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마왕성 재건 계획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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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드와의 만남 이후 남은 시간은 단조롭게 흘러갔다.
속히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정무를 모두 정리해낸 네로멜티아는 새벽까지 백성들 모두에게 나누어 줄 마도구를 만들었다.
투명화 마법인 인비저블(Invisible)과 소음(?音) 마법인 사일런스(Silence)가 담긴 스크롤을 대량으로 작성해, 자신이 없는 동안에 벌어질 수 있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도주용 마법 스크롤을 나누어 줄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작성한 스크롤을 베아트리스를 보내어 블랙 나이트 진영에 전달한 네로멜티아는 깊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빠르게 준비를 마친 뒤, 광장에서 러스테리아를 기다렸다.
베아트리스는 네로멜티아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잠이 필요 없는 에고 돌이었기에 네로멜티아와 함께 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러스테리아는 새벽 내내 비상시 대책 매뉴얼을 작성해 마법으로 복사까지 진행하며 백성들에게 나누어줄 책자를 만드느라 잠이 모자랐고, 그만 늦잠을 자버렸기에 조금 늦어버렸다.
러스테리아가 작성한 비상시 대책 매뉴얼 또한 네로멜티아가 작성한 스크롤과 같이 유사시에 백성들이 상황에 안전하게 대처하고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는 방법이 서술되어 있어 몹시 도움이 되는 요소였다.
“흐에… 주인님을 기다리시게 하다니 죄송해요……. 사실 안 자도 됐었는데… 먼 길 떠나는 거니까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서 상태를 좋게 하려다가…….”
“신경 쓰지 마. 러스가 얼마나 애를 쓰는지 아는데, 오히려 쉬지 못하게 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꼭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거잖아요! 저는 마왕성에 남아서 편히 쉬는 것보다 주인님의 곁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게 훨씬 좋아요!”
사실 순혈 악마인 러스테리아는 며칠을 잠들지 않아도 버틸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며 최선을 다해 주인의 도움이 되고자 하는 생각에 한 줌 남은 모자란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수면을 취하려 잠자리에 들었고, 그러다가 알람 마법의 요란한 소리에도 제때 깨어나지 못해 십여 분이 늦어버렸다.
자신의 막사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온 비서가 안쓰러웠던 네로멜티아는 손수 비서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며 속삭였다.
“나도 사실은 러스랑 같이 움직일 수 있어서 기뻐.”
“하읏… 주, 주인님… 제가 할게요…!”
“괜찮아, 가만히 있어.”
머리를 정리할 사이도 없이 마법으로 급하게 씻기만 하고 나온 터라 평소와 다르게 잔뜩 흐트러져 있는 러스테리아의 머릿결.
네로멜티아는 다른 이들을 만나기 전에 그녀를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꾸며주려 마음먹었다.
평소 러스테리아가 고수하는 단정한 형태.
목 뒤로 머리를 둥글게 말아 정리한 모습.
네로멜티아는 빗을 하나 꺼내 머릿결을 정리해주고, 이내 머리를 그녀가 항상 고수하던 식대로 둥글게 말았다.
그리고 러스테리아에게서 본인의 머리끈을 받아 고정해주는 것으로 정리가 모두 끝이 났다.
“가 볼까?”
“그러실 필요 없으십니다.”
이제 막 크로포드의 막사로 움직이려 했는데, 측면에서 들려온 익숙한 음성.
네로멜티아가 움직이기 전에 크로포드와 아티스가 광장에 도착한 것이었다.
분위기로 보아 둘은 아무래도 러스테리아의 머리 정리가 끝날 때까지 멀리서 기다려준 모양이었고, 신사적인 그들이 여성에 대해 배려의 시간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우리가 너무 늦은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마땅히 신하가 할 일을 주군께서 나서시게 했는데, 이토록 모자란 제가 어찌 주군의 방문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주군을 찾아 뵈어야 마땅합니다.”
“그저 인사를 나눌 뿐인데, 앞으로도 정무에 바쁠 그대를 어찌 걸음하게 할 수 있겠나.”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대화가 오갔다.
애초에 네로멜티아는 이토록 충성이 강하고 주군을 극진히 모시는 크로포드가 정무로 바쁜 와중에 자신을 위해 시간을 쏟는 일이 없도록 방문에 대해 연락을 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크로포드는 자신의 주군이 가진 따뜻한 배려를 알기에 당연히 출발하기 전 자신을 찾아올 거란 걸 예상하고 먼저 주군을 찾아온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서로를 소중히 대하고 있기에 나타나는 모습.
“오호호호호! 이거야 원, 질투가 날 정도로 사이가 좋으십니다! 이러다 두 분께서 혼인이라도 하는 것이 아니신지?”
“무, 무슨…!!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주군께 무례한 언동입니다, 아티스 경!!!”
그저 짓궂은 농담에 불과한 아티스의 이야기에 발끈하며 나서는 마왕과 기사단장.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당황하며 소리치는 마왕.
온갖 감정이 들끓는 가운데 낯을 붉히며 항변하는 기사단장.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애달픈 표정을 지어 보이는 러스테리아.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에서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베아트리스.
그 모습이 퍽 재미있다는 듯 아티스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호호호호! 제가 농이 지나쳤나 봅니다! 그래도 어느 시대든 공주와 기사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인기가 있는 법이니, 한 번 고려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나는 공주가 아니다!”
“감히 어떻게 제가 그런 불충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충분히 재미를 보았다는 듯, 아티스는 짓궂은 미소를 거두고 진중하게 마왕을 바라보았다.
