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마왕의 권속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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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들이 거주하는 산성(山?), 스토니 포트리스(Stony Fortress).
그 드높고 견고한 석벽 내부에 존재하는 연무장(???)은 병사들의 훈련을 위한 장소였으나, 드넓은 공터라는 장점이 있는 까닭에 공간이 한정된 성내의 생활에 있어 본래의 의미와 다른 여러 가지 쓰임새를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주민들을 위한 축제의 장이 되기도 했고, 일정 주기로 열리는 물물교환의 장이 되기도 했다.
영주가 백성들을 모아 연설할 일이 있다면 사용되는 장소였고,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겨루기 대회나 연극 혹은 음악 등의 예술 공연 역시 이 장소를 사용하곤 했다.
그리고 오늘은 마왕이라는 존재가 주인이었다.
이토록 많은 숫자가 성에 존재했는지 놀라게 될 지경으로 몰려든 오크.
각기 다른 모습의 다양한 오크들이 저마다 눈을 빛내며 마왕이라는 존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내에서의 생활은 대부분 특별할 일이 없었고, 이는 평화의 증거나 다름이 없었으나 달리 말한다면 별다른 자극이 없는 일상이라 말할 수 있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처음 보는 타 종족 이방인을 직접 눈으로 구경할 수 있는 이 자리는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짜릿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기에, 굳이 영주 베리베리의 지시가 아니고서라도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든 것이었다.
정찰의 임무를 부여받은 일부 특수 보직의 병사들을 제외한다면 그들의 거주지역 카보니 숲을 벗어나 본 일이 전무한 오크들이었기에, 미지의 바깥세상을 향한 동경이 그들을 부른 셈이기도 했다.
베리베리는 전혀 참석을 강제하지 않았고, ‘마왕 폐하께서 중요한 의식을 치르실 계획이니 되도록 참석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식으로 넌지시 소식을 전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베리베리의 강제성이 전혀 없는 전언과 다르게, 경비의 의무를 부여받아 성벽 위에서 근무 중인 경계병들을 제외하고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오크들이 이 장소에 몰려든 것이었다.
공방과 대장간의 화덕은 불이 꺼졌고, 농지에는 흙 묻은 농기구들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식당에는 끓다 만 솥의 스튜에 설익은 당근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고, 냇가의 물에 잠긴 통발 안에는 이미 물고기가 그득했으나 그것을 건져 올릴 이가 없었다.
마왕의 등장에 스토니 포트리스의 모든 활동이 정지해 버린 것이다.
“정숙!”
모두가 저마다 한마디씩 이야기를 나누며 웅성거리던 군중은 영주의 짧은 한마디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물이라도 끼얹은 듯 침묵이 찾아왔으나 눈을 빛내며 연단(??)을 바라보는 군중의 시선은 온갖 흥분과 열망이 가득해 함성의 시각화나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연단의 뒤에서 좌중의 모든 이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타 종족 여성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히 연단에 오르던 세 여성은 타 종족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오크들로서는 정확하게 어떤 종족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건강한 혈색이 표면에 선명히 감도는 뽀얀 피부가 오크나 오우거와는 전혀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었기에 영주의 별다른 소개 없이도 그들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앞선 흑발의 여성은 그녀가 가진 뿔과 뾰족한 귀를 통해 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데모니안임을 알게 되었고, 그녀가 마왕이라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마왕의 뒤를 따르는 보랏빛 머리의 여성은 앞의 여성과 동일하게 뿔과 뾰족한 귀를 가졌으나 이리저리 흔들리는 꼬리가 보여 종족을 특정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꼬리를 가진 여성과 나란히 걷고 있던 에메랄드빛 머리의 메이드는 둥근 귀를 가졌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스토니 포트리스에 유일한 둥근 귀였다.
“저, 저거 휴미안 아니야!?”
“오, 맙소사!!”
“휴미안!! 휴미안이다!!!”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여성들의 모습을 낱낱이 눈에 새기던 오크들은 일제히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해 다른 이에게 재차 확인을 구하는 오크.
공포를 느껴 떨리는 손으로 어린 자녀의 눈을 가리는 오크.
경악을 금치 못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정지해 있을 뿐인 오크.
온갖 반응들이 각양각색으로 드러나고 있었으나, 그들 내면에 잠재해 있던 공통된 감정은 오로지 하나만이 존재했다.
적개심.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영주님!! 말씀 좀 해보세요!!!”
“휴미안!! 휴미안이 습격할 거야!!”
“휴미안은 모두 죽여야 한다!!!!!”
둥근 귀를 가진 인종은 그리 흔치 않았다.
거기다 백육십에서 백팔십 멘톨 사이의 신장에 뽀얀 피부를 가진 둥근 귀 종족은 신들이 아니고서야 휴미안 외에는 달리 없었다.
