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폐허의 흔적은 과거를 말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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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과거를 딛고 희망을 노래하던 연회가 끝나고 날이 밝았다.
새벽까지 진행된 환희의 연회는 모든 이를 취하게 만들었으나 날이 밝은 뒤, 잠에서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든 이들이 그들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기다려온 외부로의 첫걸음이니 잠 따위로 이 행복에 벅찬 순간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해안 절벽의 입구에서부터 네로멜티아가 사용한 대규모 비행 마법을 통해 하늘로 날아오른 이들은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비행과 더불어 광활한 바깥세상의 풍경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맑고 푸른 하늘 대신 오염된 분진에 가득 차 어두운 하늘이었으며 싱그러운 바다 내음 대신 오염된 물과 적조가 만드는 부취(??)만이 가득한 광경이었으나, 어둡고 답답한 동굴 안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현실이었다.
고블린들은 하수도에서 언더 바르커스로 건너올 때 한 번 본 광경이었지만, 다시 봐도 좋은 이 모습에 현실을 만끽하며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오히려 밀폐된 공간에서 생활한 까닭에 대기 오염에 덜 노출되었던 이들이었으나 밖에 나온 이상 대기의 오염에 직접 노출될 수밖에 없었기에, 네로멜티아는 추가로 그들 모두에게 정화마법을 걸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왕성의 드높은 벽을 넘어 그 내부까지 빠르게 이동했다.
“이건 거의 유적이나 다름없네요…….”
곳곳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외벽 너머로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온갖 돌무더기의 잔해뿐이었다.
천 년 전 휴미안의 침공 당시 철저히 파괴되었던 마왕성의 일대는 천 년의 긴 세월을 거치며 풍화마저 진행되어 과거의 모습을 알기 힘들 정도의 돌무더기 폐허가 된 상황이었다.
“아티스.”
“부르셨습니까, 마왕님!”
“너는 이런 곳에서 책들을 찾아냈었던 건가?”
“저런 돌무더기 아래를 잘 뒤지면 비나 바람을 피해 잘 보존된 책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과거 서고(書?)였던 곳을 발견하기도 했지요!”
네로멜티아는 일행들을 데리고 과거 광장이었던 장소 한가운데에 안착했다.
이미 잔해조차 다 삭아 사라졌지만, 그 와중에 남아있는 작은 흔적들.
누군가 불을 피우기 위해 돌무더기를 쌓은 흔적.
널브러진 갑옷들과 그 내부에 자리한 뼛조각들.
그리고 사각형의 거대한 칼날.
칼등의 부분에는 밧줄을 묶는 용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리가 달려있었고, 누군가 들고 휘두르는 용도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도검과는 거리가 먼 형태였다.
“… 이건…?”
“단두대다.”
불현듯 떠오른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듯 아연실색하며 애써 의문을 표하는 러스테리아에게 네로멜티아는 단호히 답을 말하는 것으로 그녀의 예상이 사실임을 알려주었다.
휴미안들은 마왕성을 장악한 뒤, 사로잡은 데모니안들을 노예로 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필시 그들은 내키는 대로 광장에 포로들을 끌고 와 단두대에 내걸고 산채로 불태우는 등 공개처형을 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저항하지 못하는 이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살해하며 유희로 삼았음이 분명했다.
휴미안군에 맞서 싸우던 이들은 그들의 분노를 사서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끔찍한 고문을 받았을 것이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더라도 노예로서 가치가 없는 이들은 그 목숨이 한순간의 구경거리로서 소비되었을 것이다.
전쟁의 광기에 물든 자들이 피와 살육의 향연을 벌이며 약탈한 물건들을 나누고 술과 고기에 취한 채 희희낙락 웃음 지었을 것이다.
광장의 곳곳에 그런 흔적들 여럿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더 나아가 흔적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의 잔혹한 분위기였다면 여성들을 모아 공개적으로 윤간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수만에 달하는 휴미안 군이 포로로 잡힌 여성들을 광장에 몰아넣고 며칠이고 끊이지 않는 강간을 벌였을 것이 분명했다.
못해도 여성 한 명당 수십 수백에 달하는 남성들이 줄지어 몰려들어 끊이지 않는 능욕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그 와중에 수많은 포로 여성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나마 그 잔혹한 윤간의 시간을 버티고 살아남은 이들은 휴미안의 나라로 끌려가 성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네로멜티아는 그 모든 모습이 선하게 그려지는 현실이 싫었다.
잠시 상념에 잠긴 채, 조용히 이를 갈던 네로멜티아는 자신을 따라온 백성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명령을 내렸다.
“잔해를 뒤져 쓸만한 물건들을 모아라! 건축에 필요한 자재 또한 쓸만한 것이 남아있다면 종류를 불문하고 전부 모은다! 희생자의 유골이 발견되면 그 또한 모은다!”
우선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과거에 대한 울분과 비탄은 안전과 생활이 확보된 다음이었다.
적어도 적과 마주하고 나서야 해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남은 천들을 기워 만든 작은 막사.
그 안에서 네로멜티아는 설계도 하나를 그려내고 있었다.
밖에서는 작업을 하는 이들의 활기찬 음성이 가득 전해져오고 있었다.
그들의 음성에는 즐거움이 가득했고, 꿈과 희망에 부풀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장정 둘이 끌어안아도 다 안지 못할 정도의 큰 벽돌을 옮기는 중에도, 고개도 들지 않고 쌓아 모은 돌무더기 포대를 나를 때에도.
