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화 〉 앙코르 : 나와 선생님이 2회차를 살아가는 방법♥(3)
* * *
식사를 마친 우린 부천으로 향했다.
그동안 선생님은 별다른 말을 해오지는 않았다.
꼭 내가 무슨 일로 울었는지 눈치챈 사람처럼 말이다.
“안 물어봐요?”
“희진이가 나한테도 전화해서.”
“아….”
그 화상이 선생님한테도 전화했던 것 같다.
“이럴 줄 몰랐다면서 미안하다고 연신 그러더라. 다 본인이 잘못한 거니까 엄마한테 화내지 말라고.”
“….”
희진이가 제안한 것은 맞지만 선택한 것은 나다.
선생님의 마음에 상처를 준 건… 오로지 나였다.
“수진아.”
“…네.”
“난 말이야, 이제 그 정도로는 화내지 않을 거야.”
선생님은 그리 말하며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땐 정말… 하늘이 노래진다는 표현이 실감 나더라.”
선생님은 그때 그 아픔이 떠오르신 듯 인상을 찌푸리셨다.
“갑자기 미아가 된 기분이었어. 마음은 텅 비어버린 것 같고 그 텅 비어버린 곳에서 하염없이 물이 쏟아지는 기분이었지.”
너도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느꼈지?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정말 미칠 것 같았지.”
선생님은 자신을 종종 ‘어른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외동아들인데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드렸다면서.
고치려고 해도 그리 살아온 세월 때문인지 달라진 모습을 보여드리기 힘들었다고 했다.
“있을 때 잘했어야 했어. 이미 몇 번이고 말하지만… 사랑은 담아두는 것만으론 전해지지 않아.”
어머님과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엔 선생님의 친구분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셨다.
선생님은 그 친구분들과도 더 자주 만나지 못한 것을 후회하셨다.
“손으로 뜬 물처럼 티는 안 나는데… 어느새 사라져버려.”
내 손을 잡은 선생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너만큼은 항상 내 곁에 있더라. 그러면 된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선생님은 더는 신경 쓰지 말라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런 순간에도 나를 배려해주는 사람이다.
그래, 이런 사람이라서 사랑하게 된 거지….
선생님이 밤만 되면 짐승처럼 변하고 내 앞에선 어린애 같은 모습을 자주 보였어도 분명 이런 모습에 반한 거야.
선생님은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다.
“사랑해요, 선생님.”
“그래.”
사과보단 사랑한다는 말이 더 좋다며 웃어 보이는 선생님을 보니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마흔이 넘어 서로 몸을 섞지 않게 되었을 때 이래로 이렇게 설레는 기분은 처음이다.
아마 이런 느낌이 로맨스 소설에서 나오는 다시 반했다는 감각이겠지?
사랑에도 상한선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부천도 이젠 좀 낯설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
선생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숨을 쉬셨다.
생각해보면 나와 선생님이 부천을 찾아가는 것은 1년에 3~4번 정도가 끝이었다.
그것도 다른 곳을 둘러보거나 그러진 않았으니 낯설 수밖에.
선생님은 한숨을 한번 쉬시더니 근처의 카페에 들러 커피를 두 잔 들고 왔다.
“자.”
따뜻한 김이 솔솔 올라오는 카푸치노였다.
내 기분이 조금은 마일드해지길 바라셔서 사 오신 거겠지.
선생님다운 배려였는데 왜 이런 사소한 것에 이리도 가슴이 뛰는지….
“잠깐 앉았다가 가자.”
“네.”
선생님과 차에 앉아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카푸치노는 분명 따뜻했는데 그리 뜨겁지는 않았다.
“이거.”
“얼음 하나 넣어달라고 했어.”
선생님은 한층 부드러운 표정으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셨다.
“이것도 생각보다 오랜만인 기분이야.”
“이거…? 아~”
생각해보니 이렇게 선생님과 차에 앉아서 커피를 마신 적이 있긴 했었지.
분명 커플룩을 맞출까 말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그땐 들키면 파멸밖에 없는 관계였기에 굳이 커플룩을 맞추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백화점이나 가보자.”
선생님도 나랑 같은 생각인지 백화점을 향해 차를 몰았다.
커플룩을 하기엔 대략 80년 정도 늦은 것 같지만,
“뭔가 사후세계보단 환생한 느낌이다. 그지?”
“그러게요.”
이것도 나쁘진 않네요.
그렇죠, 선생님?
***
우리가 살던 시대는 백화점도 그 규모를 줄이는 중이었다.
오히려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로 말이다.
집에서 카탈로그를 선택하면 홀로그램으로 우리가 입었을 때 어떻게 보이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대였으니까.
“죽어서도 일하는 건 디스토피아가 아닌가 했는데 말이야.”
선생님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이런 건 아날로그 감성이 살아있어서 좋다는 이야기를 꺼내셨다.
치.
나랑 백화점에 쇼핑하러 오면 피곤한 기색을 팍팍 풍겼으면서….
뭔가 화가 나서 선생님의 등을 꼬집었다.
“아!”
선생님이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은 얼굴을 긁적이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내 표정을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그, 나도 나이가 있어서 말이야….”
“그으럼 오늘은 18살이니까 쌩쌩하겠네?”
“…네, 수진 쌤.”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생님의 손을 잡아끌고 커플룩을 찾아 나섰다.
분명 선생님 옷 사이즈가… 아.
“그건 이제 안 맞을 거 같은데?”
무심결에 선생님이 전생에 입던 옷 사이즈를 골라버렸다.
그것도 50대에 입던 옷 사이즈로.
지금의 선생님은 그때보다 활력이 넘치지만, 옷 사이즈는 맞지 않을 것 같다.
“이 정도면 되겠네.”
