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공병대장 넬라넬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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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신감을 가져본 일이 없었던 넬라넬라.
오크들 사이에서는 미녀로서 정평이 나 있을 정도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크들 사이에서의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오크 로드로서 능력의 모자람이 없도록 매일같이 도서관에 출입하며 지식의 탑을 쌓아왔던 그녀의 오빠 베리베리 벡 베그리트.
그리고 역대 수많은 선조 오크 로드들이 헤모니겐트의 멸망 이전부터 쌓아왔던 헤아릴 수 없는 방대한 수의 책.
책에 대한 사랑만큼 책을 아꼈던 베리베리는 천 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다 바스러져 가던 책들을 모조리 필사(??)하는 일에 성공했고, 나아가 책들이 일말의 퇴색 없이 깨끗하게 보관될 수 있는 도서관 또한 만들어내었다.
각고의 노력과 인고의 세월을 통해 대도서관을 설립한 베리베리는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 매일같이 그곳을 드나들었고, 오빠가 출입할 때면 여동생 넬라넬라 역시 대도서관에 따라 들어가곤 했다.
넬라넬라 역시 여러 책들을 두루 접하며 상당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으나 굳이 공부를 위해 도서관을 찾던 것이 아니었기에 공부는 겸사겸사 해내는 일일 뿐이었고, 그녀가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애독서는 따로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소설.
천년 이전의 문명에서부터 비롯된 그 가상의 이야기들은 지식과 정보를 전파하고 공유하기 위해 제작된다는 책으로서의 숙명에서 벗어나 마음의 영역에 들어서 있었다.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애달픔을 때로는 비통함을 때로는 환희를.
소설이 주는 감정은 무엇하나 동일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매 순간이 새로운 만남과 같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애 소설의 쌉싸름한 감미(?味)를 좋아했던 넬라넬라는 그 가죽 커버 내부에 존재하는 종이 묶음 속 세상, 잉크로 쓴 연인들의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다.
달콤한 문자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 마치 소설 속 여주인공이 되는 듯 온 마음이 흠뻑 빠져들 수 있었고, 그 소설이 그려내던 이상적인 모습의 상대를 직접 만나는 상상마저 펼칠 수 있었다.
드래곤에게 잡혀간 공주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용사의 이야기.
산적들의 습격을 받던 귀족 영애를 구한 전사의 이야기.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화가 소년과 친구를 넘어 연인으로 발전해 가는 농가의 딸 이야기.
귀족 약혼자와 자신의 기사 사이에서 사랑의 갈등에 고뇌하는 영애의 이야기.
볼모로 데려온 이웃 나라의 왕녀와 사랑에 빠져가는 황태자 이야기.
불치병에 걸린 소녀를 위해 만드라고라를 찾아온 소년의 이야기.
연애 소설은 펼칠 때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고, 넬라넬라는 그 달콤한 사랑의 이야기에 빠지는 것을 좋아했다.
단단하게 무두질 된 가죽 커버를 펼치면 그 안에는 두꺼운 종이 묶음으로 이루어진 꿈과 낭만이 있었고, 문자의 연속에 불과한 그 잉크의 흔적들은 어느새 그녀 마음속에 들어와 애절한 추억을 새겨 주었다.
그러나 연애 소설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행복한 취미이자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던 연애 소설에 한참 빠져들었을 무렵.
자기 전이면 항상 머리맡에 책을 대여섯 권씩 쌓아두고 읽다 지쳐 잠들던 나날이 계속될 무렵.
넬라넬라는 연애 소설이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슬픈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멋지고 아름다운 주인공을 책의 수만큼, 또는 그 이상을 보아왔기에 깨달을 수 있었던 슬픈 현실.
오크가 주인공인 연애 소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크는 언제나 연약한 여주인공을 납치하거나 그녀에게 해를 입히는 존재로서 등장할 뿐이었고, 나아가 소설에 따라서는 여주인공을 집단강간하다가 뒤늦게 도착한 남주인공에게 모조리 참살당하고 마는 흉측하고 음탕한 괴물로서 등장할 뿐이었다.
