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사라진 엘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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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헝클어져 있었던 러스테리아의 머리는 네로멜티아의 부드럽고 능숙한 손길에 매끄럽고 단정한 머릿결을 되찾았고, 둥글게 말린 것이 앙증맞은 평소의 스타일로 돌아왔다.
머리를 단장하는 동안 깊은 안락감에 젖어있었던 러스테리아는 주인의 손길이 너무나 기분 좋아서 시간이 느리게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고, 그녀의 의지와 관계없이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그녀가 입은 정장은 아직 구겨진 흔적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본연의 단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주군. 괜찮으시다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앞으로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하도록 하거라. 짐은 거추장스러울 정도의 예의에는 관심이 없으니.”
주군에게 여유가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고하려고 했던 오운은 러스테리아의 머리 단장이 모두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만 있어야 했다.
주군의 일이 끝난 뒤, 조심스럽게 자신이 아는 바를 보고할 생각이었는데 주군은 자신의 발언을 허락함은 물론 앞으로의 발언권 역시 보장해주었다.
허례허식이나 실용적이지 못한 관행을 싫어했던 오운에게 네로멜티아의 말은 흡족함을 넘어 기쁨이 될 정도였다.
“역시 주군이십니다! 그럼 기탄없이 말씀 올리겠습니다! 차후 왕비 전하가 되실 분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사실입니다. 현재 카보니 숲을 비롯한 인근 데카스트라스 산맥 일대가 죽은 자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와, 왕비!?”
“아니에요! … 저, 저 같은 게 왕비라니…!!”
오운의 보고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가 러스테리아를 지칭한 호칭이었고, 당사자들의 격한 반응 역시 그 생각지도 못한 칭호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발언을 터뜨린 당사자 오운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 주군을 주인님이라 칭하시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하인의 신분이시겠으나, 주군께서 이분을 귀히 대하시는 태도를 보면 누가 봐도 절대적인 왕비 후보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귀여운 비서를 바라보는 네로멜티아의 눈빛과 태도는 꿀이 떨어진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달콤한 것이었고, 이를 받아들이는 러스테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누가 보아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인 것은 극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오운의 발언에 대해 다른 의문이 들었고, 혹시 이 오우거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나 싶어 확인에 들어가야만 했다.
“짐은 일단은 여자인데.”
“…? 남자 여자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영웅은 언제나 여색을 좋아한다 하였으니, 주군께서 아내를 들이신다 할지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내키시는 대로 여럿 들이셔도 전혀 이상할 것 없습니다!”
“… 너 정말 아무런 편견도 없는 대단한 녀석이구나…….”
네로멜티아 역시 애정을 주고받는 데 있어서 성별의 차이는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부류였으나, 평범한 이들의 상식으로는 언제나 아내를 맞이하는 건 남편이라고 고정되어 있었으니 혹시 오운이 자신의 성별을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확인해 본 것이었다.
결과는 오운이 편견 없는 개방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었고, 네로멜티아는 그 점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크로포드같은 강직하고 고지식한 인물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깊은 자유로움이 오운에게 있었다.
“좋아. 마음에 드는구나, 오운. 하여튼 계속 보고해 보거라.”
우선 질척거리는 땀과 불끈거리는 근육 과시로 거부감이 들었던 오운의 신상에 호감이 쌓이는 순간이었다.
왠지 오운과는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고, 땀범벅이 되어 돌아다니거나 그놈의 근육 과시만 하지 않는다면 달리 불편할 것은 없었다.
물론 이 근육 덩어리 오우거에게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확연하게 들었지만.
“평원에 머물며 단체로 돌아다니는 망자들은 전부 좀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이곳 카보니 숲에는 발을 들이지 않는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것들이 과거 휴미안의 군대와 수차례나 충돌해 싸워댔고, 버티지 못한 휴미안들이 장벽을 세워 그들을 가둬두는 것으로 이 지역에서 완벽히 물러났다고 합니다.”
어째서 좀비들이 카보니 숲으로는 들어서지 않는지 모르겠으나, 대체적으로 네로멜티아와 베아트리스의 예상이 적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이 지역에 그다지 건질 것이 없다고 생각한 휴미안들이 점령을 지레 포기하고 격리한 것일 수도 있으나, 마왕성 일대를 폐허로 만들고 아스타리스 대륙을 점령한 휴미안 군이 좀비 무리를 격퇴하지 못해 지역을 포기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 좀비들은 카보니 숲뿐만 아니라 데카스트라스 산맥을 끼고 남부로 조금 내려가면 있는 태고의 숲(Primal Woods)까지 에워싸고 있어서 휴미안 놈들이 만든 장벽은 상상 이상으로 길고 거대합니다.”
“태고의 숲이라면 엘프들이 거주하는 장소 아닌가?”
“맞습니다. 물론 엘프들이 아직까지 남아있었다면 좀비들 덕 좀 톡톡히 봤겠지만, 그 비리비리하고 자존심만 높은 요정 놈들은 자신들 고향조차 내팽개쳐 버리고 도망가 버렸죠. 선조들의 말씀을 보면 수천 년이나 산답시고 몇백 년 못사는 오우거들을 그렇게 무시하고 깔봤다던데 결국 가장 먼저 꽁무니를 뺀 것은 그들이었습니다. 웃기는 일입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서 엘프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털어놓는 오운.
네로멜티아는 태고의 숲이 언급되자 착잡한 심경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헤모니겐트에도 엘프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엘프들 사이에서 천대받는 다크 엘프였고, 다크 엘프를 받아들인 이상 헤모니겐트는 엘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애초에 타 종족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었던 그들은 외교에도 매우 고압적인 태도를 고수했고, 그래서 친하게 지내는 종족이 거의 없었던 종족이었다.
