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 앙코르 : 나와 선생님이 2회차를 살아가는 방법♥(8)
* * *
뭔가 허전한 느낌에 눈을 뜨니 선생님이 없었다.
갑자기 정신이 팍 드는 느낌이라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둘러보니 벽에 걸린 시계는 이미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코에 맡아지는 이 향긋한 냄새는 부엌에서 나는 냄새다.
놀래라….
선생님이 먼저 일어나서 요리하고 있구나.
선생님이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해서 가슴이 옥죄는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야.
고양이 세수를 마치고 조심스럽게 거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한창 요리를 하는 중이던 선생님이 눈에 들어왔다.
“잘 잤어?”
“…네.”
못 잤어요.
어제 그렇게 괴롭힌 사람이 그런 걸 물어보는 걸까?
“못 잤다는 표정인데?”
“선생님이 괴롭혔잖아요?”
“너도 즐겼으면서… 가서 세수나 하고 와.”
“고마워요.”
“우리 부인은 아침잠이 많으니까 어쩔 수 없지.”
내가 아침잠이 많은 게 아니라 선생님이 너무 쌩쌩한 거거든요?
어떻게 밤새 그렇게 괴롭힌 사람이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지.
이 세계가 VR세계라서 그런 걸까?
하지만 난 이렇게 피곤하고 졸린데….
세수하려고 하니 몸이 묘하게 끈적거려서 불쾌했다.
분명 어제 가슴에 펴 바른 러브젤과 선생님의 정액 때문이겠지.
이건 세수가 아닌 샤워를 해야 할 것 같다.
쏴아아아.
조금 미지근한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있으려니 멍하던 머리가 점점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개운해지니 어젯밤에 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제도 선생님은 참 뜨거웠다.
어쩌면 내게 질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정말 짐승 같았지….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아침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으면 선생님은 분명 눈치채고 그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날 놀릴 테니까.
어쩌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짓무른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
…나쁜 건 아닌데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난 선생님처럼 그렇게 음.
생각하지 말자.
샤워를 마치고 기초 스킨케어를 한 다음 거실로 향하니 식탁에는 핫샌드위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왠지 만들고 싶어져서.”
핫샌드위치 옆에는 아메리카노도 놓여있다.
그리운 기분이다.
나와 선생님이 첫날밤을 보낸 다음 먹었던 요리.
뭔가 부끄러운 기분이라 얼굴을 마주보기 힘들면서도 눈이 마주치면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오르던 그때가 떠올랐다.
“잘 먹겠습니다.”
“어. 나도 잘 먹겠습니다.”
선생님과 마주 앉아 핫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핫샌드위치는 그날 먹었던 그 핫샌드위치와 똑같은 맛이 났다.
내 앞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선생님의 얼굴이 그날의 그 모습으로 보였다.
38살이면서 묘하게 어린애처럼 수줍은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먹던 그때의 그 모습으로.
“왜 그래?”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그걸 노리고 만든 거야.”
“그랬을 거 같아요.”
어제 장을 봐서 냉장고에 재료도 많았을 텐데 굳이 그날 먹었던 그 재료로 만들었으니까.
“참 신기하단 말이지.”
“뭐가요?”
선생님은 먹고 있던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때보다 성숙해졌고 가슴도 커져서 섹시한데 그때 그 모습으로 보인단 말이지.”
“아침부터 성희롱이에요?”
“가슴이 큰 건 팩트잖아?”
아침부터 가슴가슴 하는 게 정말 선생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기뻐해야 하는데 뭔가 미묘하게 다른 기분이다.
“표정이 왜 그래?”
능글맞은 표정으로 히죽거리는 걸 보아하니 알면서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
참 한결같은 사람이야.
날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나?
…재밌겠지. 나도 선생님을 조루라고 놀리고 발끈한 표정을 보는 걸 즐기니까.
좀 젊었을 때의 우린 언제나 이런 느낌이었다.
진수와 희진이가 태어나면서 이런 시간이 줄어서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선생님은 예전보다 더 상냥하고 부드러워졌으면서도 어딘가 그때 그 느낌이 묻어나왔다.
