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폐허의 흔적은 과거를 말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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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돌무더기가 되어버린 마왕성.
을씨년스러운 폐허가 되어버린 이곳은 그나마 남아있는 일부 벽면이 과거의 영광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 용사 일행과 드래곤 케르디하크를 상대해야만 했던 힘겨운 전투에서 상당한 부분이 파괴되고 손실되었으나, 그 잔해조차도 보기 싫었던 것인지 휴미안의 군대가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과거 헤모니겐트의 이름 높은 강자들이 지배자를 알현하기 위해 모였던 마왕성 최상층인 옥좌의 방은 이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웃고 떠들던 연회장을 비롯해 집무실, 회의실, 식당, 연무장 등등의 모든 장소들은 그저 아련한 기억 속에서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러스테리아는 다리가 사라져 건널 수 없게 된 해자를 비행 마법으로 건넜다.
사뿐히 건너편에 안착하면서도 인상을 찌푸리는 것은 해자에 가득 고인 썩은 물에서 올라오는 악취 때문일 것이었다.
크게 손짓하며 이상이 없음을 알리는 러스테리아를 따라 네로멜티아 역시 해자를 건넜다.
해자를 건너 더욱 가까이서 성의 잔해를 보고 있으니 진정 과거의 모든 것은 멸망했다는 사실이 더욱 실감이 났다.
“뭔가 쓸만한 것을 찾는 거라면 당연히 성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딱 맞았지 뭐예요?”
“그래, 잘했어. 똑똑한 비서가 있어서 행복한걸?”
“헤헤…”
활기 넘치게 이야기하는 러스테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녀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웃어버렸다.
다 허물어진 계단 몇을 올라 과거 마왕성의 내부였을 장소로 들어선 두 사람.
본래 거대한 중앙홀을 지나 복잡한 통로를 따라갔어야 도달할 수 있었던 그 장소는 현재 휑하니 뚫린 폐허를 일직선으로 걷는 것만으로도 도착할 수 있었다.
벽이고 기둥이고 아무것도 없는 돌무더기에 불과했으니 발을 디디기가 불편하다는 것 외에는 거칠 것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깊게 파묻혀 있던 곳을 잘도 찾아냈네.”
“그렇죠? 금속 탐지 마법을 사용하니까 반응이 오더라구요. 금속류는 대부분 값이 나가거나 유용한 게 많으니까 찾아본 건데 적중했지 뭐예요.”
코르니움으로 이루어진 흑색의 거대한 문이 지면에 견고히 박혀있었다.
러스테리아가 돌무더기를 파헤치면서 생겼을 깊은 구덩이 아래에 자리한 그 문은 원래는 사용하지 않던 숨겨진 문.
본래 계단이었을 장소에 대신 자리한 검은 문은 위기 시에 연구실을 은폐하고 지키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어 경보가 울리면 침입자가 계단 자체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문이었다.
“이 문을 휴미안들이 발견했다면 어떻게든 부수고 약탈을 했겠지만…….”
“성의 잔해가 너무 많이 쌓여서 파헤칠 엄두도 못 낸 모양이네요.”
고작 이 정도 돌무더기도 어쩌기 힘들어서 제대로 수색도 못 한 것들에게 기습을 허용해 멸망까지 이른 것이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아무래도 시간과 공을 들인다면 잔해를 전부 치우는 일도 어려운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밑바닥에 무언가 값진 것이 있을 거라는 확증이 없는 상황에서 기약 없는 노력을 쏟긴 싫었을 것이다.
하물며 마왕성의 모든 보물들은 전부 네로멜티아가 소유한 차원의 공간 창고 ‘디멘셔널 스토리지(Dimensional Storage)’ 내부에 저장되어 있었기에 다 허물어진 잔해 속에서 제대로 된 보상을 찾아낼 수도 없었을 상황.
아무리 뒤져도 온통 쓰레기와 건물의 무너진 잔해뿐인 돌무덤.
그러니 더더욱 마왕성의 잔해는 뒤져봐야 보잘것없는 멸망한 과거의 껍데기 취급을 받고 약탈의 손길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열어볼까?”
“네. 해제 마법을 사용할게요.”
깊은 구덩이의 아래까지 내려와 문 앞에 선 두 사람.
러스테리아는 네로멜티아가 힘을 쓸 일이 없게 자신이 먼저 나서서 마법을 사용했다.
왕을 보좌하는 비서관에게 주어진 특별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주인을 보좌하며 도움이 되는 자신의 모습까지 떠오르자 기분이 좋아진 러스테리아는 헤실헤실 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천진한 모습이 네로멜티아는 몹시 사랑스러워 보였다.
피싱!
“어, 어라?”
피싱!
“어어…”
그러나 코르니움제의 견고한 차단문은 러스테리아의 마력을 원천 봉쇄했고, 마법은 채 완성되지도 못했다.
몇 번의 시도를 해도 마법이 작동하지 않자 금방 울상이 되어버린 러스테리아는 차단문과 주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울먹이며 다급히 말했다.
