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베리베리 벡 베그리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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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르게 깎아지른 암벽들의 가운데 우뚝 솟은 웅장한 성채.
크고 단단한 석재로 이루어진 산성(山?)은 삼엄한 기세의 경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경비들의 눈은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이 올곧은 기세로 성 밖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그들의 무기는 약간의 흠조차 없이 완벽하게 벼려져 언제든 전투에 나설 만반의 준비가 끝나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녹색의 피부를 가지고, 입술 밖까지 튀어나온 아래 송곳니를 가졌다는 외모적 특징을 제외한다면 덩치가 거대한 데모니안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외모의 존재들.
휴미안들이 일컫기를 ‘녹색 피부에 돼지를 닮은 추악한 거대 야만인들’이라 묘사하는 이들이었으나, 실상 그들의 외모 자체는 돼지를 닮거나 추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휴미안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녹색 피부나 날카롭게 튀어나온 아래 송곳니가 뭔가 괴이하다는 인식과 함께 테라리스에 익히 정착된 미적 기준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고, 그들의 덩치는 평균 이삼백 멘톨 정도로 상당한 거구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종족들이 자신들을 추악하다 불러도 익숙한 일상이라 여기며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 습성을 지녔으나, 종종 다른 종족과도 교류하며 실제로 그들에게 반해버린 타 종족과 부부의 연을 맺기도 하는 종족이 바로 그들이었다.
많은 오해와 편견의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본인들의 삶을 쟁취하여 살아가는 강직한 종족, 그들의 이름은 ‘오크(Orc)’였다.
의외로 탄탄하게 잘 닦인 산길을 타고 올라가, 거대한 성벽의 가운데 일천 멘톨 이상 될 것 같은 웅장한 성문 앞에 선 이들.
네로멜티아 일행과 오운, 그리고 모카가 있었다.
“여기 계신 분께서 누구신 줄 알고 밖에 세워두는 것이냐! 냉큼 정중하게 모시지 못할까!!!”
“아니, 부족장님 말씀 저희도 믿습니다만. 실권자 허가 없이는 마왕님이시라도 기다리셔야 한다니까요. 우리도 급한 거 알아서 명령체계 무시하고 바로 남작님께 즉각 보고 올리러 갔으니까… 정말 잠시만 기다리시면 되니까… 그 도끼 좀 내려놓으시라구요!! 거참!!”
네로멜티아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성문을 열지 않는 오크들이 불경하다고 여겨 불을 토할 듯 분노하는 오운.
당장에라도 그 웅장한 성문을 쪼개고 쳐들어갈 듯 기세등등하게 오백 멘톨의 배틀 액스를 치켜들고 씩씩대고 있었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줄행랑을 칠 정도로 대단한 기세였으나, 오크 경비병들은 늘 겪는 일상이라는 것처럼 오운을 조곤조곤 달랠 뿐이었다.
오히려 약간은 귀찮다는 듯 투덜대는 기색마저 역력할 정도로 익숙한 모습을 보이는 오크 경비병들의 모습은 역정을 내는 노인을 달래는 손자의 모습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오운, 물러서라. 이들도 이들의 방식이 있을진대, 나는 이들을 존중하고 싶구나. 거기다 실권자의 허가에 따라 이방인을 들이는 방식 또한 당연한 일이니.”
“네! 주군!!”
네로멜티아의 잔잔한 말에 바로 기세가 누그러지며 극진한 예를 갖추는 오우거 치프.
오크들은 그 놀라운 광경에 저마다 작게 술렁대며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사실 가까운 이웃에 해당한 오크의 성과 오우거 마을은 그들의 접촉이 뜸한 것도 아니었고, 특히 성을 내며 씩씩대는 오우거 치프를 대하는 일은 오크 경비병들에게 있어서는 일상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오운이 살벌한 기세를 아무리 많이 내뿜더라도 오크들은 그다지 무섭지도 않았던 것이었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그의 성미가 얼마나 불같고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익숙한 만큼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런 고집불통 성난 버팔로 같은 오우거 치프가 조용한 말 몇 마디에 기세를 죽이고 깍듯한 예의를 차리는 것을 보니, 진정 저 마왕이라 소개된 데모니안 미녀가 뭔가 대단한 존재이긴 하구나 싶어 경의를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끄그그그그긍!!!
웅장하고도 육중한 성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짝 개방되었다.
성내에서 달려 나온 오크 병사들이 양측으로 나란히 서서 정렬하였고, 양측의 병사들이 줄을 지어 만든 길의 가운데를 통해 유독 덩치가 거대한 오크 하나가 걸어 나왔다.
가늘게 꼬부라진 콧수염과 잘 다듬어진 가는 턱수염이 인상 깊은 오크.
어느 국가의 왕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연미복(???)이 인상 깊었으며, 그가 들고 다니는 스틱(Stick) 또한 귀족의 상징이라 할 수 있었다.
머리에는 각이 정확하게 잡힌 예스러운 탑 햇(Top Hat)을 쓰고 있었고, 기름을 잔뜩 먹여 광을 낸 구두를 착용하고 있었다.
