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화 〉후일담 : 나와 수진이의 커튼콜(9)
선생님은 바보다. 자기 자신을 돌이켜볼 수 없는 멍청이다.
내 회임소식을 들은 아버님과 어머님이 올라와서 날 걱정해주고 뭘 챙겨주려고 하시는 모습을 보며 호들갑을 떤다고 해놓고서는 본인도 호들갑을 떤다.
웃긴 건 본인은 그 행동이 호들갑이란 걸 모른다는 것이지.
임신 초기여서 몸에 불편함도 없는데 불편한 건 없는지 청소를 하다가 먼지를 마시면 몸에 안 좋다던가 그런 소리를 하면서 일일이 참견을 하는데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갑자기 나갔다 오겠다고 하더니 화학성분이 적게 포함된 제품이라며 비누며 샴푸, 바디워시 등등을 사 왔을 때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이랑 아버님과 똑같이 행동하는데 본인만 눈치를 못 채고 있다.
그 엉뚱한 모습이 어딘가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니 왜 그러냐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도 귀여웠다.
그래도 이 약간 어리숙한 행동이 모두 날 위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행복할 따름이었다.
누군가가 나만을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찾아보고 궁리하고 준비하는 모습은 보고 있으면 가슴이 훈훈해지고 행복한 기분이 든다.
선생님의 좀 과하다 싶은 애정을 받고 배속의 장군이는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그래. 장군이지. 첫째는 여자아이였으면 했는데...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같이 캐치볼을 하고 싶다면서 글러브를 알아보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니 남자아이라서 다행이었나 싶기도 하다.
선생님과 처음 만났을 때가 38살. 올해도 40살이 되어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건만 선생님은 완전 애 같다.
그 약간 유치하면서도 천진난만한 모습이 귀엽게 느껴지는 건 역시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기 때문이겠지.
오라비가 내 앞에서 그러고 있으면 꼴값 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으니까 말이야.
나와 결혼하고 나서 선생님은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고 있다며 매일같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신다.
나도 마찬가진데.
선생님과 만나고 나서야 부족했던 뭔가가 채워진 기분이다. 물론 선생님한테 이런 기분까지 다 말할 수는 없다. 부끄럽잖아...
***
장군이 아니 진수는 자연분만으로 낳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선생님은 자연분만이 얼마나 아픈 줄 아느냐면서 시대도 바뀌었으니 제왕절개를 하라고 고개를 저으셨다.
나도 들어서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몸에 흉터가 남아서 선생님한테 보이기 싫다는 점도 있기는 했다.
엄마도 나를 자연분만으로 낳았으니 자연분만으로 낳고 싶었다는 점도 있었으며 그게 아이에게도 더 좋다는 어떤 글을 봤던 것도 있어서 그것도 신경 쓰이기는 했다.
하지만 가장 신경이 쓰였던 건 제왕절개를 하다가 아이의 얼굴에 칼자국을 남겼다는 인터넷 기사였다.
혹시 내 아이에게도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더니 선뜻 제왕절개가 머릿속에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선택을 나중이 되어서야 후회하게 됐다.
설마 아이를 낳는 일이 그렇게 죽을 정도로 아픈 일인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사극 드라마에서 입에 천을 물리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을 봤을 땐 많이 아프겠구나 싶었는데 직접 낳아보니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분만유도제를 맞고 출산의 아픔이 시작되자 나도 모르게 살려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선생님이 충격을 받을까 봐 수술실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살려달라고 선생님을 부르고 싶은 심경이었다.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아픔에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가 그 아픔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정신을 잃을 것 같다가도 아픔에 다시 정신을 차리는 연속.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순간 아이가 태어났다고 고생했다며 간호사가 격려의 말을 해준 순간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나는 바보처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리를 내었다.
뭐에 감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의사 선생님이 진수의 엉덩이를 살짝 두드리자 진수가 수술실이 떠나갈 정도로 울기 시작했다.
