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번 부활 끝에 마왕님은 환경 보호를 위해 노력한다!-22화 (22/216)

〈 22화 〉 고블린의 왕 (2)

* * *

하수도 내부의 광활한 공간, 고블린의 소굴.

그 가장 안쪽에 허름한 천막이 하나 있었다.

고블린 킹의 자리에 올라 고블린들을 통솔하는 우두머리의 거처.

하수도에 숨어 사는 고블린들의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번듯했던 아티스의 보금자리였다.

커다란 석재벽돌 두 개를 쌓아 만든 의자와 그보다도 많은 벽돌을 쌓아 만든 탁자.

그곳에 둘러앉은 네로멜티아와 러스테리아는 아티스가 내온 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리로 제작된 낡고 찌그러진 잔에는 나름대로 맑은 물이 담겨 있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긴 했으나, 마시고 죽을 것 같지는 않은 수준.

“아무래도 밖에 흐르는 썩은 물을 마시고 살아남을 수는 없으니 벽면에 맺히는 물방울을 모아 식수로 이용한답니다. 하수도 내부에서 먹을 것을 구하라! 그것이 저희 고블린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들어 준 신조지요.”

아티스의 말을 듣던 네로멜티아는 잠시 잔에 담긴 물을 내려다보다가 자신의 디멘셔널 스토리지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급스러운 티웨어(Tea Ware)를 꺼냈다.

순백색의 고풍스러운 티포트와 티컵, 그리고 달콤한 각설탕이 수북이 든 슈거 볼.

네로멜티아가 손가락을 허공에 휘저은 것으로 티컵들은 그 자리의 인원들 앞에 차례대로 날아가 세팅되었으며, 티포트는 허공에 둥실둥실 뜬 채로 각자의 티컵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홍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꺼낸 케이크 스탠드에는 산뜻한 산딸기 잼이 얹어진 스콘이나 블루베리 잼이 가득한 생크림 케이크, 하얀 설탕이 입혀진 비스킷 등의 과자가 쌓여 있었다.

“호의를 거절해서 미안하지만 티타임은 이것으로 즐기도록 하지.”

“무, 무슨 말씀을! 황송할 따름입니다! 책에서나 보던 먼 과거의 음식들을 맛볼 수 있을 줄이야! 저같이 행복한 고블린이 또 있겠습니까!!”

맛보기는커녕 평생 구경도 할 수 없었던 천 년 전 과거의 찬란한 유산이 눈앞에 드리워지자, 눈이 휘둥그레진 아티스는 자신이 내온 물을 냉큼 치워버리며 말했다.

다소 격앙되었다 싶을 정도로 그의 눈은 환희의 감정을 띠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장 상석에 앉은 네로멜티아가 먼저 잔을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이는 그가 겉치레로만 예의를 배운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네로멜티아는 이어서 각자의 접시와 포크, 그리고 나이프를 꺼내어 주었고 가장 먼저 아티스의 접시에 스콘과 케이크를 잘라 올려주었다.

“마음껏 먹어도 좋다. 사석에서의 예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니.”

네로멜티아의 허락이 떨어졌지만 아티스는 각자의 접시에 음식이 모두 덜어질 때까지 꾹 참고 식욕을 억눌렀고, 머지않아 네로멜티아가 비스킷을 한 조각 집어 먹는 것으로 그가 애타게 기다리던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케이크를 맛본 아티스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을 하고서 밀려오는 감격에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맛본 것이라고는 불에 구운 쥐 고기나 이끼뿐이었는데! 이런 맛이 존재하다니!! 이때까지 살아온 보람을 느낍니다!!!”

그는 케이크 스탠드에 진열된 모든 음식을 종류별로 맛보기 시작했고, 호쾌하게 웃다가 구슬프게 울기도 하고 때로는 하수도에서만 살아온 과거를 한탄하며 분개하기도 했다.

그러다 홍차를 입에 대었을 때는 모든 시름과 피로가 풀어진 듯한 모습을 하고서 느슨해지는 모습도 보였고, 그의 일생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각설탕이라는 것을 홍차에 넣어 다시 맛보자 그 달콤하면서도 향기로운 감미에 놀라 입을 다물기도 했다.