의식적으로 그때를 떠올리며 행동하는 걸까?
“아침 먹고 나면 잠깐 드라이브라도 나갈까?”
“드라이브요?”
“어.”
“좋아요.”
우린 서둘러서 식사를 마치고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
“역시 언제봐도 위화감이 드네요.”
“어차피 운전은 AI가 할 텐데 뭘.”
선생님이 안전벨트를 매고 운전석에 앉은 모습이 영 꺼림칙하다.
일단 겉모습이 18살이니까….
“사실은 좀 더 신혼을 만끽하고 싶었어.”
선생님은 운전대를 잡고 앞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동차는 AI가 운전하는 거라 운전대를 잡을 필요도 시선을 전방으로 고정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말이다.
이젠 알겠다.
담아둔 마음을 털어놓으려고 하니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죠?
귀여워~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말이야. 다들 처음엔 행복하다고 했었거든.”
선생님은 그때 당시를 떠올리고 있는지 조금 멍한 표정이 되었다.
“아내랑 어디를 갔다 왔다느니 뭐를 먹었다느니 자랑을 하곤 했지.”
“부러웠어요?”
“나름 부럽기야 했지.”
“근데 선생님도 신혼생활 오래 했잖아요.”
“…미안.”
선생님의 얼굴에 땀이 살짝 떠오른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더 괴롭히고 싶어졌다.
이젠 옛날 일이지만 선생님은 유부남이었지.
나도 참 대단한 인간이야, 어떻게 유부남을 꾈 생각을 했을까?
“아무튼 꿈에 그리던 신혼생활이란 게 있다고.”
“그래서 지금 그 꿈에 그리던 신혼생활을 해보자~ 그런 거예요?”
“그런 겁니다, 부인.”
꿈에 그리던 신혼이라….
난 굳이 그런 걸 하지 않아도 되는데.
선생님과 보낸 모든 순간이 꿈을 꾸는 것 같았으니까.
물론 부끄러워서 말하진 못하겠지만.
선생님은 조금 도가 지나치는 때가 있었다.
특히 옆집에 누구였더라? 동료 강사님이 살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머리가 부글부글 끓는다.
그래도 그때 이후로 선생님은 굉장히 상냥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됐다.
내가 힘들다고 칭얼거리면 언제나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챙겨줘서 힘들다는 소리도 내기 힘들 정도였다.
이미 받을 만큼 충분히 받았는데 말이야.
그래도 저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기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겠지?
우리를 태운 차는 도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익숙한 곳.”
“해바라기?”
“오~”
선생님이 어떻게 바로 맞췄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무 뻔한 거 아니에요?”
“그런가?”
아침에 핫샌드위치를 먹고 옛날에 했던 일을 더듬고 있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맞추죠.
우리가 처음으로 좀 멀리 나갔던 곳은 부천을 제외하면 경기도에 있던 해바라기밭이니까.
“근데 이제 여름도 다 끝난 계절이라 해바라기는 없을 텐데요?”
“해바라기가 중요한 게 아니지.”
해바라기가 아닌 추억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
“그 추억도 이젠 없어졌답니다?”
“어흑 마이깟.”
선생님과 도착한 곳엔 해바라기가 아닌 다른 건물이 들어선 상태였다.
이곳은 2040~2050년대를 기준으로 재구성된 곳이다.
그러니 이런 사태가 벌어질 걸 예상했어야 하는데, 의욕만 앞선 선생님은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선생님이 착잡한 표정으로 눈앞에 들어선 건물을 올려다봤다.
“참 묘한 기분이야.”
“뭐가요?”
“세월이 참 야속하게 느껴지네.”
선생님은 눈앞에 들어선 건물을 살짝 노려보듯이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말이야.”
“시간이 시간이니까요.”
선생님은 터벅터벅 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뭔가 어깨가 축 늘어져서 상당히 기운이 없는 모습이라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렇게 충격이었던 걸까.