그 우렁찬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해냈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진수의 몸에 묻은 양수를 닦아내고 천에 쌓아 내 품에 안겨주는 간호사.
쭈글쭈글해서 왠지 늙은이로 보이는 진수가 보였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살이 차올라서 예뻐진다고 설명을 해주고 있기는 한데 그 설명이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아... 이 아이가 나와 선생님의 아이구나.
닮았어. 눈썹이나 코가 선생님과 빼닮았다.
아이를 품에 안으니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이를 보고 있으려니 왠지 갑자기 가슴이 술렁거려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뭔가 신기하고 이상한 기분에 아이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선생님과 가족들이 뛰어 들어왔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곧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파서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선생님이 울려는지 모르겠다.
...안다. 선생님이 얼마나 걱정하고 기다렸는지는 척 보면 안다.
잘 다려입고 왔던 셔츠가 주름으로 엉망진창에 평소에 잘 관리하고 다니던 머리가 엉망이다.
얼굴에 핏기가 없는 것도 그렇고 엄청 걱정하셨겠지.
"눈썹이랑 코가 아빠랑 판박이네~"
내 말을 들은 가족들이 전부 고개를 끄덕인다.
선생님은 멀뚱멀뚱 서서 진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다행이다. 선생님의 생각대로 돼서 말이야.
우리 진수는 이렇게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태어나서 행복한 삶을 살겠지.
진수는 나와 선생님처럼 아프지 말고 강하고 건강하게 자라줬으면 좋겠다.
***
진수가 건강히 자라고 의사소통이 제법 원활하게 되어갈 때쯤 나는 두 번째 임신을 했고 희진이를 낳았다.
진수를 낳을 땐 2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고 희진이는 2시간 정도로 아주 조금 시간이 짧아졌다.
출산의 고통은 겪는다고 익숙해지는 것도 아니었고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내 품에서 잠이 든 희진이를 바라보니 아픔도 그동안 견뎌야 했던 불편함에 대한 생각도 싸악 사라졌다.
그저 무사히 낳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무사히 우리의 곁에 와줘서 고맙다는 생각뿐이었다.
요양원에서 단기 입원을 마치고 집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진수는 형제자매가 있는 친구들이 있다며 나는 언제 생기냐며 그렇게 보채더니 막상 희진이에게 신경을 쏟으니 그게 질투가 났는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희진이는 예민한 아이라서 그것만으로도 잠에서 깨어 울기 시작하니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선생님이 진수를 데려가 진수를 타이르는 모습이 보였다.
마냥 아이 같던 선생님이지만 진수와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나서부턴 부쩍 그 나잇대의 어른이 되기 시작한 선생님.
선생님은 본인이 아버지로서 잘 행동할 줄 모른다고 그러셨지만 어디서 어떻게 보든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
진수의 재롱잔치가 열리는 날.
온 가족이 준비를 하고 진수의 재롱잔치를 보러 갔다.
선생님은 처음엔 별말이 없었지만, 진수의 재롱잔치가 끝난 다음엔 뭔가 좀 씁쓸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나중에 이유를 들으니 선생님의 입에서 조금 씁쓸한 과거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안타까웠다. 선생님의 조금 씁쓸한 표정이 진수의 얼굴과 겹쳐졌다.
나는 참을 수 없어서 선생님을 살짝 안아주었다.
조금이라도 선생님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었다.
선생님이 감정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입술.
오늘따라 입술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두근거렸다.
선생님의 조금 애절한 눈빛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다시 입술을 맞추려고 했더니 꼬맹이 녀석들이 우리를 훔쳐보고 있었다.
...칫.
***
진수의 결혼식은 정말 뜬금없이 찾아왔다.
갑자기 임신했다며 윤서를 데려왔을 땐 정말 깜짝 놀랐다.
앞으로 10년은 그럴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지 아빠를 닮아서 여고생을 좋아하나 봐.
선생님은 화를 내려다가 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화를 내기엔 좀 묘한 입장이라는 생각이 있었겠지.
