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10번째 부활, 1000년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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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고요한 공동.
과거 수많은 휴미안의 군세가 저마다의 마도공학 무기들을 가지고 마왕의 부활을 저지했던 장소라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침묵만이 가득했다.
본디 부활 중의 취약한 상태였다고는 하나 마왕의 신체를 날려버릴 정도의 집중포화가 쏟아졌다면 그 장소 역시 폐허가 되었어야 마땅했으나 강림의 신전은 세계의 의지에 이루어진 장소인 만큼 견고했고, 제단을 비롯한 모든 것들은 그 고고한 자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차원의 공간을 창고로 삼는 마법 ‘디멘셔널 스토리지(Dimensional Storage)’를 연 네로멜티아는 그 안에서 자신 고유의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네로멜티아가 드레스를 향해 손을 뻗은 것만으로 그녀의 신체를 어루만지며 감싸듯 저절로 입혀졌다.
검은빛의 타이트한 원단이 신체에 달라붙어 아름다운 여체의 굴곡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둘로 갈라진 긴 천이 풍만한 양 가슴 각각의 중심을 감싼 채 올라가 쇄골의 가운데 위치한 두개골 모양의 장신구로 이어지며, 그 위로 목을 감싸는 고풍스러운 칼라와 이어졌다.
어깨를 한껏 드러내며 가슴 또한 일부 노출된 과감한 형태의 홀터넥 드레스이지만 오히려 그 아름다운 신체가 더욱 드러나 고결함마저 느끼게 했다.
군더더기 없이 탄탄한 복부가 트럼프의 다이아 모양과 같이 길게 뚫린 구멍을 통해 드러나 있었다.
하반신의 양 측면이 훤히 트여있어 탄력적이고 부드러운 허벅지와 긴 다리가 한껏 매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양 측면이 트임에 따라 후방의 좁고 길게 뻗은 드레스의 자락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비견되는 탄탄한 둔부의 둥근 실루엣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나풀대고 있었다.
무릎 위까지 길게 뻗어 타이트하게 다리를 감싸고 있는 검은 가죽 부츠의 위로 도톰한 허벅지의 살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귀족적이고 고풍스러운 이브닝 글러브를 착용했으나, 그녀가 착용한 드레스와 같이 타이트하고 원단이 얇은 까닭에 그녀 특유의 고운 굴곡과 몸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네로멜티아의 전용 의복인 나이트 일루전(Night Illusion).
방어 마법이나 가호 같은 마법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능은 일절 없으나 마력을 주입하기만 하면 언제든 본래의 모습을 수복할 수 있는 드레스였다.
근접 전투를 선호하는 네로멜티아의 특성상 의복이 찢어지고 타버리기 일쑤였던 까닭에 기품을 지키라는 이유로 그녀의 친구가 만들어 준 마법 장비인 셈이었다.
마왕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창조된 전용 의복인 만큼 어느 누가 보아도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드레스였는데, 더욱 이 드레스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그 주인인 네로멜티아의 매력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게 디자인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나이트 일루전은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의상임에도 네로멜티아의 신체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치수와 구조로 제작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마왕의 보물고 안에서도 마왕 네로멜티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의상이라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며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자신을 꾸미는 일에 그다지 흥미가 없던 네로멜티아는 마력을 주입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원상복구 되는 특성에 세탁조차 필요하지 않으니 간편하다는 이유로 선호했던 의복이었지만.
“오랜만이야.”
명계에서도 나이트 일루전과 똑같은 형태의 드레스를 입었었으나, 그것은 영혼들의 힘인 영력을 통해 구현한 레플리카에 불과했었다.
현재 그녀가 감상에 빠져들어 어루만지고 있는 드레스의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은 현세의 현실이었다.
천년 전만 해도 너무나 익숙했었던 감촉이었는데, 기나긴 세월을 지나 향수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이 포근하고 편안해지는 감촉이 현실이라는 감각을 되살려주었다.
자신은 진실로 부활에 성공한 것이다.
저벅 저벅
네로멜티아는 벅차오르는 환희를 애써 억누르고 강림의 신전을 조심스럽게 빠져나갔다.
항상 진을 치고 부활을 저지하던 휴미안의 군세가 이번에는 어떠한 이유에서 자신을 이 세상에 곱게 풀어놓아 주었는지 의문이 들었고, 혹여 자신이 생각지 못한 또 다른 흉계가 있을 수도 있기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이대로 걸어 나가다가 기습을 당할 위험도 존재했기에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이내 그 생각은 오히려 안전을 위해 접어 두었다.
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테라리스이니 네로멜티아가 기억하는 지형이나 위치와는 판이하게 변화했을 가능성이 농후했고, 잘못된 위치로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텔레포테이션 따위의 순간적 좌표 이동 마법을 사용했을 때, 메모리 해 두었던 좌표가 허공이 아닌 건물이나 산 따위가 들어선 위치로 달라졌다면 물체와 자신의 신체가 같은 좌표가 되어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마왕 정도 되는 이라면 신체와 사물이 뒤섞이는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만 그런 순간에 기습을 받는다면 또 죽을 수밖에 없었다.
포털이나 워프 따위의 게이트 마법을 사용한다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셈이니 마법적 위험은 없겠으나, 해당 마법을 감지하고 누군가 기습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역시 제외하기로 했다.
