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화 〉 앙코르 : 나와 선생님의 신혼여행(4)
* * *
선생님과 난 아주 잠시 호텔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미 충분히 잘 만큼 자서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은 기가 빨렸다며 골골거렸기에 필요한 시간이었다.
우린 호텔을 나서 식당에 들러 코스요리를 즐겼다.
“음~ 좋네요.”
“이렇게 먹으니까 아침이랑 저녁은 가볍게 먹는 문화겠지.”
“이미 들어서 알거든요?”
“그래그래.”
선생님은 여행을 간다고 하면 항상 이렇게 준비했었지.
진수랑 놀아주기 위해서 책으로 스포츠를 배우는 게 선생님이다.
나중에 실제로 보면 의외로 그럴싸한 정보가 나오니까 무시하지 못하겠지만….
점심 식사를 마친 우린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이미 가족여행으로 다녀왔던 곳이라 갈 필요가 있나 싶기는 했지만 역시 가족여행으로 오는 것과는 다를 것 같았으니까.
선생님과 팔짱을 끼고 콜로세움으로 향하니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였다.
AI가 2할 정도고 나머지는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제법 사람들이 있네.”
“그러게요.”
VR 게임으로도 올 수 있는 곳인데 굳이 우리처럼 비행기를 타고 넘어오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우리처럼 이곳을 아예 새로운 세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은 혼자인 사람은 손에 꼽았다.
대부분 남녀의 커플이었고 가끔 가족 동반으로 보이는 일행도 있었다.
“추억 때문에 찾아온 것 같네요.”
“그러게.”
다들 웃으며 사진을 찍고는 있지만, 어딘가 새로운 무언가를 구경하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이미 다녀왔던 곳을 다시 방문해서 그때의 그 추억을 입에 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도 여기에 있는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미 방문한 적이 있는 곳이면서도 다시 방문해서 걸었던 길을 또 걷는다.
“여긴 야경이 진짜 좋았는데.”
“그랬죠.”
진수와 희진이도 야경은 마음에 들었는지 웃고 떠들던 기억이 난다.
우린 주변을 조금 더 둘러보다가 포로 로마노로 향했다.
“여기 배경이 한 40~50년대쯤이지?”
“네.”
“근데도 우리가 왔을 때랑 별 차이가 없단 말이지.”
배경이 달라진 것도 없고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입장권을 세트로 파는 것도 그렇고….
선생님은 그리 말하며 주변을 멍하니 둘러봤다.
선생님의 말대로 여긴 우리가 다녀갔던 그대로였다.
그러니 이곳에 있던 사람들도 주변을 둘러보며 구경하는 것보다 근처에 있던 사람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던 거겠지.
몇십 년이나 지나 다시 찾아왔지만 처음 찾아왔을 때의 그 감동은 없었다.
그래도….
“이건 좋네.”
선생님과 단둘이서 로마를 여행하는 건 좀 특별한 느낌이었다.
선생님과 포로 로마노를 걷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난 선생님의 팔을 살포시 놓고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수진아?”
선생님은 왜 그러냐며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다가 내가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시늉을 하자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곤 슬며시 내 근처에 앉아 내게 어깨를 빌려줬다.
난 잠시 그렇게 눈을 감고 있다가 슬쩍 눈을 뜨며 선생님을 바라봤다.
“너무 아름다워서 공주님인 줄 알겠어.”
“풉!”
선생님은 분위기라도 살리고 싶었는지 연극을 하는 듯한 어색한 어조로 아부를 했다.
하지만 조금 아재답게 입은 18살 남고생의 느끼하게 그런 연기를 한다는 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무언가다.
“그렇게 웃는 거 보니까 공주님은 아니겠네.”
선생님은 내가 너무 심하게 웃는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진짜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난 한참이 지나고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후우…. 그러게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예요?”
“그런 분위기여서?”
선생님은 관광지에 왔으니 그런 것 같다며 웃었다.
우린 한동안 웃으면서 다시 추억을 늘어놓았다.
늙어갈수록 추억을 입에 담는 빈도가 늘어난다고들 하던데 딱 그 모양이었다.
우린 다시 팔짱을 끼고 트레비분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트레비분수에도 제법 관광객의 숫자가 있었다.
제법이라고 해봐야 10명 정도였지만 에덴에 사는 사람의 수로 비교해보면 상당히 많은 숫자겠지.
그들은 뒤로 돌아 동전을 분수로 던져넣고 있었다.
“트레비분수의 그건 미신이 아니었네.”
“뭐가요?”
“다시 여기로 왔잖아.”
“아~”
그러고 보니 트레비분수엔 그런 전설이 있었지….
트레비분수에서 동전을 던지면 나중에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
우린 수십 년 전에 이곳에 와서 동전을 던졌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다시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아서.
우린 딱히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찾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해.”
선생님은 그리 말하며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뭐가 미안해요?”
“꼭… 오자고 했는데….”
선생님은 그저 미안하다고 할 뿐이었다.
우린 언제든지 올 수 있었다.
언제든지 올 수 있었는데… 이제서야 오게 되었다.
진수의 수능이 코앞이다.
진수가 사고를 쳐서 결혼을 해야 한다.
희진이의 수능이 코앞이다.
우리 손주를 돌봐줘야지.
희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결혼한다.
그런 이유로 미루고 미뤄서 우린 결국 이곳에 대한 약속을 잊었다.
