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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파멸을 불러온 자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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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께서 빛을 만드실 때 어둠도 같이 만드셨건만, 어둠이 사라지면 빛은 빛으로 남을 수 있는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난공불락의 성은 매캐한 연기를 잔뜩 흩뿌리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의 동화 속 이야기와는 다르게 데모니안(Demonian)과 마물들이 피를 뿌리며 학살당하고, 그들의 아이들을 구하려다 죽음을 맞이한다.
동화 속 선량한 피해자 역할은 언제나 휴미안(Humian)들의 전유물이었건만, 오늘 검을 휘두르고 창을 찔러 대지에 소름 끼치는 붉은 강을 만드는 것은 휴미안들이었다.
누가 휴미안을 선량하다 했던가!
전쟁이라고는 겪어 본 일도 없는 데모니안들을 철저히 파멸로 몰아넣는 탐욕스러운 정복자들.
노인을 때려죽이고, 여성을 겁탈하고, 남성을 베어 죽이고, 아이들을 불태웠다.
폭력에 반항하는 이들에게는 죽음을! 항복하는 이들에게는 노예의 낙인을!
행복과 미소가 가득하던 성은 비참한 애원과 고통의 신음, 죽음의 단말마만이 가득 차 있다.
싱그럽고 달콤한 내음이 좋았던 과일 가게, 노동을 마친 아버지들이 모여 웃으며 회포를 풀던 주점, 사랑하는 이들이 얼굴을 붉히며 찾던 화원, 음유시인들의 음악과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이 꿈을 키웠던 광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화마에 집어 삼켜져 사라지고 있다.
이곳은 데모니안들의 나라 헤모니겐트(Hemonigent)의 심장, 마왕성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아, 안돼!! 그녀를 놔 줘!!!”
데모니안 남자는 휴미안의 병사들에게 제압되어 얼굴이 바닥에 처박힌 채, 자신의 연인이 고통받는 모습을 피눈물 흘리며 지켜보고 있다.
휴미안의 병사들은 그녀의 뿔을 톱으로 잘라내고 있다.
탐욕에 번들거리는 그들의 눈에 그녀의 뿔은 돈이 되는 물건일 뿐이고, 고통에 못 이겨 악을 쓰다 목에서 피를 토하던 그녀는 사람도 뭣도 아닌 가축일 뿐이었다.
그녀의 뿔 한쪽이 다 잘려 바닥에 툭 떨어졌다.
뼈를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의 고통 속에서 그녀의 눈은 생기를 잃고 공허함만이 남았다.
수차례의 기절이 반복되면서 정신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작작 하고 가자! 명령대로면 벌써 내성을 포위하러 갔어야 했다고!”
“데모니안 뿔이 얼만 줄 알기나 하냐! 어차피 빛나는 건 높으신 분들이 다 쓱싹 하실 텐데, 우리 같은 것들은 이런 거라도 주워야지 봉급만 받고 해 먹겠냐고!”
“그것도 그렇긴 하네! 카하하하하!!”
스걱
그 잡담을 끝으로 휴미안군 십인대는 모조리 목이 달아났다.
코르니움의 검은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마왕의 직속 기사단, 블랙 나이트.
그 블랙 나이트의 단장이 단원들도 없이 혼자 나타나 십인대를 처치했다.
속박이 없어지자 데모니안 남자는 자신의 연인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눈은 뜨고 있으나 반응이 없는 여인.
그저 몸을 작게 떨고 있을 뿐, 시선은 먼 허공으로 흩뿌려질 뿐이다.
“쓰레기들…….”
블랙 나이트의 단장은 연인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남자의 모습에 이를 악물고 휴미안군의 시신을 걷어찬다. 겉으로는 냉정하나 격정이 끓어오르고 있다.
쿠우우우우웅!!!
둔중한 무언가가 지면을 뒤흔들며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그와 동시에 대량의 흙먼지가 도시를 뒤덮을 듯이 휘몰아쳤다.
들고 있던 코르니움제 카이트 실드로 연인들의 앞을 막아주는 단장.
잠시의 돌풍이 끝나고 시야가 확보되자 고개를 들어 진원지를 파악했다.
하늘 끝까지 솟은 듯한 거대한 마력의 장벽이 나타났다.
단장은 이 익숙한 마력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주군…….”
“단장인 당신이 여기 계시면 마왕님은 누가 지켜드리고 있습니까!?”
정신을 차린 데모니안 남자는 단장에게 사색이 되어 물었다.
그레이트 헬름을 착용했기에 단장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당혹감이나 위기감, 혹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목소리만은 몹시 단호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당신은 그 여인을 데리고 마력 장벽 너머로 피신하십시오. 당신이 걱정해야 할 것은 그것뿐입니다.”
남자는 이윽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단장을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건넨 뒤, 연인을 안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단장 또한 다른 주민들의 대피를 돕기 위해 급히 자리를 떴다.
격렬히 떨려오는 호흡을 있는 대로 억눌러가며.
