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크림슨 캐슬(Crimson Cas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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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한 기운을 흩뿌리는 칠흑의 고성.
가까이서 본 그 자태는 한겨울 깊고 어두운 지하동굴에 들어서는 것처럼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성의 하위계층은 창문이 전혀 없는 석벽만이 자리하고 있었고, 중층에 이르러서야 창문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상층에 해당하는 위치는 발코니마저 존재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존재했을지 모를 고성이라는 것을 확연히 보여주듯, 성벽에는 혼탁한 빛의 담쟁이덩굴들이 벽면을 타고 뻗어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그것은 실제 살아있는 식물이 아니었다.
석재 조각을 담쟁이덩굴 모양으로 깎아 만든 석조 예술품이었고, 그것이 성의 벽면에 붙어 장식으로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성벽에 장식된 가고일이나 해골의 석상 역시 당장에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동감이 넘치고 있어 크림슨 캐슬의 외부 형태는 모든 것을 돌로 만들어 버린다는 바실리스크의 숨결을 맞은 것처럼 몹시 스산해 보였다.
“이상하네요. 카디스텔라님께서 계셨다면 마중을 나오지 않으실 리가 없을 텐데…….”
러스테리아는 현재의 적막에 깊은 의문을 품은 채, 성의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원래 이 크림슨 캐슬의 주인, 카디스텔라는 기품을 지키기 위해 본인이 직접 밖으로 나오진 않을지라도 하인들을 시켜 손님을 정중히 대했다.
하다못해 천 년이나 벗을 만나지 못했던 현 상황이라면 당장에라도 문을 박차고 달려 나오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 네로멜티아 일행에게는 맞이하는 하인들은커녕 성의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정문을 열기 위해 나아가는 러스테리아의 손목을 낚아채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네로멜티아.
“꺅!”
“다가가지 마.”
네로멜티아는 성을 바라보며 러스테리아에게 나직이 주의를 주었다.
갑자기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 끌어당긴 주인의 거친 손길에 놀라 짧은 비명이 터졌던 러스테리아는 주인의 이질적인 반응에 당황했다.
그동안 베아트리스는 차분히 네로멜티아를 지나 성에 가까이 다가가며 주인에게 물었다.
“부술까요?”
“그래.”
주인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자신이 입고 있는 하녀복의 끈을 풀기 시작한 베아트리스.
하녀복의 칼라 아래 어깨 부분부터 팔의 외곽선을 따라 손목에 이르기까지 길게 갈라진 소매.
그 틈이 벌어지지 않게 다이아몬드 형태로 길게 교차 되어 묶여있던 끈을 손목 부분부터 차례대로 풀었고, 이내 팔을 감싸고 있던 소매가 하나의 긴 천이 되어 나풀거리며 풀어진 것으로 그녀의 하얀 피부가 외부에 선명히 드러났다.
고운 굴곡에 매끄러운 피부가 인상적인 베아트리스의 팔.
맨살을 모두 드러낸 그녀의 팔은 곧 크림슨 캐슬의 거대한 성문을 향해 뻗어졌다.
“잠시 물러나 계시길 추천합니다.”
그 말에 네로멜티아는 러스테리아를 끌어안고서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베아트리스의 뻗어진 팔의 팔꿈치 부분이 세로로 길게 갈라지며 그 내부에서 하나의 원형 톱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녀린 여성의 팔 내부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크고 흉악한 원형 톱날.
위이이이이이이이잉!!!
원형 톱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세차게 회전하기 시작했고, 톱날에 마력이 가득 실리며 루이나 특유의 어두운 빛이 강하게 작열하기 시작했다.
공격의 준비를 갖춘 베아트리스를 보고 의문이 들었던 러스테리아는 안력을 높여 그녀의 전방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이 성의 정문으로 다가서던 자신을 왜 끌어당기며 말렸는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크림슨 캐슬 외부에는 성의 전체를 감싸고 있는 봉인 결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의 형태는 몹시 크고 웅장하며, 강대한 기운을 품고 있었으나 보기에는 몹시 투명하여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봉인 결계에 흐르는 마력의 근원을 살펴본 러스테리아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앙 결계!!”
“그래, 그냥 만지면 크게 다칠 수도 있지. 우리 러스는 조금 더 주의하는 법을 배워야겠는걸?”
어째서 언데드들이 거주하는 죽음의 성에 신의 힘을 빌어 만든 신앙 결계가 존재하는 것인가.
러스테리아는 두서없이 마구 떠오르는 갖가지 생각과 상념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베아트리스의 원형 톱날이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다 신앙 결계에 휘둘러졌다.
카아아아아아아앙!!!!!
마치 용암의 한가운데에 폭약이라도 떨어진 듯, 맹렬한 불꽃을 튀겨대며 갈려 나가는 신앙 결계.
강대한 신의 힘이 내포된 봉인 결계이건만, 베아트리스의 원형 톱날은 그것조차 우습게 찢어발기고 있었다.
그녀의 살벌한 기세에 러스테리아는 살상 능력이 특기인 에고 돌이라는, 베아트리스에 대한 설명이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헤모니겐트 역대 최고의 마도 공학자임과 동시에 에고 돌 장인이었던 로널드 거트만의 능력과 지식이 모두 집대성된 최고의 걸작.
