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언더 바르커스 (1)
* * *
드높은 창공이 짙은 분진의 층으로 뒤덮이더라도 날은 밝기 마련이었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온 새벽은 점차 밝은 백색광을 띠며 대지를 비췄고, 은은한 태양의 손길은 작은 굴 안까지 퍼져갔다.
간밤에 자신을 불살라 빛을 나눠주었던 작은 모닥불은 하얀 잿개비가 되어 얼마 안 되는 불티를 품고 있을 뿐이었다.
“… 으응…….”
은은한 빛이 퍼지며 밝아지는 굴의 내부, 잠에서 깨어난 러스테리아는 평소 자신이 은신하던 장소와는 다른 낯선 천장에 전날의 기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맞이한 주인과의 재회, 천년이나 잊고 지냈던 맛있는 식사와 따뜻하고 깨끗한 환경, 부드럽고 푹신한 침대.
그리고 색욕에 취해 뜨거운 음락(??)의 밤을 보냈던 순간까지.
잠에 취해 몽롱했던 정신이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을 더듬자 불현듯 눈을 뜨게 만들었다.
“일어났구나.”
소리가 남에 따라 침대의 한편을 돌아본 러스테리아는 이미 자신의 의복을 챙겨 입은 채,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네로멜티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토록 그리웠던 주인의 모습에 다시금 감동하여 상체를 일으킨 러스테리아는 북받치는 감정에 눈물이 글썽였다.
전날 있었던 일들은 한낱 꿈이 아니었고,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이면 또다시 욕정이 생길 것 같은데?”
“… 하읏!!!”
순간 러스테리아는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라는 것을 기억해냈고, 이불을 끌어당겨 급히 자신의 드러난 가슴을 감췄다.
네로멜티아는 그 순수한 모습에 잔잔히 웃음 지은 뒤, 러스테리아의 잘 개어진 의복을 가져다주었다.
깨끗이 세탁되어 반듯하게 각이 잡힌 의복은 마치 새것과 같이 보였다.
“마법으로 세탁하고 정리해 뒀어. 특히 속옷은 흠뻑 젖어있지 뭐야?”
“마, 마왕님!”
“후후후.”
짓궂게 러스테리아를 놀린 네로멜티아는 그녀가 옷을 입는 동안 마법으로 그녀의 신체를 깨끗이 씻겨 주었다.
마법으로 생성된 물이 떠다니며 매력적인 서큐버스의 신체를 구석구석 어루만져 주었고, 신체의 모든 더러움을 빨아들인 뒤 사라졌다.
유독 가슴과 엉덩이를 중심으로 씻겨 주는 것 같았지만 굳이 마법의 시전자 본인에게 이유를 물어볼 정도로 의문이 생길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몸가짐을 정리하고 러스테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네로멜티아는 간밤에 흠뻑 젖어 들고 얼룩졌던 침대의 시트와 이불 역시 마법으로 깨끗이 세탁한 뒤 디멘셔널 스토리지에 수납하였다.
그리고 침대가 사라진 자리에 전날 식사 때와 같은 탁자와 의자를 늘어놓고 아침 식사 거리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강림의 신전 공략에 휴미안이 열다섯밖에 파견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전날 모닥불을 피우고 정화마법에 온도조절 마법까지 사용해둔 채 잠들었는데도 기습이 없었다면. 근방에 휴미안이나 드래곤은 없는 것 같다.”
“… 그렇군요.”
아침 식사로 식탁에 오른 사과잼과 생크림, 시럽이 가득 올려진 팬케이크.
그리고 곁들여진 신선한 우유와 살구의 설탕 절임.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그 달콤하고 따뜻한 식사를 즐기던 러스테리아는 네로멜티아의 정확한 판단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양 볼에 가득 팬케이크를 넣고 우물거리다 급하게 삼킨 뒤, 대답하는 러스테리아가 퍽 귀여웠던 네로멜티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공간 전이 같은 고위계의 마법은 달에 있는 드래곤이 감지할 수도 있으니 아직은 사용하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생존자들을 구출하고 블랙 나이트와 마주할 필요가 있으니 비행 마법 정도는 사용해도 좋다고 보고 있어.”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비행 마법을 사용하면 적에게 발각되기 쉬우니 어제는 걸어서 이동했지만, 주변에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주저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봐.”
