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연회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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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두 다리로 걸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해안 절벽에 숨겨져 있는 입구.
그곳을 통해 나아가면 지하 깊숙이 숨겨져 있는 데모니안의 마을이 나온다.
현재 언더 바르커스의 주민들은 일생에 처음 보는 고블린이라는 존재들을 마주해 있었고, 어색한 분위기가 주변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천 년 전의 헤모니겐트에서는 데모니안을 비롯한 온갖 종족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으나, 현재 그 평화의 시대를 아는 이들은 이미 나이가 들어 죽은 지 오래였다.
긴 수명을 보장받은 일부의 존재들만이 그 시대의 모습을 알 뿐이었기에, 언더 바르커스라는 지하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평범한 데모니안들에게는 고블린이라는 종족 자체가 책에서나 보던 낯선 존재인 것이었다.
그것은 수명이 짧은 고블린들에게는 더 큰 문제였다.
데모니안들은 안정된 환경에서 제대로 된 교육과 지식의 전수라도 받고 살아왔으나, 고블린들은 식량도 희박한 하수도의 내부에 숨어 살아온 것이다.
수명이 짧으니 그만큼 배울 수 있는 시간도 짧은데, 뭔가 입에 넣을 것도 찾기 힘든 가혹한 환경에서 교육이라는 것은 꿈도 꾸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에 고블린들에게 천년 전의 역사는 모두 단절되어 알지 못하는 지식이 되었고, 그런 이들이 음식과 물에 혹해 네로멜티아의 지시에 이끌려 미지의 장소 언더 바르커스에 왔으니 경계심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크로포드. 시작하지.”
“네.”
크로포드는 마왕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손짓을 하여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그의 지시에 연회의 운영을 맡은 데모니안들이 일제히 음식과 마실 것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연회에 참석한 데모니안들과 고블린들 사이에 놓인 길고 큰 석재 테이블.
공동의 큰 종유석을 깎아 만든 것이 분명한 석재 테이블에 갖가지 음식과 음료가 차려졌다.
일생에 처음 보는 것들이었으나 그 향기로운 냄새를 통해 음식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고블린들은 침을 흘리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고블린들이여. 나는 마왕 네로멜티아 디 이시스. 본래 너희를 비롯한 모든 마물들의 지배자다.”
강대한 루이나가 담긴 마왕의 말이 연회장을 울리자, 고블린들은 본능적으로 경외(??)를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주변 대기가 강하게 짓누르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고, 거대한 야수의 아가리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위압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강대한 힘은 결코 무서운 느낌이 아니었고, 오히려 스스로의 마음이 동해 복종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며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안정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루이나의 아래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루이나의 근원이 되는 지배자에게 끌리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긴말은 별로 필요 없는 자리 같으니 짧게 이야기하지. 마왕의 백성으로서 예의 있게 만찬을 즐기거라. 예의를 모르겠다면 너희의 왕인 아티스에게 물어보거라. 허겁지겁 엉망으로 먹지 말라는 이야기니라.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모든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여기 모인 데모니안들이 정성껏 준비해 준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호의를 잊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거라. 이상.”
낯선 환경에 와서 경계심을 가졌던 고블린들은 데모니안들을 향해 단번에 호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귀한 음식과 마실 것을 내어 준 이들에게 경계라는 것은 분명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반면 데모니안 중에서는 마왕을 대접하기 위해 연회 음식을 준비했는데, 뜬금없이 고블린들이 나타나 귀한 음식을 축낸다 생각해서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마왕이 직접 그들의 공을 치하하고 고블린들이 눈에 띄게 호감을 표하며 감사함을 전하자 그 불만이 단숨에 사그라들고 마음이 몹시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네로멜티아의 짧은 연설에 두 무리가 별 탈 없이 어울려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주군의 귀한 말씀에 양측의 경계심이 모두 사라진 듯합니다.”
“… 나는 그냥 몇 마디 던지고 떠밀었을 뿐이지. 화기애애하게 잘 어울려 지내는 이 모습들은 모두 저들이 타고난 천성이다.”
따끈하고 부드러운 밀빵 위에 큼직한 버터 한 덩어리가 올려져, 갓 구워진 빵의 열기에 녹아들며 빵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고소한 치즈와 갖가지 과일과 함께 버무려진 샐러드는 큰 접시에 대량으로 쌓여 있어 누구나 부담 없이 양껏 즐길 수 있었다.
매콤한 향신료가 기름과 함께 듬뿍 발려 통째로 구워진 비프 바비큐는 자신이 먹을 양 만큼을 베어가기 위한 이들로 긴 줄이 세워져 있었다.
밀가루를 풀어 돼지고기와 양배추, 당근을 넣고 끓인 스튜는 벌써 세 개의 솥이 비워지고 있을 정도의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새 종족의 구분 없이 한데 어울리며 풍성하고 맛있는 만찬을 즐기는 이들.