이 정도의 격렬하고도 행복에 겨운 반응을 보여주니 다과를 내어준 주인도 몹시 흐뭇해질 지경이었다.

네로멜티아는 그에게 속히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으나, 모든 감정을 쏟아내며 열정적으로 티타임을 즐기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조용히 차를 마실 뿐이었다.

“밖에 아무나 들어와 보거라.”

네로멜티아는 아티스를 기다리는 동안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다른 고블린을 호출했다.

아티스의 천막 앞에서 경계를 서던 고블린 둘이 머뭇거리며 천막 안으로 들어섰고, 그들의 앞에서 네로멜티아는 자신의 디멘셔널 스토리지를 다시 한번 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빵과 과자들을 한 아름 꺼내어 주고 빈 나무통을 꺼내어 마법으로 물을 채워준 뒤,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대로 된 식사는 나중에 저녁 시간이 되면 내어줄 테니, 그동안 모두와 함께 간식이라도 즐기고 있거라.”

“와아아아아아!! 먹을 것!! 처음 보는 것!!”

“좋은 사람!! 좋은 사람!!”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평생 하수도에서만 살아온 고블린들은 결코 빵이나 과자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 냄새와 형태로 보건대 필시 맛있는 먹을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고 격렬한 환희에 휩싸여 음식을 받아든 뒤 잔뜩 흥분한 채로 뛰어나갔다.

그 모습에 네로멜티아는 고블린들이 귀여워 보이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녹색의 피부에 노란 눈, 매부리코, 치열이 엉망인 작고 날카로운 이빨.

모든 것이 그다지 좋은 외모는 아니었음에도 그들의 순수한 반응과 누구나 쉽게 믿는 순진함이 마음에 와닿는 것이었다.

그에 이어 이들이 마왕을 잃은 헤모니겐트가 멸망의 길에 선 이래로 천년의 긴 세월을 버티며 굶주림과 싸워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착잡하기도 했다.

네로멜티아가 짧은 상념에 빠진 동안 아티스는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을 모두 깨끗하게 비웠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남은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네로멜티아는 문득 러스테리아를 바라봤는데, 러스테리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차만 마셨을 뿐이었는지 자신의 접시 또한 아티스의 앞에 가져다 준 지 오래였고 그 접시는 당연하게도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그러나 러스테리아는 오히려 행복해하는 아티스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네로멜티아는 그녀의 악마답지 않은 순수하고 착한 심성이 좋았다.

“아무래도 잘 먹은 것 같아 기분이 좋군.”

“정말입니다! 예의라는 것도 잊고서 정말 어린 아이라도 된 것처럼 마음껏 즐겨버렸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다지 예의를 차리는 성격이 아니니. 그보다도 대화를 조금 하고 싶은데 괜찮은가?”

“예!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최선을 다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네로멜티아는 손짓 한 번으로 탁자 위의 티웨어를 모두 정리한 뒤 아티스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러스테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건한 모습으로 그녀의 뒤에 섰다.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어떤 경외감을 느낀 아티스는 저절로 의자에서 일어섰고, 네로멜티아의 앞에 서게 되었다.

경황이 없어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아티스는 무언가 명확하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자애로운 모습과 드높은 위엄이 공존하는 데모니안 여성.

예상되는 바가 들어맞는다는 것은 꿈과 같은 일이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그의 모든 감각들이 하나의 정답을 소리치고 있었다.

어느새 잔뜩 긴장한 아티스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한 네로멜티아는 비로소 대화의 첫마디를 떼었다.

“짐은 네로멜티아 디 이시스. 헤모니겐트의 마왕이자 루이나의 권속들을 지배하는 자다.”

순간 아티스는 입이 크게 벌어졌고, 온몸이 경직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예상이 정말로 들어맞은 것이다.

천년 전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마왕.