그들이 행복해하며 웃고 있다는 것을 막사 안에서도 알 수 있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주인님?”
청아한 목소리의 미성이 천막 밖에서 네로멜티아를 향해 전해졌다.
네로멜티아는 착잡한 분위기를 애써 지우고, 잉크의 뚜껑을 닫은 뒤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가볍게 주변을 환기하고 정돈한 뒤, 평온한 목소리로 막사 밖을 향해 대답했다.
“들어와, 러스.”
“실례할게요.”
러스테리아는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내부를 살짝 살핀 뒤, 네로멜티아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그리고 네로멜티아의 등 뒤에 선 러스테리아는 그대로 몸을 낮춰 네로멜티아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네로멜티아는 다소 놀라움이 있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고 차분히 그녀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주인님 탓은 하나도 없어요. 자책하지 말아 주세요.”
“그런 생각 하고 있지 않았어.”
“… 거짓말. 아까는 슬프고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은데도 꾹꾹 참으시는 거 다 봤거든요?”
포근하게 감싸오는 러스테리아의 가슴이 등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더없이 안락하고 따뜻한 그녀의 품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씻어주고 있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의 고운 음성이 고통을 느낄 정도의 아려오는 마음을 어루만지며 자애롭게 달래주고 있었다.
힘껏 끌어안는 그녀의 가녀린 두 팔이 공허하고 싸늘해지는 마음을 따스함으로 가득 채워주고 있었다.
“화를 내지 마시라고는 안 해요. 휴미안이 나타나면 주인님보다도 제가 먼저 나서서 복수할 거예요. … 그런데, 자책은 절대 하지 마세요. 주인님은 오히려 감사를 받으셔야 해요. 목숨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 모두를 지켜주셨으니까요.”
자신의 많은 상념을 숨기려고 했으나, 러스테리아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부활에 성공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랑스러운 비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네로멜티아는 많은 감정들이 온통 뒤섞여 밀려옴을 느꼈다.
무엇 하나로 뚜렷하게 말할 수 없는 그 벅차오름은 행복이라 정의할 수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네로멜티아는 고개를 조금 돌려 자신을 포근히 감싸고 있던 러스테리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얀 드레스 셔츠의 너머로도 확연하게 느껴지는 젖가슴의 달콤한 살 내음.
더없이 안락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어 몽롱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 순간 러스테리아는 네로멜티아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는 것으로, 자신에게서 주인을 단호하게 떨어뜨렸다.
“지금은 안돼요! 정무를 보고 계신 중이시잖아요?”
“에에… 뭐 어때서!”
“안. 돼. 요. 거기다가 주인님께서 급히 보셔야 할 일도 생겼다구요?”
러스테리아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네로멜티아의 앞으로 유유히 걸어가서 섰다.
상급자에게 정보를 보고하기 위한 간략한 의식.
그녀가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내어놓은 정보의 내용은 더없이 중요한 사안이 틀림없었다.
“무너진 마왕성에서 지하로 향하는 문을 찾았어요. 문은 여전히 숨겨져 있었고, 누군가 침입한 흔적도 없이 잘 잠겨져 있었어요.”
“…!! 창고인가!? 아니면 기밀 서고!?”
네로멜티아가 황급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반응하는 걸 본 러스테리아는 자신이 제대로 한몫했음을 직감했고 더욱 신이 나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주인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성취감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고 있었다.
거기다 정보를 마저 들은 주인은 분명 기뻐할 것이었고, 그 기쁨은 곧 자신의 기쁨이기도 했다.
“연구실이었어요.”
“연구실?”
“로널드 거트만(Ronald Guttman)의 인형 연구실(Doll Laboratory).”
순간 네로멜티아는 거세게 울리는 자신의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마왕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마왕의 명에 따라 움직이기도 거부한 천재 괴짜.
연구비 지원과 연구 시설 지원이라는 당근으로 그를 곁에 두었고, 친구로서 대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었던 완고한 학자.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에 몰두했으며 누구의 부탁에도 자신의 창조물을 내어주지 않았던 고집쟁이 장인.
그러나 그의 인생 유일하게 단 한 번 자신의 창조물을 남에게 건네준 일이 있었다.
자신의 최고 걸작을 완성한 뒤, 자신의 친구이자 유일한 지원자인 네로멜티아에게 그것을 선물로 양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휴미안의 침공 이후, 그에 대한 소식은 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그의 이름은 로널드 거트만.
헤모니겐트 최고의 에고 돌(Ego Doll) 개발자였다.
“지금 바로 가실 거죠?”
“물론이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네로멜티아를 바라본 러스테리아는 천막을 나서다 말고 출입구 앞에 서서 자신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장난기 있어 보이는 귀여운 미소를 띠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러스테리아.
그녀는 활기차다 여겨질 정도로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네로멜티아를 향해 말했다.
“아쉽게 끝까지 못 한 일은 이따가 마저 해주세요. 저 잘했으니까 상은 톡톡히 주실 거죠?”
러스테리아가 말 한 아쉽게 못 한 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네로멜티아는 설렌 마음을 잠재우기 힘들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막사 밖으로 나서는 러스테리아의 모습에 짙은 홍조가 스쳐 보인 듯한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네로멜티아는 기대되는 일이 두 가지나 생긴 까닭에 발걸음이 몹시 가벼워졌다.
소중한 비서의 방문은 시름의 몸살을 앓던 주인의 마음에 암운을 걷어냈고, 날개마저 달아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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