그에 따라 넬라넬라는 자신이 읽었던 책들을 다시금 하나씩 회상했다.
멋지고 아름다웠던 주인공들은 언제나 데모니안이나 휴미안뿐이었으며 때때로 엘프, 드래곤, 아니마, 머메이드 등의 다른 종족들이 묘사되기는 했으나 오크는 결코 주인공으로 그려진 적이 없었다.
오크는 고블린과 오우거, 트롤, 사이클롭스 등의 종족들과 한데 싸잡혀 악행을 일삼는 괴물로서 등장하거나, 그나마 좋게 봐주면 비중 없는 주변 인물로 묘사되는 것이 다였다.
주로 데모니안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던 헤모니겐트 출신의 소설들이 오크들을 친근하게 그려내고는 하였으나, 그들의 작품 역시 오크를 연애의 대상으로 그리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넬라넬라는 비참한 심경을 감출 수 없었다.
다른 종족들이 여기기에 오크는 못생긴 타 종족일 뿐이었다.
심지어 휴미안 작가가 집필한 소설은 오크를 ‘녹색 피부를 가진 돼지 인류’라고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일 정도였다.
이후 넬라넬라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방에 틀어박혀 눈물을 흘렸는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많은 연애 소설 속 아름다운 연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에게도 멋진 연인이 나타날 순간을 꿈에 그렸던 넬라넬라의 세계는 참혹하게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이후 다른 오크들이 넬라넬라에게 예쁘다는 둥 아름답다는 둥 칭찬을 건네도, 그녀는 겉으로만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 단 한 번도 그 칭찬이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어차피 오크들의 사이에서만 그들의 미적 기준에 한하여 아름답다는 식의 칭찬을 주고받을 수 있을 뿐, 세상의 보편적인 기준과 타 종족들에게 오크는 흉측한 종족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기 때문이다.
오크로 태어난 자신에게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온 넬라넬라였다.
소설 속 여주인공들이 입던 예쁜 드레스나 반짝이는 액세서리에도 관심이 많았고, 그녀가 보기에 무척이나 잘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남성 오크들 또한 상당히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을 꾸미는 일을 포기했고, 아름다운 자신을 가꾸는 일을 포기했었다.
자신이 소설 속 낭만적인 사랑을 나누던 여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고, 고작 외모라는 것에 사로잡혀 자신의 외모를 칭찬해주는 친절한 이들에게 ‘결국 오크의 기준일 뿐’이라는 생각이나 가질 뿐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속물적으로 느껴지며 진저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냥 모든 것을 내려두고 편해지고 싶었기에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포기했었다.
그러나 평생 처음으로 만난 데모니안.
이제야 첫 만남을 가졌을 뿐인 마왕.
네로멜티아가 자신에게 귀엽다고 외치는 것으로 넬라넬라의 모든 세계는 뒤집혀 버렸다.
마왕 네로멜티아는 그녀가 만나본 어떤 여성보다도 아름다웠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동경해 마지않던 소설 속 공주들의 삽화 같은 건 비할 바도 아니었다.
루이나의 여신이라는 말이 바라보기만 했을 뿐임에도 이해가 될 정도의 자태.
말 그대로 여신이었고, 전능한 그녀의 힘에 어울리는 미색이었다.
그런 네로멜티아가 자신에게 귀엽다는 말을 던졌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던 넬라넬라는 그것이 그저 인사치레에 불과하고, 자신이 촌스럽게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네로멜티아의 뜨거운 눈빛과 염원이 담긴 목소리는 아무리 둔한 이가 보더라도 진심이라고밖에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제, 제가… 귀엽다는 말씀이신가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넬라넬라는 자신도 모르게 군인으로서의 딱딱한 말투조차 내려놓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마왕의 칭찬에 넬라넬라는 짙은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고, 손끝을 떨어댈 정도로 경황이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당혹감은 결코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의 강직한 모습의 틈을 비집고 엿보이는 숨겨진 감정은 기쁨이나 환희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지만… 저는 피부도 녹색이고… 송곳니도 튀어나온 오크인데요…….”