루이나의 아래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지배자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티스의 노란 눈에서 눈물이 흠뻑 흘러내렸다.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고블린들이 수십 수백 차례나 대를 이어가며 기다려온 왕의 귀환.

그의 일생 동안 이토록 격앙되고 벅차오르는 일은 없었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왕께서 돌아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나이다! 마의 왕이시여! 헤모니겐트의 절대자이시여! 루이나의 주인이시여!”

과거 힘겹고 고달팠던 일생의 앞에 드디어 도래한 희망의 빛을 보았기 때문일까.

기약 없는 긴 기다림 끝에 비로소 미래를 보았기 때문일까.

아티스는 오열이라 할 정도로 꺽꺽대며 흐느꼈고, 네로멜티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그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 상황이니 밖에서 음식과 깨끗한 물을 나누며 행복해하는 이들의 음성이 더욱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천막 안에서의 흐느낌과 천막 밖에서의 행복한 웃음들.

머지않아 울음을 그친 아티스는 네로멜티아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감정을 추슬렀다.

“본의 아니게 추태만 보이는군요. 면목 없습니다, 왕이시여.”

“내가 고통받는 너희들을 긴 세월 지켜주지 못했건만, 그래도 왕이라 인정하는구나.”

“제가 감히 마왕님께 반대하는 감정을 어찌 품겠나이까! 제가 열 번을 태어나고 죽어도 채우지 못할 긴 과거의 이야기이나 책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당시의 상황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단 한 명의 백성이라도 더 지켜주시려다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지요! 이런 성군이 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저는 마왕님께 티끌만큼의 부정도 품을 수 없나이다!”

마치 피를 토하듯 자신의 진실된 감정을 전하려 온 힘을 다하는 아티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선명한 진심이 담겨 있었고, 네로멜티아는 그런 그에게 고마운 감정이 앞섰다.

그러다 문득 그의 말 속에 하나 걸리는 것이 있어 다른 질문을 던졌다.

“책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저는 철저히 무너지고 짓밟혀진 마왕성의 폐허를 곧잘 떠돌곤 했었나이다. 처음에는 쓸만한 물건이나 자재를 찾기 위해 일족의 금기를 몰래 어겨가며 수색에 나선 것이나, 머지않아 그 폐허에서 찾아낸 책이라는 것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왕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누군가 급하게 기록한 책을 발견하여 알게 된 것이지요.”

아티스의 높은 지능에 관한 실마리가 조금 풀리는 순간이었다.

수명이 채 백 년도 되지 않는 고블린이 어떻게 천년이 지난 일을 알고 있는지에 관한 의문도 풀리는 순간이었다.

네로멜티아는 우선 아티스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글을 가르쳐 주었나?”

“글은 독학을 했습니다! 다행히 어린 아이들을 위한 글자 교본을 발견할 수 있어서 그것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그림과 글자가 함께 있으니 그림을 통해 무슨 단어인지 유추할 수 있고, 그럼 그 글자가 어떻게 읽히는지도 유추할 수 있지요.”

누군가의 가르침 없이 단지 책이라는 것만으로 글자를 익힌 아티스.

좋은 책을 습득할 수 있었다는 이유보다는 그 자체가 유별나게 똑똑한 고블린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책이라는 것을 발견해 그 안에 적힌 지식을 스스로의 의지로 탐구한 것으로 보아, 지식에 대한 욕구도 남다른 성격이었기에 더더욱 지금의 높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책이라는 것은 읽을 수 있게 되니 참으로 놀랍고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와 미래가 담겨 있었지요! 건축! 재봉! 요리! 연마! 역사! 문학! 미술! 검술! 전략! 경제! 정치! 제가 모르던 세계의 일면들이 가득했고, 저는 더더욱 책이라는 것을 찾아 헤매게 되었습니다.”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는 아티스는 어느새 꿈에 젖은 한 명의 학자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이지(理?)가 가득했고, 그의 목소리에는 의지가 가득했다.

네로멜티아는 그가 책을 찾아 마왕성의 폐허를 돌아다녔다는 대목에 관심이 생겼지만, 우선 이 특별한 고블린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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