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파멸을 불러온 자들 (4)
* * *
척추가 분질러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왕의 두 팔은 용사의 신체를 양분할 듯이 조여왔다.
용사는 피를 토하며 버텨보나 마왕의 압도적인 완력 앞에서는 무의미한 저항에 불가했다.
용사는 부서질 듯 이를 악물고 디바나를 최대 출력으로 발산하기 시작했다.
오드볼그의 디바나와 마왕의 루이나가 격렬하게 부딪친다.
콰아아아아아!
한 치의 양보 없이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두 마력.
그 처절한 사투에 공간을 왜곡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강렬한 충격파가 마왕성 전체를 뒤흔들며 퍼져 나갔다.
현자는 그 강대한 힘의 물결에서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7위계의 방어 마법, 퍼펙트 실드(Perfect Shield)를 발동하고 유지하는 데에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을 지키는 일뿐.
감히 마법적 공격을 감행하기는커녕 접근하는 일조차 불가능했다.
칠흑같이 검은 마력과 태양과도 같은 빛의 마력이 서로를 휘감고 천장을 부수며 창공을 향해 끝을 모르고 솟아올랐다.
빛과 어둠이 태어난 태초의 첫날을 보는 듯, 이미 두 마력의 충돌은 하나의 천재지변과 다르지 않았다.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일으키는 거대한 움직임이 세상마저 무너뜨릴 기세로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그 거대한 두 마력이 부딪치는 장소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폐허.
마왕성 가장 최상층에 위치한 드높은 옥좌의 방이었다.
이미 천장이나 벽 따위는 온통 부서지고 허물어진 가운데 처참히 난도질당한 바닥만이 간신히 남아있었다.
마왕의 옥좌 하나만이 겨우 남아 과거 그곳이 헤모니겐트의 강자들이 모여 무릎을 꿇고 절대자를 알현했던 옥좌의 방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폐허를 누군가 내려다보며 분노를 태웠다.
“네로멜티아 디 이시스! 부끄러움도 모르고 끝까지 포기하질 않는구나!”
엘크(Elk)와 닮은 왕관 같은 뿔을 가진 푸른 빛의 드래곤.
5위계의 마법 폴리모프(Polymorph)를 이용해 휴미안의 모습으로 변해있던 드래곤 케르디하크가 마법을 해제하고 본연의 강대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드래곤의 얼굴이건만 뒤로 쭉 찢어진 아가리를 보고 예상하건대 필시 잔혹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창조주께서 부여하신 드래곤의 강대한 권능으로 너를 섬멸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래서야 오드볼그의 용사가 휘말릴 지경이니 어쩔 도리가 없구나!”
태산 같은 거체를 가지고 외치는 그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왕성 전체로 울려 퍼졌고, 마왕성 내부의 모든 이들이 듣기에 차고 넘쳤다.
케르디하크는 모두의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왕에 대한 조롱, 자신의 힘에 대한 과장, 드래곤의 권위에 대한 과시.
그리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
“그러니 마왕의 처리는 용사에게 맡기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더러운 데모니안이나 마물들 따위를 징벌하러 가는 수밖에 없겠구나.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 용맹하고 찬연한 드래곤의 힘을 그저 벌레 놈들의 몰살에 사용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야.”
그리고 케르디하크는 맹렬한 날갯짓과 함께 본인의 거체를 급강하시켜 휴미안군과 피난민들의 격전지로 향했다.
비릿한 미소와 함께 그 음험한 눈빛을 마지막으로.
“케르디하크!!!!!”
마왕은 푸른 드래곤의 비겁한 행동에 격분하며 다급히 용사를 밀쳐냈다.
결과적으로 마력을 끊어야 했기에 용사의 디바나에 밀려 버렸고, 심장에 큰 충격을 받아 버렸다.
순수한 마력끼리 부딪치는 마나배틀(Mana Battle)에서 어느 한쪽이 힘이 다해 밀려나거나 의도적으로 자신의 힘을 회수하게 되면 마나를 저장하는 근원인 심장에 막대한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커윽…!!”
마왕은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황급히 마력구의 앞에 가기 바빴다.
떨리는 호흡을 몰아쉬며 상처 입은 자신의 심장을 쥐어짜 다시 루이나를 끌어냈다.
극렬한 고통이 엄습해 왔으나 마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마력구에 마력을 주입했고, 힘없이 도망할 뿐인 선량하고 약한 이들을 위한 장벽을 만들어냈다.
마왕은 본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루이나를 필사적으로 끌어냈다.
이미 루이나의 양도 얼마 남지 않았다.
쿠우우우웅!
다시 한번 휴미안군의 앞에 마왕성을 양분하는 거대한 마력 장벽이 생성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력 장벽의 위세가 심히 흔들리고 그 빛이 일정치 않은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리고 케르디하크나 휴미안의 군대는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
쿠쿠쿠쿠쿠쿵!!
휴미안군의 일제 폭격 소리가 우레와 같이 퍼져 나갔다.
드넓은 창공을 파괴의 울림으로 떨게 했다.
아스타리스 대륙에서 가장 드높고 거대한 바위산인 테라리스 락(Terraris Rock) 조차 일시에 부술 수 있는 수천의 마도거병들이 쏟아내는 마력광선포가 거대한 마력 장벽을 뒤덮었다.