제작 이후에도 그가 사망하는 순간까지 연구를 거듭하며 개조와 능력 향상을 끊임없이 반복했던 그의 일생을 대표하는 에고 돌.
콰차아아아앙!!! 쿠르르르르릉!!!
신의 힘이라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얼마 버티지 못한 봉인 결계.
빛과 정의의 신이자 신들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신왕 오드볼그(Odvolg)의 기운이 가득 내포된 결계였으나 강대한 루이나를 원동력으로 회전하는 베아트리스의 아다만티움 톱날에는 속수무책으로 그 힘이 찢어 발겨졌고, 이내 그 충격은 결계 전체를 허물어버리는 발단이 되었다.
신력이라 일컬어지는 마력으로 구성된 봉인 결계는 마치 거대한 유리 건축물이 부서진 듯, 조각조각으로 깨져서 무너지다 이내 대기 중으로 모조리 흩어져 사라졌다.
원래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우우우웅… 철컥!
신앙 봉인의 결계가 부서짐과 동시에 회전을 서서히 늦추며 멈춰가던 원형 톱날은 이내 자신이 존재했던 베아트리스의 팔 내부로 들어갔고, 원형 톱을 꺼내며 길게 벌어졌던 그녀의 팔꿈치 틈도 흔적도 없이 메꿔졌다.
그저 그녀의 팔이 아지랑이를 피워낼 정도의 강한 열기를 방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녀가 드러낸 강대한 능력을 가볍게 상기시킬 뿐이었다.
“끝났습니다, 주인님.”
태연히 뒤를 돌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예의를 갖추는 에고 돌 메이드.
네로멜티아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풀어헤친 의복의 끈을 다시 묶어 길게 늘어진 천이 다시 소매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묶어주기 시작했다.
“수고했어, 베아트리스.”
끈이 트럼프의 다이아몬드 형태로 한 차례씩 교차하며 천을 고정해 나갈 때마다, 정성스럽게 하녀의 의복이 고쳐지고 있었다.
애정을 가득 담아 손수 하녀의 의복을 고쳐주는 주인의 자애로운 손길이 베아트리스는 싫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본래의 그녀였다면 주인께서 할 일이 아니라면서 의복을 스스로 고쳐 입겠다고 극구 거부를 했을 것이나, 현재 그녀는 침묵을 지킨 채 주인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러스테리아는 무미건조한 베아트리스의 낯에 그녀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인의 작은 애정과 정성에도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이 귀엽고 아름답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작은 질투심이 올라오는 것을 애써 지워내야만 했다.
러스테리아 그녀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깊은 속마음의 일이었으나, 다음에 뭔가 하인이 할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자신이 먼저 나서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끄그그그그그극…!
육중하면서도 요란한 울림을 내며 정문이 열렸다.
낡아서 빛이 바랜 데다 경첩이 요란하게 삐걱거리는 고성의 정문.
붉은빛의 목재로 이루어져 귀족적인 장식 문양이 가득 양각된 고풍스러운 고성의 정문이 열리고 어두컴컴한 내부가 드러났다.
“어서 오십시오! 여제님의 의지 아래, 저희 미천한 종들은 귀빈분들을 환영하나이다!”
열린 정문의 너머에는 은은한 빛으로 그 형태를 겨우 보여주고 있을 뿐인 어두운 복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듬성듬성 음습한 빛을 발할 뿐인 촛대가 벽면에 조금씩 위치해 다리를 헛디디지 않을 정도로만 어둠을 헤쳐내고 있을 뿐이었고, 복도의 바닥에 깔린 길고 끝을 모를 진홍빛 카펫은 화사함과는 거리가 있는 까닭에 어둠을 더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복도의 앞에 예스러운 검은빛 정장을 입은 스켈레톤 둘이 고개를 숙여 정중한 인사를 건네왔다.
“너희는 카디스텔라의 하인들인가?”
“그렇습니다. 선혈의 성 크림슨 캐슬의 주인이시자, 헤모니겐트 망자들의 적법한 지배자! 카디스텔라 문 나이트님께서 저희의 온당한 주인이시옵니다.”
그들의 미사여구 가득한 말에서 네로멜티아는 답을 찾았다.
현재 카디스텔라는 생존해 있었다.
휴미안들의 마수를 피해 이 고성의 안에 자리를 잡고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다.
단지 의문이 들었던 것은 베아트리스조차 단번에 부술 수 있는 결계를 어째서 여태까지 부수지 않고 내버려 두며 지내왔는지에 대해서였다.
“따라오시지요. 주인님께서 홀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로멜티아는 뒤를 돌아 나아가는 스켈레톤 하인들을 유유히 따라갔다.
자신들의 주인이 나아가자 러스테리아와 베아트리스 역시 그녀를 따라나서기 시작했는데, 러스테리아의 안색이 조금 불편한 듯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베아트리스는 러스테리아의 상태를 살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다소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러스테리아의 눈.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기나긴 복도의 끝을 응시한 채, 갖은 상념이 오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다소 움츠러든 어깨와 경계심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시선.
러스테리아는 시선을 전방에 고정한 채 걸어가며, 베아트리스에게 나직이 말했다.
“어째서… 흡혈귀의 성인데 뱀파이어 하인이 마중을 나오지 않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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