아무튼, 진수의 결혼식은 정말 뜬금없이 시작되어 뜬금없이 끝이 났다.
여고생의 결혼식이라니... 이건 정말 귀하지.
나조차 대학생이 되어 생일이 지나고 했는데 말이야.
너무 늦으면 배가 많이 나와 웨딩드레스도 입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으니 정말 특이한 경험이긴 했다.
그래도 나 때와는 다르게 친구들이 축하를 해주는 장면을 보니 뭔가 부럽기도 하고 벌써 진수가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선생님은 소원권을 하나 이루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내 소원이 하나 이뤄졌다.
소원권은 앞으로 셋.
선생님은 과연 언제까지 내 옆에 있어 줄까?
이미 환갑인 선생님.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 수명으로 따지면 약 20년이 남았다.
여자의 평균수명이 85살 정도니 난 선생님을 떠나보내도 25년이나 더 이 세상에 남아야 한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더 내 곁에 오래 있어 주면 좋을 텐데...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
희진이의 결혼식이 시작됐다.
선생님은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해준 다음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선생님은 눈물이라도 흘렸는지 눈가가 붉게 변해있었다.
역시 아들이랑 딸은 느낌이 다른 거겠지.
난 별생각이 없었는데.
"고생하셨어요."
"너도."
선생님과 손을 잡고 희진이의 결혼식이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엉엉 우는 희진이와 그걸 달래느라고 고생하는 사위.
아... 드디어 끝이 났다.
부모로서 해야 할 역할이 끝이 났다고 생각하니 어깨의 짐을 덜어낸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의 나이는 벌써 70살. 이제 언제 죽더라도 이상이 없는 나이이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아직도 운동을 계속해서 의사가 50대보다 건강한 몸이라고는 하지만 원래 사람이 죽는 건 돌발적인 일이라 솔직히 잘 모르겠다.
선생님은 앞으로 얼마나 더 내 곁에 있어 주는 걸까.
잘은 모르겠다. 잘은 모르겠으나 1년이라도 더 오래 내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선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수명을 늘려주는 수술이 나오고 선생님이 수술을 받았다.
선생님은 몇 번이나 나에게 수술을 받으라고 권했지만 나는 한사코 그 수술을 거부했다.
지금까지 말로 표현하진 않았는데 내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이 사람은 아는지...
아침에 눈을 뜨면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다.
밤에 눈을 감으면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데 어떻게 수술을 받으란 말인지.
나는 수술을 한사코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내가 죽는 날에 같이 죽겠다며 안락사 기계를 주문해서 팔에 착용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난 선생님이 조금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선생님은 이것만큼은 양보하지 않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런 식으로도 약속이 이루어지긴 하는 거겠지.
앞으로 남은 소원은 하나.
내가 죽는 순간까지 선생님이 곁에 있어 주는 것.
죽는다는 건 두렵다. 이 나이가 되어도 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두려울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선생님이 함께해준다고 생각하니 그냥 그대로 눈을 감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80살이 되었을 때 희진이가 몰래 찾아와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우리의 목에 심은 칩에 대한 설명.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왜 인제야 알려주느냐는 이야기를 꺼냈다.
희진이는 눈을 뜬 두 사람이 깜짝 놀라서 어버버한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러면 나중에 혼날까 봐 나에겐 미리 말을 해두는 거라고 했다.
선생님에겐 비밀이라며 윙크를 하는 모습이 얄미워서 이마를 한 대 쥐어박았다.
선생님에게 비밀이라고 하니 뭔가 미안한 기분도 들지만, 마지막 순간에 선생님의 진정한 속마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기대가 되기도 했다.
주책맞다. 80살이나 먹은 할머니가 되었는데도 선생님이 내게 전해줄 사랑의 의미가 궁금해서 이런 장난을 치다니.
선생님이 이 사실을 알면 화를 낼까? 아니, 화를 내지는 않겠지.
그냥 섭섭하다고 하겠지. 그래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여자는 몇 살을 먹어도 여자라는 것을 말이다.