위세가 전과 같지 않은 마력 장벽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한 번 발악해 보거라!! 마왕!!!”
콰지지지지지지직!!!
케르디하크의 거대한 아가리가 벌어지고, 그 내부에서 하늘을 뒤덮을 듯 방대한 수의 벼락들이 쏟아져나와 마력 장벽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급격히 부서지기 시작하는 마력 장벽.
결코 오를 수도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었던 장엄한 위용의 성채가 박살나기 시작하며 그 모습이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마왕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산산이 부서질 위태로운 모래성.
그리고 용사 베르카디아가 일어섰다.
마왕에게 척추가 으스러지고 마나배틀을 하다 밀쳐졌던 용사.
이미 그 신체의 타격은 모두 수복된 상태였고, 피범벅이 되어 떨어져 있던 성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온다.
용사에게 공격을 허용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왕은 떨어져 있던 데우스 엔시스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고, 데우스 엔시스는 마왕의 부름에 따라 그 육중하고 거대한 자신을 띄워 마왕의 손에 쥐어졌다.
카아아아아앙!!!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당도한 용사에게 데우스 엔시스를 휘두르는 마왕.
용사는 디바나를 상당량 온존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낼 수 있었다.
카아앙!! 카앙!! 카아아아앙!!!
마왕의 공격이 이전에 비교하면 많이 가벼웠다.
이미 마력 장벽의 유지에 사력을 다하고 있는 마왕이 한 손으로 휘두르는 공격 따위는 용사에게 있어서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눈.
상처 입은 맹수가 상대를 노려보는 흉악한 살기.
용사는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카아앙!! 카아아앙!! 카앙!!
쿠르르르르릉!!!
몇 차례의 공방이 더 오가던 중, 기어코 마력 장벽이 무너져내렸다.
“컥…!!!”
스걱
마력 장벽을 더는 유지하지 못하고 붕괴를 막을 수 없었던 마왕은 극심한 고통과 함께 틈을 보였고, 용사는 이전에 섬전과 같았던 몸놀림을 다시 보여 그 단 한 번의 참격으로 마왕의 오른팔을 떨어뜨렸다.
데우스 엔시스가 잘린 마왕의 오른팔과 함께 그 거체를 바닥에 누이며 장렬한 끝을 알렸다.
용사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마왕의 심장에 성검 셀레스티아를 꽂아 넣었다.
쿨럭
걷잡을 수 없이 방대한 양의 피가 마왕의 입에서 쏟아졌다.
힘이 다한 마왕은 공허한 눈으로 용사를 바라보다, 힘없이 자신의 옥좌에 앉았다.
성검을 찔러넣었던 자리에서 파괴당한 심장이 꿀럭꿀럭 선혈을 쏟아내고 있었다.
마왕의 신체를 타고 흐르는 선혈이 마왕의 옥좌를 붉게 물들였다.
“…너는 무엇을 위해 싸운 거지?”
마왕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용사에게 묻는다.
슬프고 자조적인 미소.
“저는 신왕의 이름 아래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싸웠습니다.”
“저 밖을 봐라. 대지를 피로 적시며 학살당하는 나의 백성들에게도 이것은 평화인가.”
“저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이 싸움을 끝으로 우리 휴미안은 신들의 의지 아래 모든 생명들을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오늘 흘린 피는 그에 따른 불가피한 희생이었습니다.”
희미해져만 가는 초점의 눈이지만 선명하게 상대를 보고 있는 마왕.
죽어가는 중에도 그 자태는 당당했으나, 감도는 분위기는 그녀가 마치 눈물이라도 흘리는 듯 슬프고 애잔해 보였다.
“우리 헤모니겐트의 백성들도 평화를 얻을 것이라는 말인가.”
“약속하겠습니다. 더는 피를 흘리거나 고통받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신왕 오드볼그께서 제게 그리 말씀하셨으니까요.”
마왕의 눈이 감기고 있다.
눈꺼풀이 무겁다.
마치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밤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하루가 고요하게 막을 내리는 듯.
“…글쎄 과연 어떨지……. 짐은 너의 약속을… 지켜보겠노라…….”
용사는 가슴이 아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정의와 대의는 분명 자신에게 있는데, 의미 모를 통증이 마음을 조여 온다.
“…용사… 베르카디아 벨 거트루드……. 힘내봐라…….”
마왕이 눈을 감았다.
그 신체가 검은 재가 되어 무너지고, 그 슬픈 미소 또한 한 줄기 바람에 흩어져 사라졌다.
용사는 다 무너진 옥좌의 방 벽 너머로 헤모니겐트를 내려보았다.
그녀는 이 순간만을 고대하며, 오늘의 자신이 환호하는 휴미안들의 앞에서 성검 셀레스티아를 치켜들고 승리를 알릴 것이라 상상해왔다.
그러나 헤모니겐트에 남은 것은 화염과 검은 연기.
낭자한 피와 파괴된 폐허.
승리의 환호는 없었으며, 희생자들의 고통에 찬 비명과 파괴를 알리는 포격 소리뿐.
용사는 마음에 의미 모를 고통이 더 강해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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