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 앙코르 : 나와 선생님이 2회차를 살아가는 방법♥(4)
* * *
즐거운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은 여기나 전생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별로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도 벌써 석양이 지고 있었다.
“뭔가 시간이 빠르네.”
“그러게요.”
나와 선생님은 저녁을 먹고 집으로 향했다.
선생님과 막 사귀었을 땐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쉬웠었는데….
그래서 거짓말도 종종 해서 외박도 하고 그랬었지.
“결혼하면 이건 참 좋아.”
“뭐가요?”
“돌아가도 같이 있을 수 있는 거.”
선생님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야한 거 할 수 있어서?”
“꼭 그것만은 아니고.”
그것도 생각은 하고 있었구나?
선생님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집으로 향한 우린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그리곤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멍하니 TV를 바라보았다.
TV에선 여전히 이곳 ‘에덴’이라는 이름의 VR 세계를 홍보 중이었다.
당장 이곳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사람은 우리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이니 이런 쪽으론 상당히 보수적이겠지.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우리도 다 포기하고 살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다르진 않겠지.
이미 굳어져 버린 가치관을 뒤엎고 설득하기 위해선 이런 영상도 많이 필요하리라.
ㅡ 사후 관리 시스템, ‘에덴’의 신청자 수가 연일 증가하고 있다죠?
ㅡ 네. 그래도 일각에선 불안하다는 이야기는 계속 나오고 있는 추세입니다.
ㅡ 역시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겠죠?
ㅡ 네.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완전은 없으니까요.
패널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기본적으로 에덴을 신청하는 편이 낫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유도하고 있었다.
ㅡ 이걸 보시죠.
ㅡ 이건 뭐죠?
ㅡ 사고로 전신 마비가 온 환자분의 영상입니다.
TV에선 사지가 멀쩡한 사내가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ㅡ 이렇게 현실에서 몸이 좋지 않더라도 ‘에덴’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죠.
ㅡ 정말 멋지네요!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우리가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신청했을까?”
선생님은 TV를 멍하니 바라보며 그런 이야기를 꺼내셨다.
“으음… 글쎄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신청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라면 어땠을까?
“나도 긴가민가하네.”
선생님은 진수와 희진이한테 고마워해야겠다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다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전화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아니, 지금은 그만두려고.”
“왜요?”
선생님은 내 허리에 손을 뻗어왔다.
그 힘이 제법 강해서 몸이 딱 달라붙었다.
아, 그런 기분이구나.
선생님은 언제나 건강하다니까….
그리 생각하며 눈을 살짝 감으려고 하니 선생님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하조대에서 해돋이를 보면서 말이야.”
하조대?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네 말을 들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런 생각이요?”
“음, 어… 우리가 애를 좀 빨리 낳기는 했어. 진수도 사고 쳐서 결혼했고.”
“으응?”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하는 걸까?
난 선생님의 말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선생님은 뭔가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는듯한 느낌으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수랑 희진이는 소중해. 지금, 이 순간에도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되고. 근데 말이야… 이런 생각도 들긴 해.”
선생님은 그리 말하며 나를 빤히 바라보셨다.
“내가 나이도 있어서 애를 빨리 낳은 거기도 한데 그래서 부부의 시간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 말이야.”
아이란 특별한 존재다.
두 사람의 사랑의 결정체며 우리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살았다는 증거가 된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힘을 내게 된다.
소설을 쓰다가 전개를 막혀도 아이들을 보면 힘이 났다.
“그래서 혹시 네가 외롭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선생님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엔 너무나 늦은 나이였다.
하다못해 30대 초반이나 중반이었으면 몰라도 후반은 많이 늦은 감이 없잖아 있기는 했다.
선생님에겐 진수가 늦둥이 같은 느낌이지 빠르다는 감각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막 대학교들 들어갔던 나이였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한창 즐길 나이에 엄마가 됐으니까.”
그러니 이번 생은 최대한 나를 우선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오늘따라 선생님이 너무 치사한 것 같다.
자꾸 이렇게 가슴을 간질거리는 말을 해와서 얼굴에 열이 오른다.
나도 모르게 선생님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은 기분이 든다.
난 선생님의 가슴에 슬쩍 손을 얹고 약간 말라서 갈라진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선생님.”
“응?”
“선생님은 100점짜리 아빠였고 100점짜리 남편이었어요.”
“그으래?”
선생님이 조금 장난스러운 표정이 되어 내 뺨을 쓰다듬다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럼 지금은?”
“으응~ 120점짜리 남편?”
“뭐냐 그게?”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하고 짧게 웃고는 내 머리에 손을 얹어 머리를 헝클였다.
“하지마요.”
기껏 세팅했던 머리가 엉망이 됐다.
바보.
“희진이 말대로 한동안 둘이서 못 해봤던 것도 좀 해보고 그러자고.”
“네.”
이 세계는 우리를 두고 가버리던 그런 세계가 아니다.
여기라면 정신없이 살아가느라 놓쳤던 추억이라는 이름의 발자취를 다시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자자.”
선생님은 TV를 끄곤 안방으로 향해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곤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얼른 와서 누르라는 신호를 보냈다.
방의 불을 끄고 침대로 향하니 선생님은 그대로 나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곤 사랑한다는 말을 꺼냈다.
“잘자.”
그리곤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응?
…어째서?
어제만 해도 그렇게 난리가 날 정도로 날 갈구하더니 오늘은 왜?
