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마왕(?王)과 사신(死?)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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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멜티아가 처음 명계에 들어선 날, 강대한 힘을 가진 영혼의 등장에 망자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강한 영력을 쌓아 높은 지위에 오른 망자들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이제 막 죽은 자들은 자신의 삶과 생명에 대한 집착을 가진 채, 이승으로 돌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경우도 많다.
그러하기에 새로운 망자들이 최초로 도착하는 명계의 입구, 공허의 강.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개념만이 흐를 뿐인 이 강은 강대한 언데드 정예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 어떤 영혼이 들이닥쳐도 그 용맹한 기세는 꺾이지 않았었으나, 네로멜티아가 공허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 나올 때만큼은 몸을 떨어댔다고 한다.
행여나 이 영혼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다면 자신들로서는 어찌할 바 없이 소멸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러나 그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조용히 명계의 깊숙한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간은 그 안에 조용히 앉아 사색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주변의 바위나 나무를 온통 부수며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는 등 홀로 지냈다.
숲에 거주하던 망자들이 두려워하며 마을로 내려와 지내기는 했으나, 그녀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눈여겨보던 사신 이엘 디트 지스킬은 자신의 성으로 그녀를 초대했다.
사신의 성에 초대받은 네로멜티아는 망자들의 군주 중 하나가 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으나, 만찬에 나온 요리와 술을 마실 뿐 귀찮아 보인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어차피 자신은 100년을 기다려 부활하니 곧 현세로 돌아가 봐야 하는 영혼이라면서 응해줄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아깝다고 이야기하는 이엘에게 네로멜티아는 친구로서의 관계라면 남은 시간을 함께해 줄 수 있다고 말했고, 이엘은 사신인 자신에게 우정을 제의할 줄은 몰랐다며 흔쾌히 네로멜티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첫 번째의 부활.
현세로 다시 떠나며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건넨 네로멜티아가 다시 명계로 돌아온 것은 채 1분도 되지 않은 짧은 순간이었다.
이엘은 이럴 줄 알고 있었던 듯 그녀가 작별을 고하고 현세로 떠난 그 위치에서,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네로멜티아는 다시 명계로 돌아오자마자 화가 있는 대로 나서는 발을 마구 굴러댔다.
그녀의 발길질에 주변의 대지가 꺼지고 지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먹질 한 번에 거대한 기암괴석이 박살나고 강의 모든 물이 솟구쳐 바닥을 드러냈다.
부활하자마자 다시 명계로 돌아와야만 했던 네로멜티아의 분노는 장장 일주일가량 터져 나왔고, 이엘은 자리를 뜨지 않은 채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네로멜티아와 작별을 고하는 자리를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깊숙한 숲속으로 정한 것 또한, 이엘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망자들과 달리 사신은 다른 차원인 현세를 훤히 내다볼 수 있으니까.
마왕이 다스리는 데모니안들의 나라 헤모니겐트.
그 최북단에는 하늘을 뚫을 듯 드높게 솟아 있는 바르커스 화산(Barkus Volcano)이 있다.
헤모니겐트의 수호룡 이름을 딴 이 화산은 테라리스라는 세계 전체를 통틀어 2번째로 높은 산이다.
방대하게 솟구치고 흘러내리는 용암은 아스타리스 대륙 북단의 바다에 끊임없이 철분을 흘려보내고, 이는 ‘레드 오션’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원인이 되었다.
거기다 온갖 광물의 보고이기도 하며, 역사상 가장 단단한 금속이라는 아다만티움 역시 이 화산에서만 제련 가능했다.
흑철(??)이라고도 불리는 마왕군의 주력 금속인 코르니움(Cornium) 역시 바르커스 화산이 원산지였다.
이토록 많은 업적을 가진 바르커스 화산은 그 위명만큼이나 드넓고 드높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평범한 이들은 종일 등반할지라도 그 절반도 오르지 못한다고 할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화산 어딘가에 마왕의 부활을 위한 장소가 은밀히 숨겨져 있었다.
강림의 신전.
위치나 형태, 규모 등 모든 것이 불명인 이 신전은 그 존재조차 아는 이들이 없는 극비였다.
마왕을 비롯한 최측근들만이 그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었고, 데모니안과 헤모니겐트 역사상 단 한 번도 이 비밀은 새어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위치를 들키고 만 것이다.
네로멜티아가 부활하는 순간, 강림의 신전에는 이미 수많은 휴미안들이 포진해 있던 상황이었다.
그들은 네로멜티아의 신체가 이제 막 생성되려 하는 순간 압도적인 집중포화를 가했고, 아무런 힘이 없는 신체의 조각에 불과했던 것은 제 모습을 갖추기도 전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네로멜티아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다시 현세에서 소멸하고 만 것이다.
자신이 첫 번째로 죽던 날, 누군가 배신을 해서 휴미안들이 마왕성까지 무혈입성하며 들이닥쳤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배신자가 강림의 신전마저 아는 이 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배신자는 강림의 신전 위치까지 휴미안들에게 고해바친 것이 틀림없었다.
평범하게 탐사해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장소이니.
거기다 헤모니겐트가 아직도 휴미안들에게 점령당한 상황이라는 것 역시 명백했다.
