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카디스텔라 문 나이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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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눈을 마주치고 싶지도 않은 지, 고개를 힘껏 돌려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현하는 두 여성.
카디스텔라와 베아트리스는 상당히 강경한 태도로 서로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사이에서 적의가 전투로 이어지는 참사만큼은 일단 막아낸 네로멜티아가 두통마저 느끼는 듯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빵과 과자만 실컷 주워 먹고 있었던 러스테리아는 초콜릿 조각이나 크림 따위를 입가에 묻힌 채 태평히 의문을 표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냥 조금 다툼이 있었어. 별거 아니야. 그보다 빵은 맛있었니?”
“네!! 크로와상, 비어 브래드, 크림, 모카, 초콜릿에 바게트까지 다 최고였어요!! 디저트로 준비된 베리잼 생크림 케이크하고 도넛 세트도 최고였어요!!!”
마치 부모가 아이 챙기듯 손수건을 꺼내어 러스테리아의 입가를 닦아주던 네로멜티아는 러스테리아의 질문에 능숙한 솜씨로 화제를 돌렸고, 러스테리아는 신이 나서 자신이 느낀 감상을 열심히 설명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도 러스테리아의 천진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냥 흐뭇하고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굳이 이 진흙탕 싸움에 러스테리아를 휘말리게 하기도 껄끄러우니 네로멜티아는 다른 대책을 마련했다.
“시종장.”
“네. 부르셨습니까, 마왕님.”
“이 성에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뱀파이어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지?”
“청소나 빨래 등의 사소한 일들은 모두 저희 하인들 몫이고, 천 년간 크림슨 캐슬에 대외적인 일이 전무 했기에 그분들은 혹시 모를 휴미안의 공격에 대비하여 힘을 갈고 닦는 것이 의무이셨습니다.”
“좋아, 그들을 전부 소집하도록. 나의 비서관이 향후의 계획과 지시를 하명할 것이다.”
마왕의 지엄한 명령에 고개를 숙여 극진한 예를 다한 스켈레톤 시종장은 그길로 하인들에게 이 긴급한 명령을 지시하기 위해 연회장 밖을 나섰다.
갑작스러운 일 처리에 어리둥절해 있던 러스테리아는 물끄러미 네로멜티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인자하게 쓰다듬어주며 네로멜티아는 싱긋 웃어 보였다.
“우리 러스, 잘할 수 있지? 우리는 금방 가야 하니까 최대한 이들이 우리 계획을 잘 이해하고 움직일 수 있게 해야 해.”
“잘할 수 있어요! 주인님의 위엄도 똑바로 세우고 오겠어요!”
“좋아, 내 비서관은 유능하구나.”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주인의 손길과 칭찬의 말이 퍽 기뻤던 러스테리아는 헤실헤실 웃으며 주인의 품에 안겼다가, 자신을 안내할 하인이 나타나자 이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그렇게 러스테리아를 떠나보낸 네로멜티아는 다시 문제의 두 여성을 바라보았다.
태풍의 눈과 같은 일촉즉발의 그녀들.
그녀들을 말리고 갈라두었던 네로멜티아가 러스테리아와 대화하던 그 짧은 순간 사이에 그녀들은 다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마주하는 서로의 시선 사이에 불티라도 튀길 듯, 서로를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는 두 사람.
그러다 베아트리스는 자신보다 더 큰 신장을 가진 카디스텔라를 내려다보며 깔보는 시선을 보인 채, 자신의 젖가슴을 주물렀다.
없는 이를 향한 명백한 과시 행위였으며,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술이 달싹이며 ‘무유(無?)’라는 단어의 입 모양을 보인 것으로 카디스텔라는 다시 폭발해버리려고 했다.
그때 네로멜티아는 나직이, 그러나 확실하게 둘을 제지하는 말을 건넸다.
“베아트리스. 카디스텔라에게 왜 화가 난 거니?”
둘의 사이에 네로멜티아가 차분히 끼어드는 것으로, 카디스텔라는 폭발 직전이었던 자신의 감정을 가까스로 억눌러야만 했다.
네로멜티아는 정확한 지적을 하고 있었고, 모든 일의 근원에 다가서는 확실한 질문을 했다.
현재 태연자약한 모습을 하고서 가슴이 없는 카디스텔라를 놀리는 투로 다가서고 있으나, 베아트리스는 분명 그녀에게 화가 났고 이 다툼은 그것의 발로였다.
“퍼스트 블러드, 오리진 뱀파이어, 블러드 엠프레스. 다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 찬연한 이명들을 가진 카디스텔라님이라 할지라도 주인님에게는 신하에 불과하십니다. 주인님과 권속의 계약을 맺은 명백한 신하이십니다. 선혈의 여제(??)라구요? 마왕님께서는 루이나의 여신(??)이십니다.”
차분하면서도 칼같이 날이 선 어조로 강렬하게 지적을 이어가는 베아트리스.