선생님은 내가 집은 옷보다 한 치수 작은 옷을 골라 들었다.
“오, 나름 괜찮네?”
선생님은 내가 골라온 2종류의 후드티를 골라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결혼하고 백화점에 다닐 때 보이던 태도와는 상반된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달라진 듯 달라지지 않은 느낌이 묘하게 인상적이었다.
난 선생님이 원래 입던 사이즈의 옷을 손에 들어보았다.
선생님이 이 사이즈의 옷을 입게 된 것은 운동한 다음부터다.
내게 잘 보이기 위해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운동을 시작하셨다고 했었지.
1년 또 1년이 흐를수록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데도 선생님은 운동을 멈추지 않으셨다.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나를 혼자 두고 떠나지 않으려고 노력하신 거겠지.
지금의 이 삶은 선생님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나와 결혼하고 운동을 그만두셨다면, 담배를 계속 피우셨다면 이런 일상은 더는 없었겠지.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는데 왜 이리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까?
어쩌면 매너리즘은 내가 걸렸던 게 아닐까?
“어때?”
옷을 갈아입은 선생님이 양팔을 살짝 벌린 채 내게 다가왔다.
“괜찮네요.”
“그래? 그럼 사자.”
선생님의 후드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부터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다른 것이었으니까.
나이를 먹어가며 선생님이 그 노력을 어느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내가 있던 것 같다.
나이를 먹어가며 생겨난 주름과 처진 가슴, 생기를 잃은 얼굴은 겉으로만 드러나는 일부에 불과했다.
내 마음도 몸을 따라 서서히 늙어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렇게 근사한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아까부터 왜 그렇게 멍해? 희진이 때문이야?”
“아뇨. 그냥 선생님이랑 이렇게 데이트를 한다는 게 조금 실감이 안 나서요.”
“아~”
선생님은 본인도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시대에 뒤처지는 느낌이었는데 말이야.”
우리가 살던 시대는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우리를 두고 나아갔다.
열심히 그걸 뒤쫓던 우린 결국 쫓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포기해버렸다.
우리에게 세계란 신포도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런 세계가 우리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해주었다.
그게 참 미묘한 기분이었다.
“세상일이란 게… 참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거지.”
“틀딱.”
“응, 반사.”
“반사에 반사.”
“무지개 반사.”
“풉!”
“넌 변하는 게 없네.”
“제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요?”
나와 선생님은 후드티의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아, 좋다.
선생님과 보내는 시간은 이래서 좋아.
딱히 대단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평범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뿐인데도 가슴을 채워주는 뭔가가 있다.
멎었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던 것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하고 주변의 경치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어.
진수가 태어나기 전에 선생님과 보내던 일상은 이런 느낌이었다.
서로 그저 손만 잡고 있어도 행복했었지.
소중한 사람이 그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런 당연한 것을 또다시 실감하고 있다.
정말로 이 세계가 사후세계가 아닌 환생한 내세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어때요?
저랑 같은 생각인가요?
한 번만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굳이 물어볼 생각은 없다.
말로 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도 있으니까.
선생님의 저 온화한 미소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선생님이 맞잡은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왜요?”
“오늘은 점심도 저녁도 외식이야.”
“…네.”
기왕 여기까지 나왔으니 데이트를 하자고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선생님은 역시 선생님이지.
이런 모습이 참 좋다.
***
이 세계는 2030~2040년의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아직 AI의 특이점이 오지 않았던 시대를 기준으로 되어있어 아직 인력이 중요시되던 시대다.
이런 시대엔 당연히 우리가 다니던 그곳들이 남아있겠지.
“일단 노래방이라도 갈까?”
“네, 가봐요.”
18살 고등학생인 선생님의 목소리로 듣는 노래도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과 팔짱을 끼고 노래방으로 향했다.
우리가 향한 노래방은 내 기억 속에 있던 노래방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뭔가 정겹다는 생각이 드는 로비에서 1시간 예약을 잡고 탄산음료를 2캔 주문해 방으로 향했다.
“옛날 생각난다, 그죠?”
“그러게. 근데 옛날이라고 하기엔 좀 오래되긴 했어.”
선생님과 마지막으로 노래방에 갔었던 건 내가 40이 되기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진수가 우리 가정에 찾아왔다.
우린 진수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애정을 쏟았다.
그러다 보니 세상은 우리를 두고 떠나버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많은 것이 바뀌어있었다.
노래방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볼링장, 당구장, 다트 같은 부류의 놀이시설도 사라져갔다.
마치 우리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카페처럼.
그게 몹시나 쓸쓸했는데.
“처음엔 그거 불러주세요.”
“그거?”
“네.”
“넌 그거참 좋아하더라.”
“선생님이 처음으로 불러준 노래니까요.”
“남아있으려나 모르겠네. 음… 오, 있네?”
밖은 이미 22세기다.
내가 중학생 때 나왔던 노래니 거의 100년이 흐른 노래인데 아직도 노래방 기기에 남아있다.
이곳은 꼭 그때 그 시절을 기준으로 시간이 멈춘 것 같아 마음이 온화해졌다.
“남의 얘기 같던 설레는 일들이~ 내게 일어나고 있어~”
선생님이 불러주시는 노래를 듣고 있으니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르는 기분이라 온화한 기분이 되었다.
한때 저 노래에 꽂혀서 콧노래도 자주 흥얼거리고 그랬었는데.
선생님은 그럴 때마다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었지.
그게 썩 우스워서 몇 번 더 흥얼거렸었는데.
선생님을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나를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우리를 연결하고 있던 것은 혼인신고서라는 계약도 아니고, 진수나 희진이라는 의무 때문도 아니었다.
우린 서로를 사랑했다.
죽어서도 영원을 맹세할 정도로 사랑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겠지.
그런 확신이 드는 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