찬란한 위세를 과시하던 마왕의 옥좌.
마왕은 신하나 호위 하나 없이 홀로 그 옥좌에 앉아 수정구슬 하나에 마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나마 있던 가고일 호위들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치잇, 귀찮게 하긴.”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거구의 근육질 남성이 가고일의 잔해를 걷어차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박살나서 돌무더기가 되어버린 가고일들과 반으로 깨끗하게 나누어진 코르니움의 가고일 하나.
옥좌의 방까지 도달한 이들은 당당히 옥좌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마왕은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수정구슬만을 바라보며 마력을 불어넣고 있을 뿐이었다.
마왕, 네로멜티아 디 이시스(Neromeltia de Isis).
역대 최강의 마왕이라 칭송받는 데모니안 여성.
마왕을 처단하기 위해 신탁을 받은 용사 일행이 목전에 당도했으나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신왕의 용사로 선택된 흑갈색 머리의 휴미안 소녀는 복잡한 심경을 담아 조용히 마왕을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강대한 힘이 차가운 날붙이 따위로 피부를 긁는 것처럼 섬뜩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차라리 하나의 재앙이라 해도 좋을 거대한 힘이 강렬히 응축되어있는 느낌.
강대한 그 힘은 자신의 동료들쯤이야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버릴 수 있다는 확신마저 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강대한 힘을 가진 마왕이건만 수정구슬에 마력을 불어넣는 일 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성녀는 일행들에게 축복을 걸어주고, 현자는 매복이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동료들.
신왕의 용사는 마왕을 처단하기 위해선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마왕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전투에 대한 거부감이 진득하게 퍼져 나간다.
그것은 단지 상대가 강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대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용사의 동료들은 마왕에 대한 두려움이라곤 작은 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중 전사와 중장기사는 앞으로 걸어 나오며 이죽거렸다.
“마왕이라고 하길래 무섭게 생겼을 줄 알았더니 반반하잖아?”
“예쁜 마왕 아가씨가 부하도 없이 혼자서 뭘 하고 계시는 걸까? 키하하하하하!!”
현자는 마력을 탐색하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동료들에게 바로 사실을 알렸다.
“저 마법구를 통해 마왕성을 나누는 마력 장벽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저걸 부숴야 우리 군이 마저 진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그럼 아가씨한테는 미안하지만… 실례 좀 하겠다!!!”
중장기사가 거대한 타워 실드를 앞세우며 돌진했다.
두꺼운 강철판으로 만든 풀 플레이트 아머와 거대한 타워 실드를 들고 달려드는 중장기사의 거대한 신체는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강렬히 지면을 흔들었다.
마왕은 마법구에서 손을 떼진 않았으나 지금까지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들고,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중장기사를 한 번 쏘아보았다.
콰아아앙!!!
“허윽…!!”
마왕의 눈이 한순간 빛나지 않았나 싶었는데 순식간에 중장기사의 타워 실드가 우그러지듯 박살나며 그의 신체가 한순간에 뒤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중장기사의 뒤에서 전사가 뛰어올라 마왕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마왕의 눈은 다시 한번 빛을 발했으나 전사는 어깨를 힘껏 틀어 그 폭발을 피해낸 후, 기세를 줄이지 않고 마왕을 향해 전력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공중에서 몸을 힘껏 틀어 날리는 강한 참격.
생명의 마나인 비타나(Vitana)를 가득 모아 만든 마나소드가 타오르는 듯 발동되어 마법구를 향해 쇄도했다.
카아아앙!!
마왕은 마법구에서 오른손을 떼어 전사의 칼날을 막아냈다.
칼날을 잡은 마왕의 손에 맺혀져 강대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마력.
마왕과 그 권속들이 사용하는 마나 루이나(Ruina)가 전사의 마나소드와 맞닿아 스파크를 튀기며 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맨손과 검의 부딪힘이라기에는 검이 불안하게 떨려오는 것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모두의 앞에 바로 드리워졌다.
콰창!!
“크으으윽…!!”
전사의 바스타드 소드가 산산이 부서지며 금속 조각이 사방에 비산했고, 전사는 마나소드가 깨진 것에 타격을 입어 피를 토하며 급히 후방으로 물러섰다.
본래 적의 마나소드가 깨지고 심장에 타격을 입으면 바로 추격해서 적의 목을 따는 것이 전장의 상식이었으나, 마왕은 전사의 목에 관심이 없는 듯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전사가 회복 포션을 마시며 성녀에게 치유를 받는 동안 마왕은 다른 이들을 경계하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마법구에서 떨어져 있던 오른손을 다시 마법구에 갖다 대는 것으로 양손을 다시 마력 장벽의 유지에 사용했다.
밖에서는 마왕이 친 마력 장벽을 두드리는 휴미안군 마도거병들과 마법 무기들의 굉음이 가득 울리고 있었다.
용사는 마왕이 왜 필사적인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고뇌하며 조용히 마왕을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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