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언더 바르커스 (2)
* * *
단호하게 검을 겨눈 블랙 나이트는 전부 네 명이었다.
그들의 단호한 태도와는 다르게 신체는 강하게 떨려오고 있음을 풀 플레이트 아머의 금속판 너머로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분명 이 내부에 블랙 나이트와 생존자들이 머무르고 있다면, 이들은 천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명의 침입자도 마주한 적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의 위치가 휴미안들에게 발각되었다면 이 장소에 계속 머무를 수 없었을 테니.
그렇기에 이들은 처음 마주한 침입자라는 존재가 절대 익숙하지 않았고, 곧 학살자의 군대가 들이닥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강한 두려움을 느끼며 당혹감에 젖어있는 것이었다.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가?”
“아, 알 리가 없잖느냐!! 잠자코 무릎을 꿇어라!! 벤다!!!”
와들와들 떨려오는 검으로 겁박하려 들어봐야 아무짝에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들고 있던 코르니움 롱 소드가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과거 주군과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불사르며 적과 맞서 싸우던 용맹하고 긍지 높은 블랙 나이트는 어디 가고 침입자가 나타났다 해서 벌벌 떨고 있는 검은 양만 남은 것인가.
“베어 보거라.”
“뭐, 뭐야!!”
“베어 보라고 했느니라.”
러스테리아를 대하던 허물 없고 친절한 모습은 사라지고 근엄한 군주의 모습만이 드러나는 네로멜티아.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러스테리아는 그녀의 품격과 위엄에 절로 감탄하며 사랑에 빠진 소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강대한 기세를 방출하며 블랙 나이트를 압박하는 네로멜티아는 마의 지배자이자 신들과 동격인 절대적 패왕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텅!! 털걱!!
블랙 나이트 중 둘이 검과 방패를 떨어뜨린 채, 주저앉아 버렸다.
그들은 맥없이 쓰러지면서도 압도적인 강자의 기세에 사로잡혀 그 눈만은 결코 상대에게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와들와들 떨려오는 신체는 풀 플레이트 아머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낼 만큼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이미 반쯤 넋이 빠진 정신은 요동치는 동공마저 다잡지 못하고 있었다.
방출되는 루이나를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수준이 낮았던 이들이지만, 주변 공기가 변화하며 심장을 터뜨릴 듯 압박해오는 강대한 힘만큼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이이…!! 허,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아아아!!!”
카앙!!!
가장 앞에 서 있던 블랙 나이트 하나가 바람이라도 불면 넘어갈 정도로 떨려오는 다리를 애써 움직여 네로멜티아에게 다가갔고, 그녀를 향해 전력을 다한 참격을 날렸다.
그는 검을 휘두르면서도 공포감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고 참격이 확연할 정도로 맥없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며 끝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검이 상대에게 부딪치는 순간 검으로 사람을 베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질적인 소리가 나자 절망감에 의문까지 더하게 되었다.
차라리 쇠몽둥이로 바위나 금속을 내려친 것이라 말한다면 믿을 수 있을 소리.
예리한 검날에 맞닿은 네로멜티아의 목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아무리 힘이 다 빠진 참격이라 할지라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코르니움으로 만들어진 블랙 나이트의 롱 소드라면 더더욱.
눈을 번쩍 뜨고 경악하는 블랙 나이트는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착용한 그레이트 헬름의 내부는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고 마치 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는 푹 젖어있었다.
공포와 절망감에 집어 삼켜진 그와는 다르게 네로멜티아는 방출하던 루이나를 모두 거둬들인 뒤, 담담하게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자신의 목에 닿은 롱 소드를 밀어 치우고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좋아. 일단 합격이다. 역시 블랙 나이트는 블랙 나이트로구나. 용기 있는 너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느니라.”
그리고 무심히 그들의 옆을 지나쳐가는 네로멜티아.
곧바로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러스테리아는 블랙 나이트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앞서가는 네로멜티아를 향해 연모의 감정이 가득 담긴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곧이어 그나마 서 있던 두 명의 블랙 나이트조차 다리가 풀려 지면에 주저앉아 버렸다.
네로멜티아에게 검을 휘둘렀던 블랙 나이트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그저 한마디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누구지…?”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동의 어둠 속을 빛의 구체가 발하는 빛에 의지해 걷는 두 사람.
러스테리아는 잔뜩 상기된 표정을 하고서 네로멜티아에게 감탄을 늘어놓았다.