결국 만반의 태세로 반격과 방어를 할 수 있는 방안을 택하기로 한 것이고, 네로멜티아는 그렇게 강림의 신전에 이어진 기나긴 통로를 유유히 걸어 나갔다.
쿠르르르르릉
네로멜티아는 강림의 신전의 숨겨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외부에서는 그저 암벽의 일부로 보이는 이 마법 문은 마왕의 마력 루이나를 감지하자 자동으로 열렸다.
휴미안들의 무력으로는 결코 부술 수 없는 강림의 신전인 만큼, 그것을 지키는 문도 파괴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문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니, 아마 마왕군 내부의 배신자는 문을 여는 방법까지 밀고한 것이 틀림없었다.
강림의 신전의 문은 바르커스 화산을 중심으로 마왕성의 반대편인 레드오션과 맞닿아 있었기에,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넘실대는 붉은 바다를 목견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앗아간 배신자와 파멸을 몰고 온 이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네로멜티아는 거세게 날아오르는 파리 떼를 보았다.
코가 썩는 듯한 악취 또한 훅하고 불어와 후각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강림의 신전을 지키는 숨겨진 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시체가 몇 굴러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대기에 가득 퍼져 있는 파괴의 성질을 지닌 마나 ‘루이나’와 모든 대지와 바다에 녹아든 온갖 금속 성분에 의해 열악한 자연환경을 지닌 헤모니겐트의 생태계는 녹록지 않다.
시체에 꼬여 든 파리는 분명 인류를 공격할 수 있는 치악력과 이빨이 돋아 있었고, 성격도 몹시 호전적이었다.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꺼림칙하기도 한 까닭에 마왕은 화염의 마법을 사용해 그것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플레임(Flame)!”
화르르르륵!!
키이이이이이익!!!
마왕의 손길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전방을 넓게 뒤덮었고, 그 붉은 장막이 지나감에 따라 파리 떼는 저마다의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지면에 떨어졌다.
배를 까뒤집고 여섯 개의 다리를 오므린 채, 까맣게 타서 죽어버린 파리 떼.
네로멜티아는 그 파리들이 모여 있던 시체들을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미 파리 떼들이 게걸스럽게 뜯어먹어 본연의 형체를 잃은 처참한 시체는 휴미안의 것으로 보였다.
그 자리의 열다섯 구의 시체는 전부 휴미안.
파리 떼의 이빨 자국이 가득하고 손가락만 한 구더기까지 들끓어 너덜너덜해진 썩은 고기에 불과하게 되었으나, 사인(死?)을 나타내는 흔적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뜨겁고 긴 무언가에 신체가 꿰뚫려 제대로 반격도 못하고 절명해 버린 듯했다.
그리고 다른 시체들 또한 상황은 모두 동일해 보였다.
휴미안들의 무장으로 보건대 마왕의 부활을 저지하러 온 병사들임은 확실해 보였다.
일개 경비병이나 수색대라고는 여길 수 없는 무장.
두셋이 모여서 들어야 할 만큼 크고 무거운 마력광선포나 강력한 마력석 안에 내재된 마력을 한순간에 모조리 전력(?力)으로 바꾸어 사출하는 전격포 따위의 강대한 무기들뿐이었으니.
그러나 전에는 강림의 신전을 가득 채울 만큼의 군세가 몰려 있었건만, 현재는 열다섯 정도의 휴미안 밖에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몹시 의아했다.
대체 자신이 없던 테라리스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문득 네로멜티아는 자신을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대하던 명계의 사신 이엘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이러한 현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죽음의 신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 이엘 디트 지스킬.
그는 다른 차원들의 너머도 자유로이 지켜볼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가 부활할 때마다 그다지 큰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강림의 신전에 진을 치고 있는 휴미안의 군대 또한 선명히 보였으니까.
반면에 이번에는 휴미안의 군대가 하나도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명계의 법칙이라는 것 때문에 알려주지는 못했으나 그녀가 온전히 부활에 성공해 긴 시간을 만나지 못할 것을 알았으니 그 나름대로 작별 인사를 해준 것이었다.
사신은 결코 죽은 영혼에게 현세의 일을 발설할 수 없다나.
그것도 이엘 스스로가 정한 규칙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얽매여 자신의 친구에게조차 현세의 일을 일언반구 발설할 수 없다니 조금 우스운 일이기도 했다.
“이 녀석…! 밴시들도 웃으면서 배웅해 준 걸 보면 걔들도 다 알고 있던 모양인데, 왜 당사자한테만 미리 이야기를 안 해준 거야!!”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 더 멋들어지고 정겨운 작별을 했을 텐데.
너무도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작별한 것 같아서 뭔가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이엘은 나름대로 여운이 남는 좋은 이야기를 하며 네로멜티아를 떠나보냈으나, 정작 당사자인 그녀는 줄곧 당황만 하다가 현세로 떠나 버린 것이다.
친구로서 조금은 야속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의 회상을 끝낸 네로멜티아는 어째서 휴미안의 군대가 강림의 신전에 없었고, 이 외부에 고작 열다섯의 시체만이 발견된 것인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던 네로멜티아는 자신이 바라보는 주변 환경이 과거의 헤모니겐트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가 멸망한 것인지 깊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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