평소 사무적인 태도를 일관하는 그녀의 모습으로 비교해봐도 명백한 냉기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카디스텔라가 활화산과 같이 타오르는 분노를 표출했다면 베아트리스는 혹한의 설산과도 같은 냉혹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하 주제에 주인의 옥체에 송곳니를 꽂는 것이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인님의 아름다운 가슴에 구멍을 내고 귀중한 피를 빨아내는 것이 과연 신하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뱀파이어라는 자들은 하나같이 본능조차 어쩌지 못해서 주인에게조차 상처를 입히는 욕망의 노예들인가요?”
“하아…….”
문제의 발단은 카디스텔라의 흡혈 행위였다.
네로멜티아가 카디스텔라에게 흡혈을 허락하는 일은 그녀들 서로가 소중한 벗이자 사랑하는 이가 되고 나서부터 천 년 전까지 지속되었던 행위였다.
문제는 흡혈이라는 것을 서로가 사랑을 속삭이는 은밀한 순간에만 행해왔기에 베아트리스에게는 그간 보여주지 않았던 생소한 모습이었고, 이 충직한 메이드는 처음 마주한 둘의 흡혈 행위를 주인을 상처입히는 불충한 행위로 간주해버린 것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네로멜티아는 흡혈을 허락하는 행위를 은밀한 밤 사랑을 속삭이기 전, 카디스텔라를 성적으로 흥분시키기 위해 그녀의 욕망을 해소해주며 본능을 일깨워 주는 하나의 전희(??)로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카디스텔라 역시 루이나가 가득한 네로멜티아의 피를 마시고 나면 극도의 황홀감에 도취되어 성감이 극대화되고 이성이 마비될 정도의 쾌락에 휩싸이니, 흡혈이라는 것은 네로멜티아에게 안기기 전 언제나 항상 해왔던 익숙한 행위였다.
네로멜티아의 깊은 한숨은 이 단단한 오해의 매듭을 어떻게 풀어가야 좋을지 답답한 마음에 나온 것이었다.
“우선 베아트리스가 생각하는 그런 행동은 아니야. 내가 좋아서 허락했고, 내게 이 정도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일인걸? 단지 우리는 입맞춤을 하는 정도의 개념으로 이런 일을 자주 해왔어.”
“그래도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님의 귀한 옥체에 흠을 내고 주인님께서 통증을 느끼시게 하는 행위가 어떻게 용납될 수 있습니까. 여제라고 떠받들어지니 이토록 오만불손한 것인가요?”
예상대로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베아트리스.
결국 네로멜티아는 과거 카디스텔라와의 은밀한 밤에 있었던 일들을 있는 대로 꺼내어 설명하는 것으로 간신히 베아트리스의 납득을 받을 수 있었다.
분명 흡혈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꺼낸 밤의 이야기였는데, 어느새 흡혈에 대한 이야기는 뒷전인 베아트리스가 이리저리 캐묻는 대로 어떤 종류의 성교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언제나 의연한 네로멜티아가 부끄러움에 물든 몇 안 되는 순간이었고, 카디스텔라는 말 그대로 건드리면 터져버릴 듯 낯이 새빨갛게 물들어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몹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베아트리스는 과거 마왕성이 존재하던 시절 네로멜티아의 방 금고를 뒤져 찾아낸 음란소설을 탐독했을 때 보였던 표정을 그대로 낯에 띄우고 있었다.
때로는 눈을 크게 뜨고, 때로는 눈썹을 까닥이고, 때로는 미간을 좁히고,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언제나 사무적인 모습을 일관하는 그녀가 나름대로 보여주는 다채로운 반응들은, 그녀가 은밀한 밤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몰입하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차분히 눈을 감은 채, 평소 보이지도 않던 미소마저 은은하게나마 낯에 띄우는 모습으로 그녀가 얼마나 만족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편이나 은은한 미소가 감도는 그 차분한 표정 안에서 명백히 느껴지는 충실감.
“우선은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가끔 이해를 못 할 순간이 돌아올지도 모르겠습니다.”
“… 너 태연하게 거짓말하지 마라…….”
사실 이야기 초반부터 모든 것을 납득했으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연기를 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베아트리스.
거기다 흡혈에 관한 이야기만 하려는 네로멜티아의 의지를 부수고, 명백한 궤변인데도 묘한 정당성이 느껴지는 교묘한 화술(??)로 자신의 관심사를 이리저리 캐낸 베아트리스의 지략은 보통이 아니었다.
베아트리스 그녀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종류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기분마저 좋아진 상황에 ‘앞으로 가끔 이해를 못 할 순간’ 같은 말을 굳이 꺼낸 것은, 앞으로도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 그때마다 들려달라는 장난스러운 농담이었다.
승자는 베아트리스였다.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혼란하던 연회장의 분위기를 깨고 러스테리아가 활기차게 들어섰다.
기운이 빠지고 부끄러움에 너덜너덜해진 네로멜티아가 자신에게 뛰어들어 와락 안겨 오는 러스테리아를 마주하고 기력을 단숨에 회복한 것은, 러스테리아의 귀여움과 생기발랄함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도 모른 채,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러스테리아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시간은 훌쩍 흘러가 버렸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네. 아쉽지만 말이야.”