“저 정말 마법 열심히 익혔는데… 잘할 수 있는데…!”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네 탓이 아니야.”
눈가가 어른거리는 러스테리아를 따뜻하게 쓰다듬으며 달래준 네로멜티아는 소중한 비서에게 방어 마법을 걸어주었다.
보기만 해도 강대한 마력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상위 마법.
구 형태의 투명한 마력 덩어리가 러스테리아의 주변을 빈틈없이 감쌌고, 네로멜티아는 견고한 코르니움의 차단벽을 붙잡고 말했다.
“분명 관리자용 열쇠로만 열 수 있게 설계되어 있겠지만… 지금은 열쇠가 없으니까…. 이럴 때는 힘으로 뜯어내야지.”
끼기기기기긱!!!
네로멜티아가 살짝 힘을 주자 천년의 세월을 흠집 하나 없이 버텨온 흑철의 차단문이 요란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과거 역대의 다른 마왕들과 다르게 마법보다는 강력한 힘을 비롯한 신체 능력으로 전장에서 위용을 과시했던, 역대 최강의 마왕 네로멜티아 디 이시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끼이이이이익!! 캉!! 콰드드드득!!!
차단문이 거세게 휘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요란하게 금이 가며 찢어지다가 문을 고정하는 지면 채로 뜯어져 버렸다.
문은 뜯어냈으나 러스테리아가 파놓은 구덩이의 내부가 비좁아 뜯어낸 문짝을 어쩌지 못하는 순간.
네로멜티아는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양측의 벽면에 자신이 뜯어낸 차단문의 두 문짝을 갖다 댄 뒤, 거세게 힘을 가해 밀어냈다.
콰아아아아아앙!!!!!
콰르르르르르르르…!!!!
순간 주변의 모든 돌무더기들이 폭발하듯 터져나갔고, 성의 잔해 무더기가 지닌 천년의 역사가 무색할 만큼 모든 것이 손쉽게 제거되었다.
강한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성처럼 깨끗이 밀려 사라진 돌무더기.
폭발음이라 할 정도의 강렬한 굉음에 뒤이어 주변이 휑한 공터가 되어버렸다.
단지 돌무더기의 가운데에 만들어진 작은 구덩이 안에서 누군가 힘을 주어 만든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현실.
단 한 번의 힘으로 구덩이 안에서 주변에 높게 쌓인 잔해들을 전부 치워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하늘 높이 비산했던 잔해들 몇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이런 과격한 일을 벌일 셈이었기에 러스테리아에게 미리 방어 마법을 사용해 준 것이었다.
강대한 신체를 가진 네로멜티아에게는 굳이 방어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일이었으나 거세게 비산하는 돌덩이에 가녀린 러스테리아가 맞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
“힘이 있으면 머리가 고생할 일은 없지. 안 그래?”
“너무 간단하게 정리하셔서… 기운이 빠져요…….”
네로멜티아는 다정하게 러스테리아의 어깨를 감싸고 함께 연구실의 내부로 내려갔다.
어두컴컴한 내부의 상황에 네로멜티아는 조명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러스테리아를 배려해 주었다.
본래 이런 사소한 마법들은 자신이 먼저 나서서 주인이 귀찮은 일 없게 하겠다 다짐했었는데, 현재 러스테리아는 주인의 규모가 다른 대처 방법에 넋을 잃어버려 주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다소 깊은 계단을 다 내려왔을 무렵, 네로멜티아는 계단 측면 벽에 위치한 수정구에 손을 얹어 마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고, 이는 네로멜티아가 이 장소에 대해 훤히 알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우우우우우웅
마력으로 작동하는 장치들이 주변을 공명하는 듯한 구동음을 낸 뒤, 연구실의 내부가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마력을 주입받아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수정구들이 천장 곳곳에 박혀 환하게 내부를 밝혔다.
인체를 흉내 내어 만든 금속 재질의 뼈대들이 온갖 형태로 늘어서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한창 제작 중이었던 인형의 뼈대가 마력 회로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다.
이어 붙여져 있던 서넛의 책상 위에는 온갖 종류의 설계도와 연구일지, 혹은 기록 문서 따위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천년이나 지나 본래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었거나 썩어 버린 용액들이 플라스크 내부에 시커멓게 말라붙어 있었고, 개중에는 하얀 사기잔 옆에 놓인 플라스크도 있어 연구실의 주인이 플라스크로 차나 커피 따위를 끓여 마셨음을 짐작하게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래도… 악취가 난다거나… 벌레가 끓는다거나… 하진 않고 비교적 깨끗하네요?”
“연구실은 정리정돈이 안 될 수는 있어도 더러울 수는 없지. 어떤 미세한 것이 실험에 변수가 될지 모르니까. 전체 소독도 자주 했던 것으로 기억해.”
“그러고 보니 주인님과 로널드 선생님은 많이 친하셨었죠?”
네로멜티아는 천년이나 지난 커피가 꺼멓게 말라붙은 사기잔을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들은 마음을 찌르는 송곳이기도 했으니,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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