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마왕의 권속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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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한 침묵이 무겁게 내리깔린 연무장에 오로지 연단만을 바라보는 오크 군중들.
어느새 소식을 들었는지 오우거들마저 자신들의 생업을 내려두고 연무장 한편에 모여 있었다.
이웃이긴 하지만 오크와 오우거는 서로 티격태격하기 일쑤인 관계였기에, 오우거 전원이 자신들의 마을을 비우고 오크의 성에 와 있었던 적은 사례가 거의 없는 일이었다.
가장 근래라고 해봐야 그 옛날 베리베리가 오크 로드의 자리를 물려받을 때뿐이었고, 그 반대로 오크들이 오우거 마을로 몰려왔었던 때 역시 오운이 오우거 치프의 자리에 앉았었을 때뿐이었다.
그 외에는 서로 카보니 숲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한정된 자원을 함께 나누며 살고 있으니 크고 작은 다툼이 벌어지기 일쑤인 관계였기에 이런 대규모의 만남은 없다시피 했었다.
먹는 만큼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많은 식량을 소비하는 오우거에 대한 불만과 큰 공방을 운영하며 목재를 소비해 카보니 숲의 영역을 위태롭게 만들던 오크에 대한 불만.
그나마 베리베리가 오크 로드에 취임하고, 이어서 다소 온건한 생각을 가진 오운이 오우거 치프에 오르며 양측은 극적으로 화합해 큰 다툼이 사라졌을 뿐, 서로에 대한 불만은 여전한 상황이었다.
오크들이 농경을 꾸리며 생산된 곡식과 높은 기술력이 집약된 공방의 생필품을 오우거에게 나누어 주면 오우거들은 그들이 사냥한 동물들을 나누어 주고 때로는 강한 힘이 필요한 대규모 공사에 그들의 힘을 보태 주었다.
그런 식으로 평화를 찾은 두 종족의 세월 속에서 서로에 대한 다툼은 사라졌으나, 각자 많이 소비하는 자원에 대해 가지게 되는 서로에 대한 불만만큼은 종식되지 않아 왕래를 많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오우거들이 현재 오크의 성에 모두 모였고, 한 편에 끼리끼리 모여 있을지언정 오크 군중의 대열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분명 기념비적인 순간이었고, 앞으로 연단에서 벌어질 사건 역시 그러한 것이었기에 오늘날은 분명 기록에 남겨져 대대손손 길이길이 전해져 내려갈 하나의 큰 역사의 순간이었다.
“짐이 자리를 비운 기나긴 세월 동안 잘 버텨주었다. 멸망이 만연한 테라리스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각고의 노력을 기(?)하여 잘 살아남아 준 그대들의 노고를 가슴 깊이 치하하노라. 그리고 짙은 죽음의 손아귀에서부터 그대들을 지켜준 카보니 숲의 은혜에 감사한다. 마왕으로서의 직책을 잠시 내려놓고 대지의 여신 아스타(Astar)에게 감사를 하고 싶을 정도다.”
카보니 숲의 정화된 환경에 대해 감사를 전하며, 아스타에 대한 감사의 말로 이어진 마왕의 연설.
신들이 보낸 용사에게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12신 중 하나인 아스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마왕의 말에 좌중은 적잖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실 네로멜티아는 모든 신들을 증오하고 있진 않았고, 신들 역시 모든 신이 마왕을 적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왕을 적대하지 않고 세상 만물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보듬는 것이 여신 아스타였고, 그렇기에 그녀의 무한하고도 조건 없는 사랑을 칭송하며 대지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네로멜티아 역시 세상 만물을 이롭게 하는 대지의 여신 아스타에게 굳이 말하자면 증오보다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마왕 하면 신에 대한 적대자라는 생각을 품기 마련이니 그녀의 발언은 군중에게 몹시 파격적인 이야기였던 것이었다.
“이 순간이 있기까지 이곳 카보니 숲의 모두가 노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짐은 그 중 특별히 치하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 긴말은 좋아하지 않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연단에 오르도록.”
그리고 약속된 이들 셋이 연단에 차례대로 올랐다.