“정말 멋지고 위엄있으셨어요! 누구인지 굳이 밝히지 않으시고 마력을 방출해서 제압하시다니!”
마왕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낸 패왕의 행동이라 생각했던 러스테리아는 육망성이 새겨진 보랏빛의 눈동자를 한가득 반짝이며 네로멜티아를 극찬했다.
그녀는 네로멜티아가 방출한 압도적인 규모의 루이나를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었기에, 그 경지가 얼마나 드높은지도 잘 알고 있었다.
가볍게 흘린 루이나만으로도 광활한 공동을 단숨에 장악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오히려 수준이 턱없이 낮았던 블랙 나이트들이 거품을 물고 기절하지 않은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러스테리아가 생각한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 아니… 애들 겁주려던 게 아니라… 루이나를 보여주면 적이 아니구나 하고 알아들을 수 있을 줄 알았지…….”
“… 아……. … 아니에요! 정말 잘하셨어요! 마왕님께서 통행증 보여주듯이 가볍게 방출하신 루이나조차 견뎌내지 못한 저분들이 잘못된 거예요!”
“… 굳이 나를 변호하려고 들지 않아도 괜찮아 러스…….”
한동안 러스테리아가 위안의 말들을 한가득 쏟아냈지만, 네로멜티아의 복잡하고도 착잡한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한동안 광활한 공동을 걸었을 무렵, 먼 곳에서부터 환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네로멜티아의 직감은 저것이야말로 인위적인 빛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들어선 위치와 지나온 거리, 그리고 방향으로 미루어 볼 때 현재의 위치는 바르커스 화산의 중심.
어딘가의 천장에 구멍이 나서 햇볕이 들어온다는 가설은 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빛의 위치 또한 천장보다는 한참이나 낮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거대한 발광석이나 타오르는 용암이라면 저 정도로 빛날 수 있겠다 싶었으나 빛의 형태나 색상으로 보면 그것조차 아니었다.
명백히 백색으로 빛나는 그 빛의 구체는 마치 작은 태양과도 같아 보였다.
“생존자들이… 있는 거겠죠…?”
정체 모를 빛을 바라보는 러스테리아는 반가움 반 불안감 반으로 네로멜티아에게 물어왔다.
더 이상 라이트 마법은 필요가 없을 지경으로 주변이 환하게 밝아오니 러스테리아는 빛의 구체를 지워버렸다.
“그래, 생존자들이 사는 장소가 틀림없는 것 같아.”
조금 더 다가가 빛의 구체를 더 명확히 본 네로멜티아는 눈앞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작은 태양이라는 묘사보다 정확한 표현은 더 없을 존재.
마법으로 만들어진 인공 태양이었다.
그리고 이 인공 태양은 주로 햇볕이 들지 않는 장소에서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한다.
휴미안들을 피해 해안 동굴 깊숙한 곳으로 숨어든 생존자들이 밖에 나가 식량을 구할 수 없다면 다음에 취할 행동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은 이 드넓고 광활한 공동을 농지로 일궈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한 아름 정도 되는 굵기의 종유석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블랙 나이트들 특유의 코르니움 풀 플레이트 아머.
그러나 이전에 보았던 블랙 나이트들과 달리 당당하면서도 기품있는 기세가 돋보이고 있었다.
그 블랙 나이트는 유유히 네로멜티아의 앞까지 다가온 뒤, 한쪽 무릎을 꿇고 그레이트 헬름을 벗었다.
어깨까지 닿는 백발을 뒤로 묶어 단정히 정리한 사내.
드러난 이마의 중앙부터 왼쪽 눈까지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크게 베인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의 왼쪽 뺨 역시 턱부터 눈 아래까지 세로로 길게 그어진 흉터가 존재했다.
큰 흉터가 두 개나 안면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성의 미색은 전혀 가려지지 않았고, 여성스러운 외모가 아님에도 아름다운 그의 모습은 남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그 절정을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남성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은 채, 네로멜티아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블랙 나이트, 크로포드 반 에이하르트(Crawford van Eihardt). 주군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리며 백성들을 지키고 있었나이다.”
크로포드 반 에이하르트.
과거 헤모니겐트의 소드 마스터라는 이명으로 불렸고, 마왕의 방패라고 칭송되기도 하던 인물.
마왕 직속 친위대 블랙 나이트의 단장이자 마왕 네로멜티아의 최측근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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