급격히 타오르기 시작한 군중의 분노는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 기세가 맹렬했고, 이글거리는 전의(戰?)의 눈빛은 험악함을 넘어 살벌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군중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 베리베리는 늦어버린 대처에 당황한 나머지 연거푸 손짓하며 군중의 분노를 잠재우려 들었으나,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오크들 내면의 분노는 거센 폭포의 격류와 같이 몰아칠 뿐 영주의 말은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제아무리 논리정연한 해명도 닿지 못하면 그저 작은 소음에 불과하다.
더욱이 이 일은 논리조차 필요 없는 간단한 일이었고, 단지 휴미안이 아니라고 인지시켜주기만 하면 될 뿐인데 이토록 간단한 일조차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베아트리스는 여전히 그녀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을 고집하고 있었다.
단지 미간을 조금 좁혀 부정적인 감정을 은근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 그녀의 안면을 통해 그녀가 가진 생각과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자신이 하찮고 더러운 휴미안 따위로 오해받는 현실도 불쾌했으나, 감히 드높은 절대자인 자신의 주인 앞에서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는 군중이 더욱 불쾌했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으나 주인이 불쾌해서는 안 될 일이니, 속히 나서서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방식이 무엇인가를 가늠할 즈음, 주인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분노한 군중의 아우성 속에서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바라보는 주인.
마치 하녀의 생각 같은 건 손바닥 보듯 훤히 보인다는 듯, 주인의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던지는 시선은 자신에게 명백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네로멜티아는 베아트리스의 손을 잡고 연단의 전면을 향해 그녀를 데려갔다.
군중에게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분노는 더욱 노골적으로 느껴져, 피부가 따가울 정도였다.
이미 헤모니겐트의 멸망으로부터 천 년의 시간이 지났고, 그때 당시를 살았던 오크는 수명이라는 문제 때문에 단 한 명도 남아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많은 세대를 거쳐 지금에 이른 현세대의 오크 중에는 당연하게도, 그때 당시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오크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역사가 기록된 책을 통해 그때 당시의 이야기를 배웠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현재 폭발하고 있는 오크 군중의 분노는 천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휴미안에 대한 오크의 분노가 희석되지 않고 전해 내려오고 있음을 밝히는 증거와 다르지 않았다.
분노가 크면 클수록 미래를 향한 바람이 크다는 의미와 같았고, 원한이 깊으면 깊을수록 동료들에 대한 사랑이 깊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렇기에 네로멜티아는 그들의 분노를 직접 마주하면서도 진실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비로소 주인의 심중을 읽은 베아트리스 역시 마음속 불쾌감을 걷어내게 되었다.
그리고 네로멜티아는 베아트리스를 붙잡고,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에 키스했다.
거짓말같이 찾아온 침묵.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좌중의 정적은 순식간에 도래했고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당황한 베아트리스는 눈을 크게 뜨고 주인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느껴지는 감미로운 키스에 빠져들어 스르르 눈을 감아 버렸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주인의 달콤한 친애가 느껴지며, 그녀의 정신은 벅차오르는 감정에 휘말려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짧은 환희가 끝나고 주인과 하녀의 입술은 작별을 고했다.
주인이 선사한 입맞춤의 감미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고 눈빛이 아른거리는 베아트리스를 향해 살짝 웃어준 네로멜티아는 그녀를 향해 장난스레 속삭였다.
“효과 좋지?”
조심스럽게 베아트리스를 놓아준 네로멜티아는 안면에 장난기를 지우고, 지배자로서의 근엄을 당당히 드러냈다.
단지 감정을 지운 것에 불과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백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녀가 드러낸 무표정 속에는 절대적인 강자로서의 힘과 권위가 그 무게를 과시하고 있었고, 드높은 지배자로서의 위세가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이건 내 거다.”
한 팔로 베아트리스의 허리를 감싸 안은 네로멜티아는 당당히 군중을 향해 선언했다.
수많은 군중의 앞에서 너무도 노골적인 표현을 드러낸 주인의 태도에 혈액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낯이 붉어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부끄러워진 베아트리스는 그녀 특유의 무미건조함이 낯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네로멜티아는 더욱 당당히 군중 앞에 선언을 이어갈 뿐이었다.
“나의 메이드는 휴미안이 아니라 에고 돌이다. 그러나 휴미안이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짐이 소유하고 있는 하녀가 휴미안이든 드래곤이든 무슨 상관이 있나!”
위세가 등등한 마왕의 말.
단순하면서도 강하고 노골적인 선언의 내용.
오크 군중들은 물론 베리베리와 오운, 그리고 매사에 쉽게 당황하지 않던 모카마저 할 말을 잊고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마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거세게 고동치는 자신의 심장을 느끼며 만감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마왕을 바라보는 넬라넬라.
빠르게 맥동하는 심장의 중심에 날카로운 바늘이라도 들어선 듯, 불편한 아픔을 느끼며 주인을 바라보는 러스테리아.
단지 두 여성만이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내 거다! 참견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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