그렇게 그날의 아침 회의는 간략하게 마무리되었다.
아침 식사를 끝낸 네로멜티아는 소지품을 모두 챙긴 뒤, 러스테리아에게 정화마법을 걸어주었다.
정화마법을 시전한 굴 밖으로 나가 이동하더라도 그녀가 이 독과 같은 대기를 조금이라도 마시지 않고 편히 지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왕의 은혜 덕에 마력을 되찾았으니 스스로 해도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네로멜티아는 그저 웃으며 마법을 걸어줄 뿐이었다.
그렇게 높은 창공으로 날아오른 둘은 러스테리아가 기억하는 생존자 은신처로 빠르게 이동했다.
네로멜티아가 이동하면서 느낀 것은, 끝까지 두 다리로 이동했다면 하루가 더 걸려서 도착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예상이 적중하여 주변에 휴미안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고, 사소한 경보 마법조차 감지되지 않았으니 그 과감한 선택이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예요!”
러스테리아가 급히 해안 절벽 하나를 가리켰고, 그에 따라 둘은 빠르게 하강했다.
해안 절벽은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가파른 수직의 절벽과 그 절벽을 거세게 때려대는 높은 파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더 하강하며 해안 절벽을 샅샅이 살펴보자, 절벽의 가장자리에 작은 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굴의 입구 위로 볼록하게 솟은 절벽의 요철 때문에 굴의 입구가 절묘하게 감춰져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둘은 굴 내부까지 날아 진입한 뒤에서야 비로소 지면에 발을 디디고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다.
그 좁디좁은 굴의 내부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고, 울리는 소리로 볼 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을 뿐이었다.
“라이트(Light).”
러스테리아는 마법으로 빛의 구체를 소환해 전방을 향해 띄웠다.
상당히 밝은 조명이 굴 내부를 환하게 비췄으나, 그럼에도 빛이 닿지 않는 거리부터는 칠흑 같은 암흑만이 보일 뿐이었다.
상당히 협소하고 좁은 굴이었기에 빛은 멀리 뻗어 나가지 못하고 있었고, 불과 열 걸음 정도의 거리만이 빛으로 밝혀질 수 있었다.
“히이이이익!!!”
순간 러스테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몸서리치는 바람에 빛의 구체가 몹시 흔들리며 주변의 그림자들 역시 어지러이 울렁댔다.
발을 동동 구르며 눈을 감고 소리치는 러스테리아의 반응에 네로멜티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사사사사사사사삭
그저 시커먼 색의 동굴인 줄만 알았으나, 동굴의 바닥과 벽은 온통 갯강구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이 러스테리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비명을 지르는 탓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사방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피어(Fear)!”
끼이이이이이익!!!
헤모니겐트의 척박한 환경과 루이나의 아래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평범한 생명체일 수 없었다.
현재 지면을 가득 메운 채, 징그럽게 기어 다니고 있는 갯강구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성인 남성의 손바닥만한 크기에 손가락 3개는 이어놓은 것 같은 긴 다리가 2개의 관절을 가지고 15쌍이나 있었다.
어떤 생명체든 씹어먹을 수 있게 진화했기에 마치 말벌과도 같은 크고 위협적인 턱을 가졌고, 다리에는 온통 날카로운 가시들이 돋아 있었다.
주로 썩은 시체를 먹고 사는 일반적인 갯강구들과 다르게 이들은 집단으로 몰려들어 살아있는 생물을 사냥하기에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낼만한 발성 기관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네로멜티아가 시전한 공포 마법에 의해 원초적인 두려움을 느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갯강구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자 네로멜티아는 즉시 공격 마법을 시전했다.
“일렉트릭 에어리어(Electric Area)!!”
파지지지지직!!!
전방의 모든 갯강구들이 새까맣게 타버린 채 다리를 구부리며 죽어버렸다.
전류가 지면을 타고 흐르는 지역을 생성하는 마법은 상당한 거리를 번져나갔는지 깊은 굴의 시커먼 안쪽에서도 갯강구들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한동안 귀를 어지럽히는 그것들의 비명이 이어졌고, 잠시 후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괴성 몇을 끝으로 굴의 내부는 비로소 정적이 흐르게 되었다.