가장 앞에 선 이는 잘 갖춰진 품격이 도드라지는 예복을 착용한 베리베리 벡 베그리트.
그가 착용한 고풍스러운 예복이 아니더라도, 그의 품새는 하나하나 사소한 부분마저 예스러운 구석이 있어 귀족적인 면모를 면밀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일말의 허술한 구석 없이 예의를 완벽하게 지키면서도 군중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는 배려까지 잊지 않았다.
마왕의 연설에 엄숙함을 지키고 침묵을 고수하던 군중 안에서 그의 손짓 한 번에 여기저기 여성들의 탄성이 쏟아져 나온 것은 단지 귀의 착각이 아니었다.
신사의 품격을 완벽히 지키는 중년 남성에 대한 낭만은 어느 시대든 있다.
두 번째로 올라선 이는 거대한 멧돼지 가죽 몇 개를 이어서 만든 모피 조끼와 모피 바지를 입고 있는 오운.
그 딴에는 가장 잘 차려입은 것이었으나 그도 눈이 있었고 자신이 가진 한 줌도 안 되는 예의 따위는 베리베리의 귀족적인 기품에 비하면 보잘것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의 모습이 비리비리하다며 깔보기 일쑤였으나, 오늘만큼은 마왕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는데 베리베리에 비하면 하찮은 행색에 불과했으니 기가 팍 죽어버렸고 그의 고풍스러운 자태가 일생 처음으로 부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거기다 연회장에서 마왕에게 크게 혼나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주눅이 들어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순간 군중의 한 편에서 거센 오우거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자신을 향해 열렬한 응원을 쏟아낸 오우거들을 발견한 오운은 그제야 흡족한 웃음을 보였고, 연단에 올라서자마자 자신의 터질 듯 우람한 근육을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하며 자신만만하게 뽐내기에 이르렀다.
세 번째로 올라선 이는 베리베리가 입은 것과 비슷한 예복을 착용한 넬라넬라.
예의를 지켜야 하는 자리에서 예복을 입는 건 이상할 일이 전혀 없는 것이었으나, 그녀가 착용한 예복은 분명 바지가 존재하는 남성용 예복이었다.
심지어 베리베리가 착용한 귀족적 기품이 넘치는 예복과 달리 정갈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흘러 차라리 군인의 정복(??)에 가깝다는 인상이 강했다.
거기다 넬라넬라 본인 역시 올곧게 뜬 시선과 함께 절도 있는 자세로 연단에 오르고 있어,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는 강직한 장군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모습에 오크 군중들의 사이에서 여성들의 황홀한 탄성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고 남성들은 선망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오우거들 역시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렇게 자리의 주인공이 모두 연단 위에 올랐고, 네로멜티아의 앞에 나란히 섰다.
한 명씩 연단에 오를 때마다 점차 시끄러워지고 있었던 군중은 다시금 침묵을 되찾았고, 네로멜티아 역시 약간의 시간을 두고 모두가 충분히 주목할 수 있도록 환기의 시간을 배려했다.
그리고 마왕의 선명한 음성이 적막을 가로지르며 모두에게 울려 퍼졌다.
“오크 로드이자 스토니 포트리스의 영주, 베리베리 벡 베그리트 남작은 짐 앞에 서라.”
마왕의 지엄한 명을 받은 베리베리는 즉시 앞으로 걸어 나왔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가슴에 한 손을 올려두고 머리를 숙였다.
역시나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예법이었고, 네로멜티아는 왕도 국가도 아무것도 없었던 세계에서 어떻게 이런 완벽한 예법을 익힐 수 있었는지 잠시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속내는 결코 드러내지 않았고, 네로멜티아는 마왕으로서의 근엄한 모습을 유지하며 의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그대는 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가.”
“저의 모든 것을 바쳐 루이나의 여신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폐하를 사랑하는 만큼 백성들을 사랑할 것이며, 폐하의 백성들이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을 평화의 시대를 위해 견고한 방패가 되어 폐하를 보필하겠나이다.”