이곳은 우리에게 있어 우선순위가 낮은 곳이었으니까.
선생님이 하는 사과는 아마 그런 거겠지.
날 한 가정의 어머니로만 여기지 않겠다고 지금까지 ‘수진이’라고 불러주는 선생님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정을 우선하는 바람에 내게 못다 한 일이 눈에 밟혀서 미안하다는 거겠지.
선생님은 내게 최선을 다했다.
하루에 1번은 꼭 사랑한다고 말과 함께 부드럽게 입을 맞춰줬다.
어디에 나가면 꼭 내가 좋아하는 먹거리나 선물을 사 왔다.
그런데도 내게 미안하단다.
도대체 선생님은 내게 얼마나 더 열심히 하려는 걸까?
“이제라도 왔잖아요? 전생에 못다 한 일이 있으니까 여기서도 즐기고 하는 거지.”
나는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고 태연하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나보다.
“그래….”
선생님의 잠긴 목소리는 분명 아까보다 더 축축해져 있었으니까.
우린 그렇게 한동안 분수에 서 있었다.
분수에서 튄 물이 조금 선선해진 가을바람에 마를 때까지….
***
늙으면 눈물샘이 느슨해진다는데 이럴 때마다 나이를 먹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나와 선생님은 서로를 마주보기 민망해서 근처에 앉아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대략 1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우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이번엔 스페인광장이지.”
“네.”
선생님이 내민 손에 깍지를 끼고 천천히 스페인광장으로 향한 우린 뜻밖의 가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젤라토 가게네.”
젤라토 가게였다.
분명 우리가 왔을 땐 젤라토 가게가 사라지는 바람에 멀리서 젤라토를 사와 분위기만 흉내 내고 그랬었는데….
여긴 진짜로 스페인광장에 젤라토 가게가 있다.
이게 현실과 이쪽의 차이겠지.
분명 젤라토 가게가 사라진 이유는 위생 문제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관광객이 여기서 젤라토를 사 먹고 쓰레기를 길가에 버리니 가게를 치워버린 거지.
하지만 여긴 그렇게 더럽힐 사람도 없고 더럽혀도 AI가 치우는 시스템이니 이렇게 해둔 것 같았다.
“가자.”
선생님은 아까와는 달리 환한 미소를 지은 채 가게를 향해 걸어갔다.
“무슨 맛으로 먹을래?”
“전 딸기로.”
“그럼 난 무난하게 초코로 해야겠다.”
나와 선생님은 젤라토를 사서 스페인광장에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자, 여기에 앉아.”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내 자리에 깔아줬다.
“그럼 선생님은 이거 쓰세요.”
“난 남자니까 상관없어.”
“그럼 여긴 VR 세계라서 별로 상관없는 거 아니에요?”
“오늘 하루는 내 공주님이니까 신혼 시절처럼 해줘야지.”
바보.
난 선생님의 배려를 감사히 받기로 했다.
10월이라 제법 선선한 공기가 감도는 이탈리아의 로마.
우린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젤라토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걸 여기에서 하게 될 줄 몰랐네.”
“그러게요.”
영화는 영화에 불과하다며 아쉬워했던 기억이 났다.
나도 선생님도 뭔가 젤라토를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조금 먹다가 진수와 희진이한테 줬었지.
나름 기대를 한 상태로 왔다가 현실을 접했을 때의 그 묘한 실망감이 떠올랐다.
“여기도 이런 건 진짜 좋단 말이지.”
선생님은 젤라토를 먹으며 웃었다.
이곳이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있다면서.
난 선생님의 귀에 입을 붙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루에 10번씩 싸고 그러는 것도 가능하죠.”
난 그리 말하곤 선생님의 귀를 살짝 핥았다.
선생님은 앉은 채로 몸을 움찔거리며 나를 노려봤다.
“그렇게 도발해서 되겠어?”
“텅알이 되었는데 어쩌시려고?”
선생님은 밤에 두고 보라며 젤라토를 거칠게 씹어먹었다.
도대체 선생님에게 밤일이란 뭘까…?
내가 자극하긴 했는데 하루에 10번이나 싸도 또 하고 싶어지는 걸까?
좀 두렵다.
나와 선생님은 그 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가족여행으로 왔던 이야기가 주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앞으로의 계획에 관한 이야기가 주류가 되었다.
현실과는 미묘하게 다른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점점 기대감이 샘솟기 시작했다는 거겠지.
“저녁 먹으러 가자.”
“네.”
노을이 지고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됐다.
우린 근처의 가게로 향해 가벼운 저녁을 즐겼다.
저녁을 먹은 우린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역시 여긴 야간에 와야 한다니까.”
“그러게요.”
콜로세움은 선생님의 말처럼 낮보단 밤이 더 예뻤다.
우린 그걸 멍하니 바라보며 다시 추억을 입에 담았다.
“그때는 사람이 많았는데.”
좀 어두워지고 사람이 많아 아이들이 미아가 되면 큰일이라 생각해서 그리 즐기진 못했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은 진수를 나는 희진이를 꼭 잡고 있었지.
선생님은 멍하니 콜로세움을 바라보다가 내 어깨를 살짝 안아왔다.
“선생님?”
“신혼초야니까 기대해.”
우리 신혼초야는 비행기였는데요?
그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초롱초롱한 눈빛을 한 선생님에게 굳이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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