네로멜티아는 그들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명색이 주군의 귀환 기념 연회인데, 더 위엄을 세우시지 그러셨습니까.”
크로포드는 마왕을 위한 축하 연회에서 마왕이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가 마음에 품고 있는 불만 또한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던 네로멜티아는 크로포드에게 손짓을 하며 가까이 오라 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우측에 러스테리아가 앉아 있었으니, 손짓으로 의자를 하나 가져와 자신의 좌측에 두었다.
연회장 구석에 놓여 있던 빈 의자들 중 하나가 공중에 떠올라 네로멜티아의 좌측에 놓였다.
네로멜티아의 등 뒤에 서 있던 크로포드는 감히 주군과 같은 자리에 앉기가 황송한 까닭에 마다하려 했으나, 그녀가 의자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두드리자 거절하지 못한 채 명을 받들어 자리에 앉았다.
“위엄을 세워야 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 조금 더 위세(??)를 드높일 연설을 하실 필요가 있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정숙하고 통제된 분위기의 연회를 만들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지배자에 대해 잊지 않게 하는 것도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가 천년이나 자리를 비워 두었기에, 그들에게 티를 내어서라도 충성을 끌어내야 한다는 말인가?”
“…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이 현재 아무런 충돌 없이 화합하고 있는 모습은 좋으나, 이 자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잊고 있다는 것은 크나큰 결례라 생각합니다.”
몹시 단호하고 강경한 태도로 조언하는 크로포드에게 동의하지는 않으나 그의 의견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각자의 가치관과 성격에 의해 발생하는 의견들은 아예 틀린 말이 아니라면 다른 의견으로서 존중해주어야 했다.
네로멜티아는 문득 고개를 돌려 러스테리아를 바라보았다.
러스테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네로멜티아를 바라보며 웃을 뿐이었다.
그녀가 보내오는 조용한 미소의 의미는 마음 깊이 전해지고 있었기에 조금의 오해도 없이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주인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한 치의 의심 없이 모든 명령을 따르겠다는 의미.
네로멜티아는 차분히 크로포드에게 자신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모든 일에는 그에 맞는 의식이 있음을 나도 알고 있다. 제대로 된 연설이라는 것은 지배자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지. 사기를 고양 시킬 수 있고 충성이라는 것으로 모두를 묶어 단합시키는 것으로 더욱 큰 발전을 꾀할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그러나 모든 일에 그에 맞는 의식이 있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자리마다 어울리는 의식이 있다는 이야기이고, 무조건 위엄을 세우며 웅장하게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말이다. 제대로 된 터전도 없는 이들에게 마왕이랍시고 자신의 위세를 세울 생각은 없다. 네가 생각하는 일은 마왕성을 제대로 수복하고 모두가 자유롭게 햇살을 즐길 수 있게 되었을 때 하도록 하지.”
네로멜티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사과주를 맛보았다.
비교적 키우기 쉬우면서도 많은 수확량을 낼 수 있는 사과가 과일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언더 바르커스.
주민들이 소비하고 남는 것으로 술을 담글 수 있었기에, 이곳에서 빚는 술의 재료는 사과가 대부분이었다.
사과로 술을 빚기를 천년이나 해왔기에 그간 쌓인 기술과 경험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고, 사과로 빚은 술이 이토록 깊고 향기로운 풍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굳이 따지자면. 나는 저들이라고 생각한다. 열 번 만에야 부활에 성공한 마왕보다 천 년을 버티며 끝까지 살아남아 준 저들이야말로 축하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주군…!”
“그리고 너도 예외는 아니다.”
네로멜티아는 조용히 술병을 들어 그의 앞에 향기로운 사과주를 따라주었다.
독한 도수의 술이 증발하며 달콤한 향기가 가득 퍼지고, 코를 기분 좋게 간질었다.
잔에 사과주를 가득 따른 네로멜티아는 잔을 들고 크로포드에게 내밀며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백성들을 지켜주어서 고맙다. 수고 많았다, 크로포드 반 에이하르트.”
긴 백발에 이마와 뺨에 새겨진 흉터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흑기사.
불과 서른이 넘었을까 싶은 외모와 다르게 오천 년이나 살아온 가장 나이가 많은 데모니안.
크로포드는 주군의 치사(??)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천년 간 어느 한순간도 편하게 잠을 이룬 적이 없었던 깊은 무게의 날들.
큰 의무와 기약 없는 목표만이 존재했던 과거.
그가 겪어왔던 고된 시름이 주군의 자애로운 인정에 눈 녹듯 녹아들고 있었다.
네로멜티아는 자신의 품에 크로포드를 끌어안았다.
주군에게는 손가락조차 스치지 않았던 강건한 기사는 모든 것을 내려두고 주군의 따스한 품에 안겨 어린아이같이 눈물을 흘렸다.
러스테리아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안다는 눈치를 하고서 사과주를 홀짝일 뿐이었다.
크로포드는 그날 마왕의 품에서 천년이나 쌓인 애수(??)를 모두 풀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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