짧지만 확고한 의지가 전해지는 베리베리의 답에 네로멜티아는 만족할 수 있었다.
특히 주군을 사랑하는 만큼 백성들을 사랑할 것이라는 대목에서, 자신의 주군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까지 확연히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더더욱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오우거 치프 오운은 짐 앞에 서라.”
마왕의 명에 오운은 베리베리의 옆에 다가와 그의 모습을 보며 똑같은 자세를 만들었다.
육백 멘톨에 육박하는 거대한 오우거인 오운은 단 한 걸음만 내딛고서도 베리베리와 똑같은 위치에 설 수 있었고, 베리베리의 자세를 베끼며 똑같이 무릎을 꿇었음에도 전혀 다른 모습처럼 보일 정도의 거구였다.
“그대는 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가.”
“평생을 바쳐온 근육에 맹세코 주군의 명을 목숨과 같이 받들겠나이다! 저와 형제들은 적의 군대를 섬멸하는 벼락이 되고! 적의 성벽을 부수는 전차가 되고! 적장의 목을 치는 칼이 될 것이옵니다! 주군의 절대적인 힘이 되겠사옵니다!!!”
오운다운 독특한 발상의 맹세였으나, 이 또한 그의 진심이 느껴져 네로멜티아는 만족할 수 있었다.
그놈의 근육은 좀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뺄 수 없나 싶기도 했으나, 그만큼 그의 일생 모든 것이었던 근육에 맹세할 정도였으니 그의 충성이 어느 정도인지 각오가 단단히 보이는 듯하여 더욱 좋았다.
베리베리가 소중한 백성들을 지키는 방패를 이야기했다면, 오운은 적들을 쳐부수는 힘에 자신을 빗댔다.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일면이었다.
“스토니 포트리스의 공병대장, 넬라넬라는 짐 앞에 서라.”
마왕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절도 있는 자세로 나아가 오운의 옆에 무릎을 꿇은 넬라넬라.
자신의 오빠 베리베리와 같이 철저한 격식을 차리고 있었으나, 그녀의 동작은 더욱 날렵하고 힘찬 느낌이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을 가슴에 둔 채, 고개를 숙인 넬라넬라는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으나 바닥을 볼 뿐인 그녀의 시선은 강직하다고 묘사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대는 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가.”
마왕의 엄숙한 질문에 즉각 답변하던 다른 이들과 달리, 잠시 침묵을 이어가는 넬라넬라.
베리베리는 그 갑작스런 적막에 일말의 동요조차 하지 않고 자세를 지키고 있었으나, 오운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고개를 살짝 돌려대며 힐끔힐끔 넬라넬라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잠시 침묵을 고수하던 넬라넬라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네로멜티아와 눈을 마주했고, 마왕을 올려보는 그녀의 강직한 시선은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저는 하나의 해머입니다.”
자신을 연장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넬라넬라의 답변에 군중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오운 역시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시선을 흐트러뜨리기까지 하는 중이었고, 연단의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러스테리아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적을 섬멸할 무기로 사용하신다면 하나의 워 해머(War Hammer)가 될 것이며, 백성들을 위해 사용하신다면 모든 것을 만드는 하나의 연장이 될 것입니다. 자루가 부러져 명령의 수행에 실패하는 날이 오더라도, 아예 망가져 못쓰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제 의지로 주인의 의지를 거절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고개를 숙인 넬라넬라.
잠시의 침묵 뒤에 흘러나온 그녀의 의지는 단연 훌륭한 것이었고, 네로멜티아의 마음은 기분 좋은 설레임에 뜨거워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심장이 거세게 고동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넬라넬라의 답변은 훌륭했고 진심을 올곧게 부딪쳐오는 순수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주인의 마음조차 움직이는 그녀의 진실한 의지는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뜨겁게 달구고 있었고, 그들 마음속에 일생 처음 만난 마왕에 대한 충성을 싹트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네로멜티아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 앞에 다다른 세 가지의 맹세가 모두 만족스러웠고 흐뭇하기까지 했다.
“짐은 그대들의 맹세가 마음에 들었다. 지금부터 권속 계약을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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