“그런 건 차밍 포인트일 뿐이야! 너는 작은 바이올렛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넬라넬라가 쭈뼛거리며 흘린 자기 비하의 말에 네로멜티아는 뜨거운 진심을 부딪쳤다.
이토록 열정적으로 자신을 긍정해주는 마왕의 모습에 넬라넬라는 더욱 당황하며 몸 둘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던 세계에서는 결코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었다.
자신이 알던 상식에서는 결코 이런 말이 들려올 수 없었다.
그녀는 전보다 더욱 떨려오는 목소리로 스스로에 대한 부정(??)을 입에 담았다.
“저는 다른 종족보다 키도 덩치도… 너무 크고… 심지어 근육도 잔뜩 붙었어요!!”
“나는 너의 건강하고 탄탄한 몸이 오히려 아름답다고 생각해!”
넬라넬라 자신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네로멜티아의 말에 연이어 서슴없는 부정의 말을 쏟은 것은, 늘 자신을 좀먹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을 네로멜티아가 부정해주길 바라서였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소설 속 가련한 공주님과는 동떨어진 외모를 가진, 덩치 크고 근육투성이의 오크일 뿐이니 아름다운 여성으로서의 자신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오크끼리 서로 멋지다 아름답다 칭찬해 봐야 세상의 기준에서는 추하게 생긴 자들이 서로 주고받는 의미 없는 말일 뿐이라고 생각해왔고, 자신은 그저 피부색도 다르고 가련함과는 정반대의 큰 덩치나 가진 여성 오크일 뿐이라고 체념해왔었다.
그런데 이제 처음 만난 마왕이라는 존재가 적극적으로 진심을 부딪쳐가며 자신의 부끄러움일 뿐이었던 외모를 긍정해주고 있었다.
넬라넬라는 어릴 적 일찍이 마음에서 접어버린 낭만 가득한 로맨스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단순한 말 몇 마디에 왜 이리 심장이 뛰고 가슴 깊이 열기가 치밀어 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넬라넬라 자신이 마왕의 그 몇 마디 말에 기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흠. 폐하께서는 제 여동생이 무척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윽…! ……. 으음, 그렇느니라. 이렇게 예쁜 여동생이 중요한 직책에서 열심히 공을 세우고 있다니 기특하지 않느냐.”
“이렇게 위엄있게 말씀하시던 폐하께서, 제 여동생에게는 평범한 말투로 허물없이 대하시는 모습이 적잖이 놀라웠습니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베리베리에게 당황한 네로멜티아는 그녀 스스로가 지키던 체통조차 벗어 던지고 있었음을 깨달았고, 뒤늦게 위엄있는 말투를 되찾으려 했다.
하마터면 오빠가 보는 앞에서 여동생을 꼬실 뻔했다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해진 네로멜티아는 상황을 무마시키려 위엄있는 모습을 다시금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베리베리의 지적에 그마저도 의미 없는 발버둥이 되었을 뿐이었다.
“… 나는 내 권속에게는 말을 편히 한다. 권속의 계약이라도 맺어둘까 해서 미리 편하게 말해 본 거야.”
“정말이십니까!?”
“그래. 베리베리 벡 베그리트. 오운. 그리고 넬라넬라. 너희 모두 나와 권속의 계약을 맺어 줘야겠다.”
아름다운 넬라넬라의 모습에 정신을 못 차리고 위엄을 잃은 채 본색을 드러냈던 일을 거짓으로 덮어 포장하기 위해 권속의 계약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뽑아버린 네로멜티아.
사실 애초부터 이들에게는 권속의 계약을 맺어줄 생각을 가지고 있긴 했었으나,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 제안하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벌어진 일에 지나지 않았고, 미인이 나타났다고 해서 간단히 무너져버린 자신의 절제를 탓해야 할 뿐이었다.
네로멜티아가 풀이 죽어 기운 빠지는 음성으로 베리베리와 대화를 하는 동안, 넬라넬라는 네로멜티아를 조용히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의 거센 고동을 느끼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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