“이제 괜찮아, 안심해.”
“흐이이이이이… 시체조차도 소름 끼쳐요… 아예 불로 태워버릴까요…?”
“동굴 같은 협소한 내부에서 화염 마법을 썼다가는 산소가 모자라질 거야. 그 정도야 대기 생성 마법을 사용하면 되겠지만 급변한 기압에 의해 대기가 휘몰아칠 수도 있고, 만약 가스층이라도 생성되어 있다면 폭발할 수도 있지. 굴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조금만 참자.”
어쩔 수 없었던 러스테리아는 빛의 구체를 내세우며 수북이 쌓인 갯강구들의 시체들 사이를 살금살금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예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 눈을 질끈 감거나 천장을 바라보곤 했으나, 이내 바닥을 안 봐서 넘어졌다가는 아예 그 시체들 사이로 머리를 처박게 될 수도 있기에 잔뜩 울상을 짓고 지면을 살피며 앞으로 나아갔다.
반면 네로멜티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무심하게 걸어 나갔고, 오히려 갯강구들의 시체가 그녀의 발에 차이거나 밟히기도 했다.
그에 따라 까맣게 탄 시체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이따금 요란하게 동굴 내부에 울려 퍼졌고, 그때마다 러스테리아는 소름이 끼치는지 몸을 바르르 떨어댔다.
머지않아 갯강구들의 영역이 끝났는지 지면은 깨끗해졌으나, 러스테리아는 끝나지 않는 동굴에 질색한 나머지 다른 의미로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어디까지 계속되는 걸까요…….”
“여기 와본 적은 없는 거야?”
“기본적으로 각자가 들키지 않으려고 은신해서 지내다 보니… 왕래를 하지 않았어요……. 서로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양측 다 위험해지니까요. 위치를 아는 것도 단장님께서 찾아와 언질을 주셔서 알게 되었을 뿐이고… 실제로 찾아왔던 경험이 있으면 갯강구를 보고 놀랐을 리가 없잖아요! 처음이라구요, 갯강구의 서식지 같은 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지낼 수 있는 거죠!?”
“… 그만큼 필사적이었던 거겠지.”
기본적으로 협소하고 천장이 낮은 동굴이었기에,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인 채로 걸어야만 했다.
그것이 장시간 지속 되자 슬슬 불편함이 느껴지기 시작한 탓에 러스테리아는 속히 목적지에 다다르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러스테리아는 더더욱 울상을 지으며 낑낑대기에 이르렀다.
“이제 허리가 아파요…….”
“이제 다 온 것 같다.”
동굴의 울리는 소리가 가벼워지기 시작한 것을 간파한 네로멜티아는 드디어 기나긴 통로가 끝났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측은 적중했고, 서서히 무언가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따지면 은은한 빛이 느껴지고 있었고, 빛이라는 것은 인적(人)일 확률이 높았기에 희망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속히 내부를 확인하기 위해 걸음의 속도를 높였고, 머지않아 길었던 통로를 벗어나 넓은 공간으로 나올 수 있었다.
“와아… 들어오는 입구는 좁았는데, 여기는 엄청나게 넓어요!”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많은 생존자들을 수용할 수 있겠지.”
그녀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아득히 거대한 공동(??)이었다.
간간이 벽에 붙어있는 발광석들은 누군가 박아놓은 것이 아닌 채취되지 않은 천연의 발광석이 동굴 벽이 침식되며 드러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발광석들에 의해 내부가 희미하게나마 밝혀져 어림짐작으로 그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천장에는 발광석들이 꽤 박혀있는 상황이었으나, 천장 자체가 아득히 높은 까닭에 마치 밤하늘의 별들을 보는 것 같아 조명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였다.
종유석들만 해도 천년은 더 먹은 고목처럼 거대하게 솟아 있었고, 이 현장에 서 있노라면 마치 스스로가 작아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이 거대하고 넓었다.
“움직이지 마라!”
순간 다소 작은 종유석의 뒤편에서 기사로 추정되는 인물들 몇이 순식간에 뛰어나와 검을 겨눴다.
흑철이라고도 불리는 코르니움이란 광석으로 제작된 검은 풀 플레이트 아머와 카이트 실드, 그리고 롱 소드.
분명 마왕 직속 친위대, 블랙 나이트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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