같은 엘프임에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구분하여 ‘다크 엘프’라는 비하 의도가 다분한 이름을 붙이고 추방한 엘프.
그렇게 추방당해 대륙 각지를 떠돌던 다크 엘프들은 엘프들이 악의적으로 퍼뜨린 소문에 의해 재앙을 몰고 다니는 불길한 징조 취급을 받으며 어디에서도 정착할 수 없었다.
그런 이들을 받아들여 거주지와 함께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준 것은 네로멜티아였고, 그와 동시에 헤모니겐트는 본래도 그다지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던 엘프와의 외교 관계가 말 그대로 단절된 수준까지 악화되었다.
네로멜티아 역시 같은 동족을 멸족당할 수준까지 괴롭혀댄 그들의 패악질에 질려버려 엘프하고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었는데, 테라리스가 멸망의 직전까지 다다른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엘프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그들이 아직 살아남아 도움을 바라고 있다면 싫어도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한다고 해서 절박한 상황에 빠진 이들을 외면한다면 당당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럼 현재 태고의 숲에 엘프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이야기인가?”
“…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휴미안도 문제지만 제가 전해 듣기로는 지독한 오염 탓에 태고의 숲이 말라 죽어갔다고 하더군요. 자연의 정기(??)를 받아가며 사는 종족인지라 숲이 오염되어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하니 다른 깨끗한 장소를 찾아 떠났다고만 들었습니다.”
“멍청한 족속들이네요. 소중한 장소를 지킬 생각은 안 하고 도망이나 치다니. 테라리스 전체가 오염된 마당에 그들은 모두 정기를 잃고 말라 죽었거나, 휴미안의 노예가 되었겠군요.”
베아트리스는 오운의 이야기를 들으며 멸시의 눈빛을 띤 채, 엘프들을 주저 없이 매도했다.
사실 강하고 냉정하게 이야기했을 뿐, 베아트리스의 말은 틀린 것이 없기에 네로멜티아는 그다지 정정하거나 지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이 평소 보이던 고압적인 태도와 강한 자존심을 보자면 노예보다는 죽음을 택했을 것 같지만, 그들이 드러내는 강경한 모습과 다르게 자신들의 숲마저 내팽개치고 도망친 심약한 성정을 생각해보면 운명을 한탄하며 노예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노예가 되었다면 테라리스에 존재하는 마지막 휴미안의 도시 ‘에스테로난’에 끌려갔을 것이고, 그렇다면 차라리 휴미안이 조성한 인공적인 깨끗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으니 노예로서 학대받다 죽을지언정 적어도 오염으로 죽을 걱정은 없을 것이었다.
모든 것을 떠나서 현재 상황에서는 이렇다 할 뚜렷한 증거가 없으니 엘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짐작하기도 힘들었고,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상황을 예측할 뿐이었다.
“사실 저희도 태고의 숲을 정찰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태고의 숲은 근처만 봐도 끔찍하게 오염되어 모든 것이 말라 죽어있었습니다.”
“그럼 엘프는커녕 그 숲에 살아있는 것 또한 하나도 없겠군.”
“… 그게… 그것이 확인이 안 되니까, 주기적으로 계속 정찰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두 해에 한 번씩 정찰을 보내곤 하는데, 그때마다 정찰 임무를 맡은 전사들이 길을 잃고 헤맨다고 합니다. 숲의 중심까지 들어가기는커녕 걷다 보면 숲 밖으로 나오게 된다고 해서 숲의 내부에 뭐가 있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네로멜티아와 러스테리아, 그리고 베아트리스는 모두 오운의 말에 선명한 확신이 들었다.
이는 분명 자연적으로 길을 잃은 자들의 증언이 아니었다.
대부분 자연스럽게 길을 잃었다면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더라.’ 혹은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해서 서성이다 왔다.’ 같은 이유가 뚜렷한 증언을 하는 게 대부분일 것이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숲의 밖으로 나와 있었다는 비현실적인 증언이 나왔다면 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력 결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러스.”
마력 결계라는 말에 오운은 아연실색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미지의 존재가 머무르는 미확인 지역에 소중한 전사들을 번번이 파견했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으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존재가 현재까지 남아 관리를 하는 것인지, 예전에 설치된 마법이 아직까지 발동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전사들이 위험에 빠질 뻔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우선 태고의 숲으로 가 볼까?”
“기, 기다리십시오!! 위험합니다, 주군!! 먼저 남작 놈을 만나서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시고 결정하십시오!! 뭐가 있을지 모르는 위험한 곳에 주군을 냉큼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 남작?”
허겁지겁 네로멜티아의 앞을 막아선 육백 멘톨에 달하는 거구는 안절부절못하며 주군을 막으려 애를 썼다.
발을 동동 구르며 거대한 두 손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는 그 태도가 거대한 근육 덩어리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퍽 우스웠지만, 네로멜티아는 그의 이야기에 더 주목해야 했다.
현 카보니 숲에 오우거의 마을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상황에서 귀족의 계급인 남작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다른 종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심지어 이들 마을에 그럴싸한 직책을 가진 이들은 모두 만나 보았고, 남작이라 칭해질 만한 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더더욱 확신이 드는 이야기였다.
오우거의 마을에 직책을 가진 이는 부족장, 돌격대장, 그리고 내정 감독관뿐이었다.
심지어 지위의 명칭 또한 부족장이니 돌격대장이니 하는 판국에 남작이라니, 여러모로 이들의 문화와는 맞지 않는 칭호였다.
“저기 산맥 중턱에 오크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 오크 남작 놈이 있습니다! 덩치도 조그만 주제에 잘난 척이나 해대는 재수 없는 놈이지만, 그래도 아는 건 많습니다! 그놈도 태고의 숲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테니, 먼저 그놈에게 가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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