몹시 예스러운 귀족 신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의장(??)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타고난 외모는 그 스스로가 꾸민 외견을 결코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검은 원단에 금실로 수놓아진 자수들이 고풍스러운 연미복은 그의 삼백 멘톨에 달하는 신장과 근육질의 거구로 인해 터질 것 같이 팽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손잡이에 황금 사자머리가 달린 검은 스틱 역시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으나 그의 덩치에 맞게 제작된 까닭에 이백 멘톨에 달하는 길이를 가져 위협적인 메이스(Mace)와 같이 보이고 있었다.
예스러운 복장과 잘 다듬어진 수염과는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덩치와 그리즐리 베어도 산채로 씹어먹을 것 같이 크고 단단한 사각턱, 한 올의 머리칼도 없는 대머리가 여러모로 신사적인 그의 분위기를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
“우리 루이나의 권속들이 받들어 신앙해야 마땅한 마왕! 루이나의 여신! 네로멜티아 디 이시스님의 귀환을 진심으로 경하드리나이다!”
한 손으로 스틱을 세운 채,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예를 다하는 연미복의 오크.
네로멜티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마왕이 도착했노라고 선포한 오운조차 그녀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 연미복의 오크는 이미 마왕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에 흥미를 느낀 네로멜티아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의 앞에 다가갔다.
“나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구나.”
“당연합니다! 선대 오크들의 역사 기록은 이미 모두 탐독한 지 오래! 언제 부활하실지 모르나 언젠가는 이 땅에 돌아와 우리를 구원해 주실 마왕 폐하의 존함을 몰라서야 귀족을 자처할 수 없고 지배자로서도 면이 서질 않지요!”
경쾌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높이는 연미복의 오크는 기쁨에 격앙된 상황에서도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예법이 깊게 녹아있었고, 이는 외견뿐만 아니라 그의 지식과 마음 역시 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러스테리아는 예의를 지키면서도 호쾌한 그의 모습에 호감을 느끼는 듯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베아트리스는 그의 착실한 예법이 마음에 드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직 오운만이 그가 못마땅해 연신 콧바람을 뿜으며 고개를 홱 돌릴 뿐이었다.
스스로의 격앙된 감정을 추스른 연미복의 오크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한 손을 가슴에 짚은 뒤,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베리베리 벡 베그리트(Berryberry beck Begritt). 오크 로드(Orc Lord)의 자리를 맡고 있으며, 남작의 지위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소개가 늦어 신사로서 부끄럽습니다.”
호탕한 성격은 좋지만 무식하고 눈치 없는 오운보다는 훨씬 정상적인 면모를 보였던 오크 로드.
그러나 그의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이름은 흡족하게 잘 흘러가던 분위기를 단숨에 박살내 버렸다.
다들 그의 이름에 대해 뭔가 의견을 말하거나 기색을 나타내는 등 티를 낸 것은 아니지만 속으로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고, 각자의 굳어진 표정에 그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
“어… 음……. 그래… 베리베리…”
“성은 빼시고 그저 편하게 이름으로 베리베리라 불러주셔도 됩니다. 친한 이들은 앞글자를 따서 ‘BBBB’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BBB가 아니고…?”
“남작(Baron)이니까요. 후후후.”
‘베리베리’, ‘벡’, ‘베그리트’의 B 세 개에 남작을 뜻하는 B까지 합쳐, 베리베리 벡 베그리트 남작이라는 의미로 네 개의 B를 주장하는 베리베리.
남의 이름을 가지고 뭐라고 감상을 내어놓는 건 실례되는 일이니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으나, 네로멜티아 일행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가 이름을 이런 식으로 지어주었나.
“그래, 베리베리. 그나저나 굉장한 성이로구나. 천 년 전의 강성했던 헤모니겐트에서도 이런 당당한 성은 얼마 없었다. 세계의 멸망 속에서도 이런 위풍당당한 장소를 건설해 내다니, 그대의 재능과 노고를 치하하고 싶다.”
“폐하께서 그리 극찬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설계는 제가 했지만 결국 바위를 깎아 거대한 벽돌을 만들고 그것을 쌓아 성벽을 이룬 것은 백성들이니, 후에 모쪼록 폐가 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공 또한 치하해주시길 바라옵나이다.”
“후후. 너는 마음가짐도 참된 귀족이로구나. 자리만 마련해 준다면 얼마든지 하도록 하마.”
마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천년의 세월 속에서 그에게 작위를 준 것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그 스스로가 남작이라는 귀족의 작위를 자처하고 있을 뿐이라 할지라도, 그의 모습은 귀족의 귀감이었다.
헛된 명예나 과시욕만으로 귀족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백성들이 안전한 삶을 누리게 잘 통치하고 있었고, 백성들을 앞서 생각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오히려 자칭 남작이라는 모습이 호감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우선 축하 연회를 명해둔 참이니 안으로 드시지요. 누추하지만 폐하께 최대한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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