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고블린의 왕 (4)
* * *
이성과 감성의 격렬한 충돌.
정신의 깊은 밑바닥에 잠들어있던 욕망이 발버둥 치며, 역사에서 비롯된 문명이라는 것이 부여한 윤리를 녹슬게 하고 있었다.
당장 고개를 돌리고 이런 것은 옳지 않다고 이야기해야 한다며 정신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이성이라는 녀석이 호된 꾸짖음을 하고 있었으나, 네로멜티아의 시선만큼은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네로멜티아 본인도 성에 몹시 자유분방한 편이었으니, 윤리관이라는 것이 지시하는 부정의 명령에 따르기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한 바였다.
정신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은 본능이라는 것은 모든 인격의 뿌리이자 근본이 되는 존재인 만큼 거부하기 힘든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왜 성이라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하며 숨겨야 하는 것인가.
무척이나 기분 좋고 행복하며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흔한 일인데.
온갖 탐스러운 미녀들의 아름다운 나신.
성에 물들어 쾌락에 몸부림치는 여성들의 농염한 자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여인들의 음사(??)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
심지어 아티스의 그림 실력은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빼실 필요 없으십니다! 성교라는 것은 모든 생명들에게 주어진 자연의 섭리! 미녀의 섹스어필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예술! 여성의 매력이란 자아를 가진 모든 생명들이 느끼는 아름다움의 근본!”
“그… 그렇지… 그럴 수도…”
이미 반쯤 아티스의 말에 넘어간 네로멜티아는 슬슬 제멋대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 포근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다면 얼마나 기분 좋을까.
저 매끄러운 피부를 매만지면 얼마나 짜릿할까.
아무리 보고 있어도 결코 질리지 않으며 매 순간이 새로운 마성의 그림.
가히 악마의 농간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마력이 있었다.
“아니에요!!! 마왕님께서는 아무 여자나 보며 침을 흘리는 분이 아니세요!!! 여자를 좋아하시긴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있단 말이에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러스테리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소리쳤다.
주인에 대한 강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나온 격정적 변호.
그러나 러스테리아의 외침에 놀란 네로멜티아가 급히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입가에 침이 흘렀는지를 확인하는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다.
“으응… 그래. 나는 여성의 신체가 아름답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여성의 나체를 표현하는 것도 예술의 당당한 한 갈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예 성교를 노골적으로 묘사해서 눈요깃거리 삼는 일은 좀 부정적으로 보고 싶구나.”
애써 분위기를 환기하고 정신을 바로잡은 네로멜티아는 러스테리아의 말에 동의하며 그녀 나름의 중재안마저 내어놓았다.
이 정도면 양측의 신념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적절한 답이라 생각한 네로멜티아.
그러나 아티스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더욱 격하게 의견을 피력했고, 그 위용은 군대의 앞에서 연설하는 장군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원초적 본능과 생명에 각인된 욕망을 자극하는 예술! 타오르는 리비도(Libido)! 거부할 수 없는 패션(Passion)! 이것이야말로 민중이 위임한 권력의 근원! 한낱 눈요깃거리가 아닙니다! 이 작품들을 얻기 위해 일개의 힘 없고 나약한 고블린 하나를 왕의 자리에까지 추대한 모두의 선택은 숭고한 사회적 순리였습니다!”
“미사여구 있는 대로 다 갖다 붙이면서 어려운 말 쓰지 마세요!! 그냥 다들 야한 그림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좋은 거 주는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왕좌에 앉히고 떠받들어 주는 거잖아요!!!”
“레이디께서도 이 작품들이 ‘좋은 것’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시는 모양이군요? 솔직한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습니다. 오호호호호호!!”
“이이잇!!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자꾸 이상한 논리 들이밀지 말아 주세요!!”
어느새 격한 논쟁까지 번져버린 아티스와 러스테리아의 대립.
그 강렬한 가치관 충돌의 현장 사이에서 네로멜티아는 어떻게 끼어들지도 못해 둘의 논쟁을 구경만 하게 되었다.
잘 굴러가는 말솜씨로 화려하고 능숙하게 논리를 펼치는 아티스와 감정에 휘둘려 소리 지를지언정 정론을 무섭게 질러대는 러스테리아.
한동안 어떻게 이들을 중재할지 고민했던 네로멜티아는 언젠가는 알아서 끝나겠지 싶어 아티스의 그림이나 마저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생동감.
음란한 묘사와 설정들은 다음으로 치더라도 실제와 같은 수준으로 그림을 그려내는 아티스의 기술은 가히 신의 손이라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네로멜티아는 의문이 하나 들어 무심코 아티스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생동감이라는 대목이 문제였다.
“아티스. 바쁜 중에 미안한데 혹시 이 그림은 어떻게 그렸지? 모델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말이야.”
한창 논쟁에 열을 올리던 아티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로운 모습으로 뒤를 돌아 네로멜티아의 앞에 성큼 다가섰다.
