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고블린의 왕 (3)
* * *
아티스는 한동안 자신이 폐허를 찾아 헤매며 발견한 보물들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의 일생을 걸었던 모험은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백지상태의 유년기부터 시작되어 현재의 다 저물어가는 노년기까지 이어져 있었고, 종막이 보이는 황혼의 무렵에서도 그 열정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어둠 속에서 찬란히 빛나며 보석 같은 존재감을 과시하는 별들처럼, 책이라는 일생의 보물이 지닌 존재감은 밤하늘을 가득 수놓은 은하수와 같았다.
고블린의 짧은 일생 동안 무수히 많은 책들을 읽었고, 그 책들은 어느 것 하나 빛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네로멜티아와 러스테리아는 50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지닌 늙은 아티스의 일생에 대해 경의를 가졌고, 그의 발자취를 존중하게 되었다.
인생을 이야기하는 아티스의 모습은 시시각각 변화를 반복했고, 그 다채로운 색의 이야기들은 듣는 이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마저 갖게 하였다.
때로는 두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기억의 멜로디에 춤을 추는 듯하였고, 때로는 주먹을 세게 쥐고 흔들어 대중을 향해 연설하는 듯하였다.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고 이야기할 때는 시를 낭송하는 듯하였고, 낄낄대는 웃음을 섞으며 이야기 할 때면 익살스러운 재간꾼을 보는 듯하였다.
멸망한 폐허 속에 잠든 책이라는 과거의 유물들은 그에게 있어 신념이었고 종교였으며 사랑이었다.
“여러모로 지식을 탐구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저물어가는 저의 수명이 안타까울 뿐, 책을 찾아 연구하는 일은 결코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지식은 저의 생명을 이어주는 양식이었고, 버거운 삶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힘이었으며, 그저 살아남는다는 것이 일생의 유일한 목표인 세상에 특별하게 주어진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빗대어 표현하자면 하나의 아름다운 시구(??)와 같았다.
마음을 울리는 감동을 받은 러스테리아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마음을 움직이는 감명을 받은 네로멜티아는 그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지식을 인정받아 고블린의 왕이 되었구나. 너의 노력을 모두가 인정한 것이지.”
한 편의 감동적인 연극과 같이 흘러가던 분위기가 깨졌다.
아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네로멜티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손사래를 치며 그녀의 말을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문명이 멸망하고 생존과 힘이 우선시 되는 야만의 시대가 도래하면 지식 따위는 길가의 돌멩이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곤 하지요. 저들은 저의 지식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티스의 말이 진실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감동적인 분위기가 잘 나가다가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듯 산통이 다 깨져버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자신이 무언가 놓친 것이 있는지, 혹은 더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인지 생각을 달리했던 네로멜티아는 그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어떤 이유로 고블린의 왕이 될 수 있었지? 힘이 유별나게 센 것 같지도 않고… 이야기를 듣자 하니 고블린 킹은 세습제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혹시 특별한 무기 같은 것이 있었나?”
“후후후후후… 역시 궁금하시겠지요. 그렇고 말구요. 그렇다면 가감 없는 진실을 말씀드리는 것이 도리!”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던 아티스는 천막의 한쪽 벽면을 향해 유유히 걸어갔다.
그리고 천막의 끝자락을 손에 쥐었는데, 그로 인해 아티스가 쥔 천의 너머로 또 다른 천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아티스의 천막은 밖에서 보이는 천과 내부에서 보이는 천이 다른, 이중의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내부의 천은 천막의 일부라기보다는 하나의 휘장이라고 보아야 맞는 모양이었다.
“저에게 고블린의 왕이라는 자그마한 권력을 안겨주었던 힘의 원천! 그것은 예술입니다!”
그리고 힘껏 휘장을 잡아당긴 아티스.
그의 손에 의해 천막의 한 벽면 전체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치워지며 그 너머에 감춰진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꺄아아아아악!!!”
“이, 이건…!!!”
“우후후후… 후후후후후…! 오호호호호호호!!! 어떻습니까! 제 일생의 역작들이!!!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멜로디! 존재의 하모니! 영혼의 오케스트라!!!”
얼굴을 붉히며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도 모자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린 채 비명을 지르는 러스테리아.
두 눈을 크게 뜨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눈을 떼지 못하는 네로멜티아.
그리고 마치 다른 인격이 된 것처럼 잔뜩 흥분하며 감흥에 도취된 채 자신의 창작물을 격렬히 칭송하는 아티스.
휘장 너머에는 온갖 크고 작은 그림들이 빈틈을 찾기 힘들 정도로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천막의 한 면 전체를 뒤덮는 방대한 양의 그림들.
