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화 〉 앙코르 : 나와 선생님이 2회차를 살아가는 방법♥(21)
* * *
뭔가 조금 소란스럽다는 생각에 눈을 뜨니 옆에서 느껴져야 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선생님이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난 놀란 가슴을 손으로 누르고 진정시켰다.
이 세계가 꿈이 아닌 현실이란 건 이제 알겠다.
이 생생한 감촉이 꿈일 리는 없지.
그런데도 이 세계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만약 아침에 눈을 떴는데 이 모든 게 다 꿈이고 선생님이 내 곁에 없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피어오른다.
나이를 먹으면 겁쟁이가 된다더니….
“어, 일어났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미인인 아내가 신경 쓰여서 잘 못 잤지.”
“네~네~”
참 한결같은 사람이야….
선생님의 근처엔 진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선생님 혼자서 밥을 차리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서 거들고 있었던 것 같다.
식탁에 식기를 놓는 모습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나서 흐뭇한 기분이 됐다.
진수도 선생님을 닮아서 그런지 참 한결같다.
선생님은 좀 안 좋은 의미로도 그렇지만 진수는 좋은 의미로만….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진수도 잘 잤니?”
“예.”
“가서 세수하고 와.”
“네~”
세면장으로 향해 세수를 마치고 돌아오니 어느새 식탁에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나 요즘 너무 게을러진 게 아닐까?
요즘 계속 선생님만 아침을 차리고 있는 거 같은데.
그렇게 좀 복잡한 심경으로 자리에 앉으니 눈을 비비며 좀비처럼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녀석이 보였다.
희진이였다.
너도 참 한결같구나, 이 화상아.
그리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자리에 앉아 식탁에 차려진 것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된장과 쌈장을 넣어 만든 된장찌개, 베이컨 에그, 돌김에 밥.
선생님도 일어난 지 얼마 안 됐구나.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급하게 만들었구나.
선생님이 서둘러서 아침을 준비하는 모습이 생생히 그려졌다.
“자, 먹자.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바비큐는 좋았다.
잘 익은 고기는 육즙이 살아있었고 채소들은 이상할 정도로 단맛이 났다.
쌈을 싸 먹어도 좋았고 그냥 먹어도 맛있었다.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더 좋다고 하면 선생님은 상처받을까?
이 어느 가정에나 있을법한 간편한 아침 밥상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이 된다.
마치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되찾는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진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온화해졌다.
“오, 역시 집밥이지. 바비큐는 너무 많이 먹어서 좀 물렸는데 말이야.”
동감이에요.
밥을 깨작깨작 먹던 희진이가 점점 먹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끓인 된장찌개를 혼자 먹어버리겠다는 듯이 몇 번이고 수저를 놀렸다.
“역시 아빠 된장찌개야….”
반쯤 감았던 눈을 뜬 희진이는 웃으면서 된장찌개와 밥을 비벼 먹기 시작했다.
“된장찌개만 수십 년을 끓였으니까.”
“아, 그러네? 완전 장인이네?”
“그렇지.”
“아하하!”
그저 아이들이 2명 추가 됐을 뿐인데도 아침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걸까?
선생님과 좀 부끄러운 부부관계를 맺은 다음 날 아침.
우린 서둘러서 정사의 흔적을 지우고 아침을 먹었다.
아침은 핫 샌드위치.
나와 선생님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다음날 먹었던 메뉴다.
그래서 분명 맛있고 온화한 기분이 들었어야 했는데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해 씹는 기분이었지.
어쩌면 선생님이 그렇게 내게 짐승처럼 달려들었던 건 내가 아침에 느꼈던 그 공허함을 잊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 공허함은 위험하다.
2030의 젊은 사람들이라면 이 세상을 새로운 삶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린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곳을 삶의 연장으로 생각해버리고 만다.
그러니 새로운 삶에 미련이 없어지면 끝이 다가오는 것이다.
내게 있어 미련은 선생님과 아이들이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난 앞으로도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
“엄마.”
열심히 된장찌개와 밥을 비벼 먹던 희진이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왜?”
“아빠랑 엄마는 재혼할 거야?”
“응?”
갑자기 무슨 소리인 걸까?
“엄마랑 아빠는 여길 삶의 연장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여긴 2회차 인생이나 환생 같은 느낌이잖아.”
“그래서?”
“엄마랑 아빠가 또 결혼식을 올릴까 싶어서.”
“결혼식… 으음, 어차피 올 사람도 없는데?”
솔직히 결혼식은 상당히 귀찮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을 때는 아주 잠깐 즐거웠는데 그 준비와 뒷정리는 정말 끔찍했다.
웨딩드레스를 입기 위해 운동하고 식단을 조절하며 피부관리를 위해 전문 케어샵을 다녔다.
즐거웠지만 피곤했지….
선생님이 웨딩드레스를 입을 때 머리를 틀어 올리면 고생한다고 해서 머리는 그냥 생머리로 했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야 그게 정답임을 알았다.
희진이가 결혼식을 올리고 보내온 카톡을 봤으니까.
왠지 웃음이 나왔다.
“왜 그래, 엄마?”
“네가 결혼식을 올리고 보냈던 카톡이 떠올라서.”
“아….”
희진이는 머리에 핀을 몇 개나 꽂았는지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다는 카톡을 보냈었다.