벌써 나한테 질렸나?
머리가 복잡했다.
선생님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온다.
진짜로 자고 있다.
“….”
난 복잡한 심경으로 눈을 감았다.
…바보.
***
우리의 아침은 이곳이나 전생이나 똑같았다.
항상 아침 7시에 일어나는 선생님의 생활 습관에 맞춰 나 역시 7시에 일어나게 되었으니까.
우린 7시에 일어나 식사 준비를 마치고 거실의 TV에 전원을 킨 채 멍하니 아침을 먹었다.
잠을 푹~~~~ 자서 그런지 몸이 정말 개운했다!
“음.”
선생님은 멍한 표정으로 토스트를 씹고 있다.
잠을 정말 푹~~~~ 잤는지 얼굴이 반들반들하다.
“왜요?”
“이제 뭘 해야 하나 싶어서.”
선생님은 손을 죔죔 하며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 진짜 소설이나 계속 써볼까?”
“그래요, 그러면.”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끝낸 우린 노트북을 꺼내와 자리에 앉았다.
“이거 정말 오랜만이긴 하네.”
선생님은 마치 어린이날에 선물을 받았던 진수 같은 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드렸다.
그렇게 쓰고 쓰고 또 써서 관절이 상할 정도로 썼으면서 그리도 즐거운 걸까?
나도 선생님과 소설을 쓰는 시간은 즐겁긴 했는데….
“처음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디로 나가자고 하려고 했거든.”
선생님은 노트북을 바라보며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요?”
“근데 그건 뭔가 아닌 거 같아서.”
애초에 우린 집 밖으로 나가는 편이 더 드물었으니 이게 우리에게 맞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긴 했지.
진수와 희진이가 태어나서 가족끼리 외출을 종종 하기는 했지만 우린 기본적으로 인도어파였다.
여름엔 에어컨을 틀어놓고 수박을 먹고 겨울엔 보일러를 틀어놓고 귤을 까먹는 걸 더 즐겼다.
“1, 2년으로 끝나는 곳도 아니잖아.”
이걸 특별한 순간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새로운 일상으로 받아들이자는 이야기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그럼 어젠 왜 그냥 잤어요?
선생님은 변태다.
그것도 그냥 변태가 아닌 진짜 왕 변태다.
준수와 희진이가 태어나기 전만 해도 선생님의 일상이란 능글맞은 표정으로 나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운동하면 성욕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를 실천하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선생님의 성욕이 줄어들기 시작한 건 희진이가 태어난 이후부터였다.
그러니 어젯밤도 그렇고 그런 시간을 보내겠구나~ 생각했었는데….
뭔가 석연치 않다.
분명 해돋이를 보러 가기 전만 해도 그렇게 날뛰었으면서….
왜지?
내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이야… 신기하네. 이걸 아직도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
선생님은 서로소를 사랑한 아저씨를 아직까지 읽어주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이 반가운지 한동안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생님은 이미 10질 이상의 작품을 완결까지 써낸 이쪽에선 제법 유명한 기성작가다.
그런 선생님이 쓴 소설 중에서 가장 수입이 없는 소설이 서로소를 사랑한 아저씨다.
그런데도 저리 즐거워하는 것은 분명 그 소설이 우리의 이야기기 때문이겠지?
선생님이 아직 날 사랑한다는 것은 알겠다.
알겠는데… 자꾸 어젯밤의 일이 신경 쓰인다.
분명히 이 나이대의 남자들은 머릿속이 그런 거로 가득할 텐데….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오랜만에 들어보는 대사다.
선생님은 턱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빤히 내려다보셨다.
“혹시… 어제 아무것도 안 해서 섭섭했어?”
“….”
“그으래?”
선생님은 그 특유의 심술궂은 표정을 짓고는 자꾸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고개를 돌리면 돌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이밀어서 성가셨다.
왠지 약점이 잡힌 기분이라 묘하게 찝찝해….
“이 몸이 되니까 성욕이 살아나긴 했는데 말이야,”
선생님은 그리 말하며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내 오른쪽 어깨에 턱을 얹었다.
“예전처럼 그렇게 막 들이대고 그러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첫날에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걸 하자고 들이댔으면서….
“그, 첫날에 그런 건 나도 좀 과했다고 반성하고 있다고?”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만나니 뭔가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는 설명이었다.
“이젠 좀 자제하고 살려고 했지. 너한테 미움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리 말한 선생님은 내 뺨에 뺨을 비벼오셨다.
성가셔.
왠지 약점이 잡힌 기분이라 꺼림칙해…!
“수진 쌤. 오늘 밤은 좀 기대해봐도 되겠습니까?”
선생님은 그리 말하며 내 볼에 연신 입을 맞춰왔다.
실수했다.
선생님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쳐서 뭔가 꼬인 듯한 기분이었다.
뭔가 터무니없는걸 요구하는 게 아닐까?
“근데 참 신기하단 말이야.”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간 선생님은 노트북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쓴 것도 아니었잖아? 그냥 우리 일상을 툭툭 던지듯이 써넣은 이야긴데 아직도 읽는 사람이 있어.”
선생님은 연신 신기하다며 노트북을 바라보다가 뭔가 각오를 다진 사람처럼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쓸지는 모르겠는데…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써봐야겠다.”
다시 서로소를 쓰기 시작한 선생님의 표정은 참 즐거워 보였다.
마치 아버님께 장난을 쳤던 그때의 모습이 떠오르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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