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언더 바르커스 (3)
* * *
“단장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러스테리아 서비 아브노아 비서관님, 오랜만입니다. 무사하신 듯하니 다행입니다.”
“가볍게 이름으로 불러주셔도 된다고 항상 말씀드렸었는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여전하시네요!”
러스테리아와의 가벼운 인사를 나눈 크로포드는 다시 네로멜티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네로멜티아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낮추고 있는 크로포드를 손수 붙들고 일으켰다.
여성으로서는 상당히 장신에 속하는 네로멜티아였지만 크로포드가 일어섬에 따라 그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네로멜티아는 그러한 모습 또한 몹시 만족스러웠다.
정말이지 보기만 해도 든든하고 의지가 되는 기사였다.
“그간 고생 많았다. 내 백성들을 지켜주어 고맙다.”
“기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저는 주군을 지키지 못한 패장입니다. 칭찬의 말씀보다는 벌을 내려주십시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하의 과도한 자책과 겸손은 오히려 부담스럽다.”
크로포드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주군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주군은 선하고 자비로우며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천년 만에 복귀한 주군이 자신을 강하게 책망하거나 꾸짖고, 심지어는 목을 베더라도 자신은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내부 중요인물의 배신이 있었다고는 하나 경계와 방비에 실패한 기사는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학살당하고 노예로 끌려갔으며 나라가 불타버린 일은 입도 벙긋하지 못할 일이었다.
자신이 살아있건만 주군이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사실은 가만히 목을 내밀고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할 일이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그런 일들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주군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담담하게 그의 공을 치하했다.
어떠한 질타의 목소리 또한 내지 않았다.
오히려 주군이 부활한 이후에 자신이 가장 먼저 찾아가 받들었어야 했건만, 도리어 주군이 직접 자신을 찾아와 주었다.
천년의 세월이 지나서도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와 주었다.
나라의 멸망을 지켜볼 뿐이었던 패장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들여 주었다.
그리고 이런 주군을 모실 수 있어 자신은 행복한 기사라고 생각했다.
“자애로운 마왕이시여. 하염없이 부족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 목숨을 다한 충성으로 보답하겠나이다.”
“너는 이미 그리하고 있었지 않나. 후후.”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충의를 약속한 크로포드는 정중히 손짓하며 주군을 맞이했다.
부디 방문해 달라고 이야기하는 예스러운 몸짓에 네로멜티아와 러스테리아는 자연히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언더 바르커스(Under Barkus)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의 앞에는 큰 석재의 방벽(??)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종유석을 부숴 그 파편들을 쌓아 만든 모양이었는데, 이 공동의 종유석들은 모두 비상식적으로 거대했으니 방벽을 만들 수 있다는 현실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심지어 그 방벽 위에는 경계를 위한 초소 또한 존재했고, 경비병들은 조악하게 만든 돌창 따위를 들고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물론 그 돌창 또한 종유석의 파편을 깎아 만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두 분만 도착하신 거군요. 당연히 전초(??) 근무자들과 함께 오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은 마왕님의 루이나에 겁에 질려서 주저앉아 버리셨죠. 그렇죠, 마왕님?”
“어… 그, 그랬지.”
“저 또한 그 루이나를 감지해 주군께서 귀환하셨음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 언더 바르커스 내부에서 루이나를 감지할 수 있는 이들은 모두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 공동에 진입하기까지의 일을 설명하던 러스테리아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주의 깊게 잘 들으며 대화하던 크로포드는 몹시 예스럽고 정중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순간 눈빛이 험악하게 돌변한 때가 있었다.
“그나저나 자신들의 주군조차 알아보지 못했을뿐더러 침입자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공격도 못 한 채 쓰러지기까지 하다니… 제 교육이 너무 물렀던 것 같습니다…….”
“살살하거라 크로포드… 응? ……. …알겠지?”
크로포드가 이런 눈빛을 한다면 당사자들은 거의 죽었다고 봐야 했다.
천 년 전의 크로포드는 굉장히 엄격했고 하급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지휘관이었으나, 현재 한 번의 크나큰 패배를 맛보고 천년을 숨죽여 지내왔던 크로포드는 그 기세가 더욱 심해진 듯 보였다.
주군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침입자로 규정한 상대에게 기가 꺾여 주저앉아 버렸다는 사실을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고 그의 눈에는 순간 살기마저 스쳐 지나갔다.
“그 녀석들은 보아하니 내가 살아있을 때에는 태어나지도 않은 것들 같았고 루이나를 감지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닌 모양이었으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전혀 책잡을 일 없다. 거기다 그중 한 녀석은 나에게 검을 휘두르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구? 목숨을 걸고 내 목에 검날을 부딪쳤으니 그 용기가 가상하지 않나! 화를 풀어라, 크로포드! 네가 육성한 기사들은 용감했다!”
“크으윽… 주군의 귀한 목에 검까지 닿게 하다니…!!!”