옆에서 남편이 같이 뽑아주고 있는데 첫날밤은 머리에 꽂힌 핀을 뽑는데 전부 써버릴 것 같다고 투덜거렸었지.
“여긴 그래도 몸매 관리라든가 그런 거 고민할 필요는 없잖아?”
“음, 그렇긴 한데….”
난 선생님의 눈치를 살폈다.
결혼식은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게 아니니까.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이면 웨딩 촬영도 다시 하자.”
선생님은 흥미진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결혼식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알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 없이 툭 던지듯이 말해요?
귀찮으니까 하지 마요.
그런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말을 삼켰다.
선생님은 결혼식만 ‘두 번’을 올린 사람이니 나보다 더 잘 알겠지.
그런데도 결혼식을 하자는 건 분명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겠지.
난 결국 선생님의 말에 따라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이제 엄마와 아빠의 결혼식을 라이브로 볼 수 있는 건가? 좋네!”
생각해보면 희진이는 나와 선생님의 결혼사진을 몇 번이고 바라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었지.
본인도 이렇게 아름다운 신부가 되고 싶다고 그랬었지.
아직 아이였던 희진이는 그렇게 귀여웠는데 어쩌다가 이런 화상이 됐을까?
“엄마.”
“왜?”
“무슨 생각해?”
“결혼식 생각.”
“아, 역시 엄마도 여자구나?”
이 얄미운 주둥이를 어쩌면 좋을까?
“내게 수진이는,”
“응?”
밥을 다 먹고 물을 마시던 선생님은 희진이를 살짝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나 사랑스러운 여자야.”
“으윽.”
희진이는 여기서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 몰랐는지 얼굴을 조금 붉히곤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다.
모르긴 몰라도 희진이가 느끼고 있을 부끄러움에 3배 이상은 부끄럽다….
선생님은 본인이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얼굴을 긁적이고 있다.
그럴 거면 말하질 말지!
그리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부끄러워 보이면서도 할 말은 했다는 듯한 느낌의 만족감을 내비치고 있다.
이 사람이 진짜….
“와, 와우~ 아빠도 정말 한결같네.”
“그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
선생님은 아예 가슴까지 펴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오히려 당당하게 선언하고 나니 부끄러움이 가셨는지 볼에 떠올랐던 홍조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난 선생님과 희진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결혼식이라.
결혼식에 부를 사람은 없다.
양가의 부모님을 부를 수도 없다.
결혼식이 맞긴 한가?
그래도 웨딩드레스 정도는 한 번 더 입어보고 싶긴 하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을 봤을 때 선생님이 지어 보였던 그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니까.
넋을 잃은 느낌으로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이 참 귀여웠었지….
많이 부족한 결혼식이겠지.
하지만 진수와 희진이가 참석할 테니 조금은 특별한 결혼식이 될 것 같다.
“그럼 결혼식 하는 거지?”
“좋지.”
그렇게 우린 뜻하지 않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
아침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하고 있으려니 선생님이 날 뒤에서 살포시 끌어안았다.
“수진아.”
“왜요?”
“괜찮겠어?”
“결혼식이요?”
“어. 뭔가 재밌을 것 같아서 바로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싶어서.”
“그걸 이제서야 물어보는 거예요?”
“미안. 뭔가 너랑 또다시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니까 기뻐서.”
“바보.”
“싫어?”
“저도 좋아요.”
선생님과 함께 살고는 있지만 우린 법적으론 부부가 아니다.
이미 죽는 그 순간에 혼인신고서의 효력은 사라지니까.
그러니 결혼식을 올리며 우리가 다시 부부가 되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싶었다.
이 세상은 진짜고 우린 연인이 아닌 부부가 되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다행이네.”
선생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어깨에 턱을 올리고 내 뺨에 뺨을 문질러댔다.
전생이라면 수염 때문에 따갑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뭔가 귀엽고 사랑스럽다.
조금 더 이렇게 있고 싶다.
그리 생각하고 있으려니 선생님이 뺨을 떼고 내게서 거리를 뒀다.
아무래도 내가 설거지하는 데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조금 아쉽다는 소리를 꺼내 볼까?
아니, 아니야.
애들도 있는데 그건 좀.
그리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선생님이 내 옆에 서서 세제가 묻은 식기를 씻기 시작했다.
“함께하면 빨리 끝나잖아.”
“…네.”
뒤에서 안아주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어깨가 맞닿는 위치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으아, 진짜 설탕이 따로 없네.”
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빤히 지켜보고 있었는지 희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이 화상은 분위기 깨는 데는 정말 도가 텄구나.
누가 보라고 했니?
진수처럼 저렇게 조용히 앉아서 TV나 보면 얼마나 좋을까?
어떻게 이런 화상이 내 뱃속에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보기 좋네.”
“하나만 해, 이 화상아.”
“아, 왜~”
이제 곧 80을 바라보는 나이인 녀석이 이러니 소름이 끼친다.
선생님은 120살이라는 걸 아는데도 귀여운데 얜 왜 이럴까?
그리 생각하고 있으려니 선생님이 희진이에게 물을 뿌렸다.
“아! 뭐 하는 거야?!”
“자꾸 내 여자 괴롭힐래?”
“…우웁!”
희진이는 도저히 못 참겠다며 바닥을 쿵쿵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그 모습이 묘하게 통쾌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