차에 올라탄 선생님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시간 낭비했네, 미안해.”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
“괜찮아. 괜찮은데 이 감각은 익숙해지지 않네.”
선생님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종종 이렇게 뼈에 사무칠 때가 있다.
이곳에 있던 해바라기밭은 나와 선생님이 처음으로 과감한 행동에 나선 곳이다.
나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외박을 했던 날이다.
집에 돌아가서 엄마에게 잔소리를 바가지로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님은 우리의 관계가 들키는 것을 염려해서 그 흔한 사진 한장 찍지 않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곳에선 처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아마 각오를 다졌던 거겠지.
이곳은 우리에게 있어 많은 것이 변화한 굉장히 특별한 장소다.
그 후로 아이들이 태어나서 오지 못했지만, 우리가 추억을 떠올리면 항상 거론되는 곳이었다.
그래, 이곳은 우리에게 있어 8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였다.
나도 내색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착잡한 기분이다.
마치 소중한 추억이 시멘트로 덕지덕지 덧칠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내가 나이를 먹었음을 실감한다.
언제나 이렇다.
내 가슴속엔 너무나 멋진 추억으로 남아있는데 막상 찾아가면 언제나 이렇게 변해있다.
선생님과 만나 소설을 쓰던 그 카페는 이제 없다.
그 전염병이 돌아 순식간에 망해버렸다.
선생님과 처음으로 일탈을 했던 이곳도 이젠 시멘트로 덧칠되었다.
아마 선생님과 처음으로 물놀이를 갔던 그 계곡도 더는 예전 같지 않겠지.
불쾌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이 젊고 탱탱한 피부가 급격히 늙어버린 듯한 착각에 빠졌다.
몸은 젊어졌어도 우린 아직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사람들인 걸까….
“음….”
선생님은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진수냐? 나다.”
진수에게 전화를 거신 것 같다.
“사진 좀 보내달라고. 1번 앨범, 어, 어, 아마 첫 장을 넘기면 나올 거야, 어, 그래, 그거. 고맙다.”
선생님은 지극히 사무적인 통화를 끝내고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왜요?”
“뭔가 씁쓸하긴 해. 아직도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있는데 이리 변해버리니 뭔가 가슴에 구멍이 뚫린 기분이야. 휑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저도요.”
“그래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젠 거 같여. 이런 방식도 있잖아?”
선생님은 언제 차에 실어놓았는지 모를 밀짚모자를 꺼내 들었다.
“가자.”
“네?”
선생님은 차 문을 열고 나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생각해보면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언제까지고 추억에 살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선생님은 그리 말하곤 어딘가를 빙빙 둘러보더니 나를 벽 근처에 세웠다.
“자, 이것도 쓰고.”
난 선생님이 건네준 밀짚모자를 썼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이 사진이랑 최대한 비슷하게 웃어봐.”
선생님은 그리 말하며 진수가 보내온 것으로 보이는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선생님이 처음으로 찍었던 내 사진이었다.
갑자기 웃으라고 해도….
뭔가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수컷이다. 너를 범하고 싶다.”
아.
“오, 좋네.”
나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거리자 선생님은 즐거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걸 꺼내 들다니 반칙이다.
선생님은 방금 본인이 꺼낸 말이 조금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살짝 붉힌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뭘 하는가 싶어 빤히 바라보니 조금 자랑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건….”
선생님이 내민 휴대폰엔 두 사진이 얼추 비슷하게 합성된 사진이었다.
왼쪽엔 19살 당시의 내가 오른쪽엔 지금의 내가 서있는 모습으로 합성된 사진이 말이다.
“언제까지고 추억에 살 필요는 없잖아.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말이야.”
선생님은 그리 말하며 내 근처에 서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생각해보니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잖아? 지금 다시 찍자.”
우린 선생님이 들어 올린 폰을 올려다보며 같이 사진을 찍었다.
선생님의 말대로다.
언제까지고 지나간 추억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지금의 우리는 지나간 추억 속에 살며 지나온 세월을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제부턴 새로운 추억을 쌓아갈 수 있으니까.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