차라리 네로멜티아가 그들의 변호를 하지 않았더라면 크로포드의 분노가 이 정도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불현듯 떠올랐으나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네로멜티아는 속으로 크로포드의 지옥 같은 교육을 받을 블랙 나이트 넷에게 행운을 빌어줄 뿐이었다.
“하하하……. 여기 좀 보세요! 토마토랑 감자가 자라고 있어요! 와! 옥수수까지 있어요!”
네로멜티아만 없었다면 말 그대로 폭발해버렸을 크로포드의 타오르는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린 러스테리아.
다급한 임기응변으로 나온 행동이긴 했으나, 실제로 그녀는 이 농경지에 감탄하고 있었다.
종유석으로 만든 방벽의 입구를 지나자마자 나타난 굉장한 면적을 자랑하는 농경지.
햇볕 한줄기 들지 않는 깊고 어두운 지하의 공동에서 이토록 다양한 작물을 대량으로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 해안 절벽의 입구에서 갯강구를 보셨습니까?”
“네! 정말 끔찍하고 혐오스러웠어요! 으으으… 지금도 생각하면 소름 끼쳐요!”
“그 갯강구 떼는 일부러 배치해 둔 것들입니다. 숨겨진 입구가 혹시나 발견되더라도 ‘이런 장소에 생존자들이 들어갔을 리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도 아시겠지만, 저희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외부로는 절대 나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식량을 찾는 일 또한 불가능했습니다.”
시설들의 규모를 보면 생존자는 상당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생존자들 전원을 먹일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외부에서 구하고자 한다면, 하루 종일 드나들어도 모자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런 식으로 식량을 구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발각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생존자 중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을 모아, 마법 선 크리에이션(Sun Creation)을 이용해 인공적인 태양을 만들어 농사를 짓게 된 것입니다.”
“태양을 만든 것만으로는 여러모로 충분하지 않았을 텐데.”
“공동의 내부를 뚫어 흙을 캐내는 광산을 만들어 토양을 확보했습니다. 지하수가 흐르는 수맥을 찾아내어 수원(??) 또한 확보했습니다.”
네로멜티아는 크로포드의 거침없는 설명에 따라 마음의 짐을 하나 내려놓을 수 있었다.
명계에서 머물 당시 네로멜티아는 헤모니겐트의 생존자가 있기는 할까 싶은 걱정도 많이 들었었다.
부활에 성공해 러스테리아를 만나 테라리스의 상황에 대해 들었을 때는 생존자들이 굶고 허덕이며 고통받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면 어떻게 할지 근심이 들고 마음이 아팠다.
천년의 세월을 숨어지내며 굶주림과 싸운 백성들을 볼 낯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네로멜티아의 걱정과 달리 기아의 고통에 허덕이거나 휴미안 군대의 공습에 고통받으며 지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급히 화색이 도는 네로멜티아의 모습을 본 크로포드는 자신의 주군이 그간 어떤 걱정을 했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고, 그녀의 시름을 덜어주기 위해 더욱 많은 이야기들을 꺼냈다.
“저희는 가축도 있습니다. 피난민들이 챙겼던 소나 돼지, 닭 등의 가축들이 몇 있었고, 농사를 짓고 남은 작물의 뿌리나 지푸라기 같은 부산물들로 여물을 만들어 먹였습니다. 남은 곡물을 이용해서 먹여 키우기도 했습니다. 양이나 염소 따위도 있어서 그것들의 젖으로 만든 술이나 치즈도 있고, 양모(??)를 이용해 의복을 지어 입을 수도 있었습니다.”
크로포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네로멜티아의 안색은 더더욱 밝아졌다.
사실 헤모니겐트의 함락과 이 모든 상황은 네로멜티아의 잘못이 결단코 아니었으나, 그녀는 백성들의 위에 선 마왕이라는 직책으로 인해 부채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내색하진 않았으나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박혀버린 그 가시는 천년의 시간 동안 고통을 주었던 마음의 독이었다.
크로포드는 이 상황이 천년 만에 만난 주군에게서 주어진 첫 임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는 것을 최대한 주군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더는 주군이 자신을 책망하며 마음 아파할 일이 없도록.
헤모니겐트의 함락은 차라리 크로포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수도방위와 국토수호를 행해야 할 기사가 기습과 배신을 눈치채지 못한 탓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피난민들을 지키고 통솔한다는 이유로 몸을 건사했을 때, 자신의 주군은 마왕성에 홀로 남아 모든 힘을 다해 마력 장벽을 만들었고 그 목숨이 끝나는 순간까지 적들을 저지했었다.
그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으며 헤모니겐트의 백성들을 지킨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주군이 스스로를 책망하는 일은 결코 발생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토록 자애로운 주군이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크로포드는 무언가 과장하거나 거짓된 일을 꾸며 보고하는 일은 없었으나, 최대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백성들이 무탈하게 살아오고 있었음을 끊임없이 어필했다.
이러한 대화는 언더 바르커스의 중앙에 위치한 크로포드의 거주지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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