척 봐도 자신의 그림을 좋아해 주는 분위기가 강한 마왕에게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작품을 어필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연히 모델은 없었습니다! 제가 수집한 책들 안에는 잘 그려진 삽화 또한 많았기에, 그것들을 참고해서 그림 연구를 했지요. 미술에 관한 책들도 여럿 있었으니 그림을 익히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미술에 관한 책들과 다른 책들의 삽화를 보고서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건가?”
글자도 모르던 고블린이 책들을 주워 독학하며 온갖 분야의 지식을 쌓아 올렸다는 대목에서 그의 천재성이 느껴지긴 했으나, 이 정도 되면 그의 재능이 무서워 보일 지경이었다.
신체의 힘이 모자랄지언정 그의 지적능력과 미술에 대한 재능은 괴물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에 다시 한번 도취된 아티스는 자신의 사심을 덧붙였다.
“그러나 벽은 있었습니다! 여체의 실제 질감이나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연구를 진행하며 이 경지에까지 도달했으나, 아무래도 실제 모델을 통해 창조되는 그림보다는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미녀를 이 눈으로 직접 마주하며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꿈도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저의 눈앞에 이토록 아름다운 여성분들이 나타나셨으니까요!!”
순간 네로멜티아와 러스테리아는 숨이 멎는 듯했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신체가 굳어버렸고, 사고는 정지되었으며 주변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잠시의 침묵.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네로멜티아는 아티스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우리… 그림을… 그리겠다고……?”
“그렇습니다!! 제가 본 모든 미녀의 모습을 다 가져다 놓아도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신 두 분을 그리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사명!!!”
“… 벗은 몸을…?”
“네!! 더 나아가 사랑이 넘치는 격렬한 성교의 모습까지도…!!!”
“기각.”
네로멜티아는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아티스의 말을 끊고 불허의 뜻을 명확히 밝혔다.
마왕의 냉랭함이 와닿은 아티스는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마왕의 본의를 이해할 수는 없었기에 온갖 의문을 표정에 가득 떠올릴 뿐이었다.
자신의 그림을 그토록 좋아해서 눈을 떼지 못하던 마왕님이 어째서 불허의 뜻을 전하는 것인가 의문을 가질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네로멜티아는 다시 한번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로 쐐기를 박아버렸다.
“넌 앞으로 절대 그림 그리지 마라.”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네로멜티아는 기가 잔뜩 죽어 거의 늘어진 모습의 아티스에게서 원하던 정보를 들을 수 있었고, 그 정보들을 조합하여 신빙성이 높은 결과를 도출해 내었다.
그것은 바로 마왕성 일대가 안전이 보장된 상황이라는 정황 증거.
아티스는 자신이 한 살을 먹은 어렸을 때부터 오십이라는 나이를 먹은 현재까지 마왕성의 폐허 일대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책을 수집했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그것은 그가 오십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휴미안에게서 비롯된 위험에 노출된 적이 없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네로멜티아의 덧붙여진 질문에서 아티스는 함정은커녕 마법이라는 것에 얽힌 어떠한 현상이나 자취도 찾을 수 없었고, 더 나아가 휴미안의 모습은커녕 그들의 발자취나 흔적 또한 찾을 수 없었다는 말도 했다.
이 대화에서 유추할 수 있는 답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중 독보적으로 높은 확률을 보유한 답은 단 하나뿐이었다.
현재 마왕성은 하나의 위협도 없이 안전하다는 것.
“이정도면 그냥 비행 마법으로 곧장 성의 중심까지 진입했어도 되었겠어.”
“안전을 생각한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 절대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어요, 주인님. 무엇보다 큰 수확이 있었잖아요?”
예기치 못한 위험을 경계해 지하 깊은 곳의 하수도까지 진입했던 노력이 허사가 된 느낌이라 맥이 빠져버린 네로멜티아에게 위로를 건네고 그녀의 선택을 긍정하는 러스테리아.
그녀는 천막 입구의 가림막을 살짝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네로멜티아가 건네준 빵과 과자를 배불리 먹고 일생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깨끗한 물을 실컷 마신 고블린들이 행복에 빠져 뒹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은 네로멜티아 역시 볼 수 있었고, 이어서 자신을 향해 러스테리아가 보내는 아름다운 미소의 의미 역시 알 수 있었다.
“수확은 확실히 있었지. 이건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거야.”
러스테리아가 보내는 미소에 미소로 화답한 네로멜티아.
서로에게서 느껴지는 애정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던 마왕과 비서.
비서는 문득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의자에 앉아 있던 마왕의 허벅지 위에 사뿐히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과 달콤한 시선을 교환하던 서큐버스는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주인의 입술에 가져갔다.
부드러운 두 입술이 포개지며 슬며시 혀가 맞닿았다.
따스한 키스의 감미에 취해 몽롱해져 가는 서큐버스의 눈빛.
그러나 마왕에게서 자신의 과업(??)을 부정당한 아티스는 절망감에 사고가 마비되어 그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자신 마음속의 비탄에 빠져 눈은 뜨고 있었으되 그 시각적 기능이 상실된 지 오래였다.
자신이 평생토록 꿈에 그리며 기다려 온 천상의 미모를 가진 두 여성의 입맞춤이었음에도 그는 그 광경을 알아챌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