헤모니겐트의 심장, 마왕성은 바르커스 화산의 바로 앞에 위치해 있으니 강림의 신전이 장악당했다면 헤모니겐트 역시 완벽하게 함락된 상황이라고 봐야 했다.
적어도 마왕군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다면 마왕의 부활을 목숨 바쳐 지키고 있었을 테니.
결국 데모니안들은 아직도 휴미안들에게 유린당하고 있다 봐야 하며, 휴미안은 테라리스 전체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 모든 예상들이 네로멜티아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몇 번의 부활을 거듭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활할 때마다 휴미안들의 무기와 기술력은 더욱 발전한 모습을 보였고, 그들의 장비는 더더욱 부유해 보였다.
네 번째 부활 당시 부활의 신전이 조금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누군가 마왕을 구하기 위해 휴미안들을 공격하고 있구나 생각되었을 뿐 그 외의 부활에서는 그 어떤 도움의 움직임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렇게 네로멜티아는 10번째의 부활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엘! 있냐!!!”
눈치 없는 좀비 경비병과 제레미를 지나온 네로멜티아는 바로 이엘을 찾아갔다.
사신의 좌에 앉아 친구를 맞이하는 한 남성.
천 년간 보아온 한결같은 모습.
생기 없는 백발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잿빛의 정장과 그와 같은 색의 리본 크라바트.
그리고 리본 크라바트의 중심에는 핏빛 보석으로 이루어진 브로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느껴지는 그의 녹안(??)에 서늘한 안광이 겨울밤의 등대와 같이 빛나고 있었다.
길게 찢어지는 웃음 사이로 마치 상어의 이빨이나 톱날을 보는 듯 날카로운 치아들이 가득 드러났다.
망자들의 지배자이자 죽음 그 자체인 사신(死?).
이엘 디트 지스킬(Iel deet Jiskil).
“왔나, 네로멜티아.”
“그래. 이제 10번째 부활인데 소감이 어때?”
“이런, 그 질문은 사신인 내가 당사자인 자네에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너는 쓸데없는 말은 잘 안 하는 성격이니까 내가 대신 물어봐 주는 거라고.”
당당히 반쯤의 농담을 던지는 네로멜티아에게 이엘은 몹시 유쾌하다는 듯 입을 찢어 웃었다.
그에 따라 날카롭고 살벌한 치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남자가 언데드인 것은 맞지만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것쯤은 친구로서 당연히 알고 있던 네로멜티아.
그러나 이미지라는 것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 살아있을 때 있던 뱀파이어 친구보다 더 뱀파이어 같은 거 알아?”
“그래, 몇 번 들어서 알고 있지.”
“걔 보다 이빨이 더 날카롭고 무시무시해.”
“그것 또한 몇 번이고 들어왔던 말이지.”
천 년이나 만나온 사이로서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터라 전에도 들었던 이야기를 또 하는 일은 일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엘이나 네로멜티아 두 사람은 별다를 게 없는 이러한 일상에서 유쾌함을 느꼈다.
이엘이 손가락을 튕기자 아름다운 밴시들이 줄을 지어 나타나 티타임을 준비했다.
묘하게 투명한 신체를 지닌 밴시들은 둥실둥실 떠다니며 탁자를 가져오고 다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딘가 왕국의 공주나 귀족 영애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미색(美色)의 밴시 하녀들이 주변을 떠돌자 네로멜티아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숙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이야기하지만 내 아이들은 탐내지 말게.”
“… 그건 얘네들 의견도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나를 좋아할 수도 있잖아!”
밴시들의 치마 속을 들여다보려다 들킨 네로멜티아는 오히려 당당히 이엘에게 의견을 피력했다.
성의 주인으로서는 기가 찰 이야기였지만, 이엘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넘길 뿐이었다.
물론 이러한 일들도 일상이었다.
“치사하게 너만 미녀를 거느리고 있고! 조금은 나눠 줘도 괜찮잖아!”
“자네 저택에도 일찍이 천년 전에 하인들을 보낸 것으로 아네만.”
“… 걔네는 나한테 쌀쌀맞잖아……. 친해지려고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를 노골적으로 싫어한단 말이야.”
“그야, 대뜸 허리를 끌어안거나 가슴을 주무르려 든다면 그 어떤 여성도 싫어하지 않겠나. 잘생긴 이성이라도 그럴 텐데 하물며 동성 간에야 말할 것도 없지. 자네는 여성임에도 여성의 마음을 조금도 모르는군. 천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변하지 않는 친구여.”
“뭔가 그럴 싸 하게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거든? 나도 테라리스에 가면 나만 바라보는 아이들이 있단 말이야!”
무심코 테라리스의 이야기가 나온 순간, 진한 슬픔이 스치듯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미 열 번의 죽음을 통해 명계에서의 삶은 천 년이나 지속 되었다.
그 기나긴 세월 속에서 나라와 백성과 신하와 친구를 잃은 슬픔은 무뎌질 법도 하건만, 여전히 그녀에게는 역린이었고 가슴에 품은 날붙이였다.
이엘은 잠시나마 그녀의 낯에 스쳐 간 슬픔을 보았으나, 싱긋 웃을 뿐이었다.
“우선 들게. 자네의 부활을 다시 한번 축하하고 싶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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