한차례 소란이 일었으나 분명한 것은 잠시의 이별과 서로에 대한 걱정 탓에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유하게 환기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아티스가 이를 염두에 두고 한 농담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적어도 나쁘지는 않은 분위기였다.
“남겨진 백성들의 보호와 마왕성 재건 계획은 크로포드 경과 제가 잘 진행하고 있을 터이니, 마왕께서는 너무 근심하지 마시고 부디 뜻대로 행동하시길.”
가볍게, 그러나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이야기하는 아티스의 예스러운 행동에 그간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가라앉고 모두가 진중한 모습이 되었다.
네로멜티아는 그의 듬직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는 사실 진작에 정리했어야 하는 일이었으나, 그간 워낙 바쁜 일정을 보내며 정신이 없었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아티스는 고블린의 왕이기도 하며, 나의 신하이기도 한데 공식적인 위치가 뚜렷하지 않구나. 아티스 ‘경’이라는 말에 내 미처 배려하지 못한 일이 이제야 떠올랐다. 미안하구나.”
“괘념치 마십시오. 마왕께서 바쁘신 와중에 저의 일을 처리해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늙은이는 아닙니다. 끌끌끌.”
‘경’이라는 호칭은 높은 계급에 머무르는 이를 두고 붙이는 예스러운 표현이었다.
현재 아티스는 헤모니겐트의 신하이자 마왕군의 간부이며, 고블린의 왕이라 불리는 하나의 제후였다.
그런 뚜렷한 위치가 존재함에도 제대로 된 작위 수여도 없었던 것이었다.
아티스에 대한 배려가 모자랐던 부분이라고 볼 수 있기도 했기에 네로멜티아는 그에게 선뜻 사과를 건넸다.
“제대로 된 의식을 준비해 정식적인 작위 수여를 진행할 것이고, 나아가 후에 있을 작위 수여식에서 마왕의 권속 계약에 대해서도 진행하길 염두에 두고 있으니 충분히 생각해 본 뒤에 이야기하도록.”
“이 비천한 고블린에게 과한 영광을 내려주신다니 저는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오호호호호!”
마왕의 권속.
마왕과 권속의 계약을 맺으면 마왕이 가진 루이나의 권능에 의해 능력이 향상되며, 영생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다.
현재 데모니안이 가진 수명보다 월등히 오랜 세월을 살아온 크로포드 역시 마왕의 권속이라는 작위의 혜택을 보고 있으며, 특수한 경우라 조금 다르지만 러스테리아와 베아트리스 역시 마왕의 권속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장수해 봐야 오십 년을 넘기기 힘든 고블린의 특성상, 현재 오십 세인 아티스는 이미 사례도 별로 없는 초장수 고블린이었고 그에게 삶에 대한 욕망이 있다면 네로멜티아와의 권속 계약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럼,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 내가 없는 동안 마왕성을 잘 부탁한다.”
“부디 강녕하시길.”
“아무런 근심 없이 다녀오십시오. 기회가 된다면 시간에 여유를 두어 아리따운 레이디들과 행복한 한때도 보내고 오시길.”
짤막하지만 강한 충의가 느껴지는 크로포드의 말.
짓궂은 농을 섞었으나 든든함 또한 느껴지는 아티스의 말.
네로멜티아는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인사에 답한 뒤, 비행 마법을 시전하여 빠르게 날아올랐다.
러스테리아와 베아트리스 역시 비행 마법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주인을 따라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강대한 마력을 지닌 네로멜티아 일행 셋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고, 이미 주군의 모습이 사라진 텅 빈 하늘을 한동안 바라보던 크로포드는 이내 고개를 돌려 아티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이만 업무를 진행하러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아티스 경.”
“오호호호호! 수고가 많습니다, 크로포드 경! 나중에 만나 식사라도 하며 같은 주군을 모시는 신하들끼리 우정을 돈독히 하도록 합시다! 그럼 먼저 실례하지요!”
작별의 인사가 끝난 뒤, 강한 묵례를 나눈 둘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며 헤어지게 되었다.
속히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 밀린 업무를 수행할 생각에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들을 떠올리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크로포드.
그와 달리 아티스의 낯은 거짓으로라도 깨끗하다 말할 수 없는 진득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결코 밖으로 꺼내지 않고 입안에서만 맴도는 조용하면서도 음흉한 웃음.
머지않아 아티스의 앞에 데모니안 사내 둘과 고블린 사내 셋이 폐허에 쌓인 돌무더기의 뒤에서 은밀히 나타나 그의 앞에 섰다.
“아티스님. 일은 잘 진행되었는지요.”
“아무렴. 모든 일은 순탄하다. 마왕께서는 비서관과 메이드를 이끌고 마왕성 밖으로 출타하셨지. 충직한 기사인 크로포드도 한동안은 정무에 바빠 시야가 좁아질 테고.”
아티스가 전해오는 소식에 다섯의 사내들은 저마다 욕망이 번들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교환했다.
이들의 의미심장한 밀담은 분명 이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이 상황을 목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티스는 더욱 짙고 끈적한 웃음을 지으며 사내들에게 선언했다.
“우리의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을 것이다. 동지들을 소집하라. 마왕께서 자리를 비우신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원대한 계획은 이 땅에 실현될 것이다!”
아티스의 선언 이후, 아티스와 사내들의 음흉한 웃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온갖 욕망이 들끓어 번들거리는 그들의 모습은 이내 폐허의 하수도로 은밀히 사라져 버렸다.
밀회는 이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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