그 그림들은 모두 헐벗은 미녀들을 그린 누드화였다.
각양각색의 미녀들이 저마다의 매혹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림들.
그 그림은 목탄화, 수채화, 유화, 판화 등 종류가 다양했고 표현기법조차 천차만별로 다양했으나 모델만큼은 오로지 미녀 일색이었다.
녹색의 반짝이는 머리가 인상적인 청초한 엘프가 달빛이 반짝이는 호수에서 목욕을 즐기고 있는 그림.
전쟁 한복판에서 검을 휘두르며 소리를 치고 있는 붉은 머리 데모니안 여성의 갑옷이 뜯어져 젖가슴이 훤히 드러난 그림.
작은 페어리 한 쌍이 별빛과 같이 반짝이는 요정 가루에 둘러싸인 채 붉은 장미 위에 마주 앉아 키스를 나누는 그림.
순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데모니안 여성이 단추를 풀어헤쳐 하얀 속살을 드러낸 채, 자신의 젖가슴을 주무르고 있는 그림.
탄탄한 신체를 가진 건강미 넘치는 여우 아니마(Anima) 여성이 넘어지며 하의가 나뭇가지에 걸려 벗겨지고, 그 크고 탄력이 넘치는 엉덩이가 행인들의 앞에 드러나 수치심에 눈물을 흘리는 그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은발의 뱀파이어 여성이 선홍빛 벨벳 시트 위에 누워 손으로 자신의 젖꼭지와 음부만을 겨우 가린 채 매혹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그림.
드라이어드(Dryad)의 덩굴에 전신을 포박당한 휴미안 여기사가 자신의 음부에 깊숙이 찔러진 굵은 덩굴에 희롱당하며 눈물을 흘리고, 드라이어드가 그녀의 눈물을 핥으며 미소짓는 그림.
오우거의 음경에서 뿜어진 대량의 정액에 전신이 흠뻑 젖은 머메이드(Mermaid)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핥으며 황홀한 표정으로 정액을 맛보는 그림.
찬란한 광휘에 휩싸인 금발의 천사가 나체로 침대에 걸터앉아 상스럽게 가랑이를 벌린 채, 손가락으로 자신의 음부를 활짝 벌려 애액으로 질척이는 질의 내부를 보여주며 자신의 입술을 핥는 그림.
좌측부터 순서대로 보던 그 그림들은 우측으로 향할수록 성적 묘사가 과격해져 갔고, 우측 끝에 가까워질수록 노골적이고 음탕한 그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이건…! 좋은데…! 아, 아니! 좋긴 한데…!! 이, 이런 그림을 그려도 되나!!!?”
“하으으으으으…”
무심코 본색이 나온 네로멜티아는 순간 곁눈질로 러스테리아의 눈치를 보고 급히 의견을 수정했다.
러스테리아는 손바닥만 한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애처로운 반응을 보이며 극도로 부끄러워하는 비서를 옆에 두고, 음탕함의 결정체인 아티스의 그림들을 향해 긍정하는 반응을 보이긴 힘든 것이었다.
예쁘고 귀엽고 소중한 비서에게 괜히 미움이라도 받았다가는 몹시 곤란했다.
“오호호호. 이거 이거 마왕님, 역시 취향이 남다르십니다. 우후후후.”
“무, 무슨 말이야.”
“옆에 계신 레이디의 눈치를 보시느라 말씀은 그렇게 하십니다만… 마왕님의 시선은 거짓말을 못 하는군요. 가장 우측에 걸린 그림들에서 떨어질 줄 모르니 말입니다. 오호호호호.”
러스테리아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네로멜티아의 귓가에 속삭이는 아티스.
무슨 상황인지 다 알겠다는 듯 네로멜티아를 배려해서 대화하는 아티스의 속삭임과 그에 맞춰 러스테리아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답을 하는 네로멜티아.
네로멜티아는 아티스의 말을 부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을 행동에 옮기진 못했다.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으며, 그는 마왕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 확신에 찬 웃음을 짓고 있던 것이었다.
가늘게 휘어진 고블린의 눈가에 가득한 주름은 번들거리는 욕망을 내재하고 있는 듯했다.
길게 찢어진 입가는 그가 가진 성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듯했다.
단지 거세게 떨리면서도 가장 우측에 걸린 그림들을 결코 놓치지 못하는 네로멜티아의 본능적인 시선도 그와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자신의 눈을 가려버린 러스테리아만 모르는 상황.
마왕과 고블린 킹의 공감대가 은근히 싹트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