“에… 에에에…? 가, 간다고…? 어, 어디를…?”
슬슬 작별을 고하는 분위기가 확연한 네로멜티아와, 그 모습을 애써 모른 척하며 말을 더듬는 카디스텔라.
카디스텔라는 너무나 오랜 시간 만에 비로소 재회한 네로멜티아가 크림슨 캐슬에서 적어도 오늘 하룻밤 정도는 묵고 가지 않을까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깊은 밤이 다가온 상황에서도 자리를 뜨려 하는 모습에 몹시 당혹스러웠다.
“밤도 늦었는데… 자고 가지? 응?”
“미안해, 카디스. 현재 마왕성은 폐허에서부터 시작하다 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아.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재해 있어.”
“나도 따라갈게! 나도 따라가서 도울 테니까!”
“너는 네 백성을 지켜야 하잖아. 갑자기 드래곤이라도 나타난다면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크림슨 캐슬에서 너 하나뿐이지.”
네로멜티아의 논리정연한 말에 카디스텔라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천 년 만에 만나서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이토록 빨리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를 죽음으로 몰아간 이들 중에는 분명 드래곤 케르디하크가 있었고, 신왕 오드볼그의 힘을 받은 용사 일행 또한 있었다.
크림슨 캐슬을 둘러싼 신앙 봉인 결계가 깨진 이상, 드래곤이나 신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었다.
“잠들어있는 권속들이 마실 피를 어떻게든 구해낼게. 그리고 마왕성으로 빨리 이주할 테니까……. 나보다 마왕성에 늦게 도착하면 안 된다?”
“알겠어.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치고 마왕성에서 너를 성대하게 맞이할게.”
애달프게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말을 잇지 못한 카디스텔라의 입술에 깊은 친애를 담은 키스를 선사한 네로멜티아는 그대로 연회장의 발코니에 나가 날아올랐다.
그렇게 유유히 사라져가는 네로멜티아 일행.
힘없이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안타까운 작별을 고하는 카디스텔라는 작별의 슬픔에 거의 울상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그들의 형체가 점점 멀어지던 중, 갑자기 베아트리스가 되돌아와서 카디스텔라의 앞에 둥실둥실 뜬 채로 멈춰 섰다.
“뜨겁고 농밀한 밤을 보내고 싶으셨을 텐데, 아쉬워서 어떻게 하죠?”
“너 나 놀리냐!?”
느닷없이 아픈 구석을 찔러오는 베아트리스에게 발끈한 카디스텔라.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카디스텔라의 위협적인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본론을 꺼냈다.
“저희는 건축 자재를 구하기 위해 동부의 데카스트라스 산맥으로 향합니다만, 카디스텔라님은 남부에 볼일이 있으실 것 같군요.”
“무슨 말이야?”
“현재 테라리스의 심각한 오염으로 이곳 북부까지는 휴미안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만, 그들의 기술력으로 미루어 볼 때 아스타리스 대륙 중부까지는 그들의 손길이 미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남아있는 이종족을 노예로 사로잡기 위해서 그들은 무엇이든 하니까요. 그리고 휴미안의 노예 상인들 정도는 카디스텔라님께서 직접 나서지 않으셔도 크림슨 캐슬의 고위 뱀파이어 분들이 충분히 사냥할 수 있겠죠?”
더없이 탁월한 조언이었다.
에둘러 돌려 말한 이야기였으나, 이 말에 진의를 깨닫지 못할 만큼 카디스텔라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간 크림슨 캐슬의 밖에 나갈 수 없었던 카디스텔라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정보였고, 앞으로의 행보가 정해지는 결정적인 조언이었다.
고위 뱀파이어들을 파견해 휴미안 노예 상인과 그들이 거느린 사병들을 사로잡는다면 피의 확보에 관한 문제도 해결되고 다른 이종족들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화색이 돌고 있는 카디스텔라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주었고, 그 미소는 티 없이 맑고 순수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럼 무운을.”
짧은 인사를 끝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주인을 향해 날아가며 급속도로 사라져가는 베아트리스.
카디스텔라는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네로멜티아 일행이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지자, 오연(??)한 모습으로 뒤를 돌아 연회장으로 들어온 카디스텔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하인들에게 호령했다.
“깨어있는 뱀파이어들을 모두 소집해라! 당장! 일할 시간이다!!”
여제의 거센 호령에 하인들은 저마다 고개를 조아리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카디스텔라의 안면에는 잔혹한 미소가 가득했고, 그 살벌한 모습은 광증으로까지 여겨질 정도로 험악했다.
길게 찢어진 그녀의 입가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였고, 그 끝이 점차 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진홍색 눈동자의 동공이 섬뜩하게 수축했고, 선혈을 연상케 하는 그 소름 끼치는 안광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더러운 휴미안 놈들… 전부 끌고 와서 평생토록 피를 짜내는 기계를 만들어주겠다! 죽지도 못하고 착취당하는 삶을 사는 것이 너희가 짊어질 형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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