전신에 힘이 들어가고 어느새 이를 악물기까지 한 이들은 머지않아 점차 편안한 기색을 되찾아갔다.
그리고 루이나의 어두운 빛이 가득한 허공의 마법진이 사라졌고, 그들 심장에 각인된 마법진들만이 남아 타오르듯 빛을 뿌리고 있었다.
심장에 각인된 마법진의 강렬한 빛은 그들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고, 머지않아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빛이 된 것처럼 모든 것이 찬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눈이 부셔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던 루이나의 빛은 어느새 점멸하는 등불이 되었고, 서서히 존재감을 지우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권속의 계약이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네로멜티아는 나직이 계약자들을 향해 말했다.
“마왕의 권속이 된 것을 환영한다. 그대들은 무대의 종막이 오는 그날까지 자유롭게 살지어다. 그것이 짐이 내리는 첫 번째 명이니라.”
자신의 신체에 변화를 느끼며 정신을 다 차리지 못한 그들에게 명을 남기고 미련 없이 연단을 내려온 네로멜티아.
연단의 아래에는 베아트리스가 조용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분명 주인에게 묻고 있었다.
자신의 간청을 들어주었느냐고.
“미안해, 베아트리스.”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를 지나쳐 사라지는 네로멜티아.
주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베아트리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자애가 가득하신 분……. 모진 일은 하지 못하시는군요.”
베아트리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연단의 위에서 오운의 우렁찬 함성이 들리고, 군중들의 환호성이 주변 일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군중이 만드는 거대한 울림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요란함에도 베아트리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자아는 오로지 주인만을 위해 가동하고 있었고, 그녀의 정신은 오로지 주인에 대해서만 정보를 출력하고 있었다.
“더러운 일은 제가 자처하겠습니다. 주인님께서 그 아름다운 손에 피를 묻히실 일이 없으시도록, 필요하다면 제 손에 피를 묻힐 것입니다. 저의 모든 것이 피로 물들고, 더러운 피비린내가 잔뜩 배어들어 버려지더라도…….”
어느새 러스테리아가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귀엽게 네로멜티아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마치 귀여운 딸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듯, 네로멜티아는 자애로운 미소를 띤 채 그녀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뒤에서는 군중의 환호, 앞에서는 주인과 하인의 사랑.
그 가운데에서 외로이 홀로 선 베아트리스는 본연의 무미건조한 모습을 되찾고, 주인에게 조용히 걸어가며 한마디의 의지를 말했다.
“모든 것은 주인님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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